•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5. 중개무역의 성행
  • 3) 17세기 중·후반 중개무역의 성행과 그 영향

3) 17세기 중·후반 중개무역의 성행과 그 영향

 기유약조를 통해 대마도를 매개로 조선이 일본과 무역을 재개하면서 양국 사이의 무역은 임진왜란 이전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활성화되었다. 무엇보다도 양국 사이의 무역을 이제 사무역이 주도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조선 상인들은 중국산 물자를 일본 상인들에게 전매하여 막대한 이익을 취할 수 있었다. 또 조선 상인들이 일본 상인들에게 판매하는 土産品이 임진왜란 이전에는 주로 면포였던 것과는 달리 이제 人蔘이 중요한 물화로서 취급되었다.

 조선 상인들은 북경에서 사온 비단·생사 그리고 조선산 인삼 등을 일본의 銀이나 鐵을 받고 매매하였다. 명에서 판매를 금하고 있던 蟒龍緞을 제외한 여타 직물의 거래는 제한이 없어서 상인들은 紅黃色·紬布 등 각종 직물들을 전매하였다. 특히 광해군 4년의 기록에 따르면 의주나 동래를 거점으로 활약하던 잠상들이 중국의 주단 등을 왜인에게 중개하여 막대한 이득을 얻고 있었다. 왜란 이후에도 일본인들이 중국 시장에 직접 뛰어들어 중국산 물화를 구매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상황에서 조선 상인들이 전매를 통해 거두어들이는 이익은 클 수밖에 없었다. 일본 상인들은 이러한 조건에서 조선의 육로를 통해 직접 요동이나 북경 등지의 開市處로 진출하는 것을 열망했으나 그것은 조선에 의해 거부되었다.1304)≪光海君日記≫권 53, 광해군 4년 5월 신유. 어떻든 왜상들은 조선 상인들에게서 넘겨받은 물화만 일본에 가져가도 많은 이윤이 남았으므로 日本銀을 갖고 중국에 들어간 조선 상인들이 중국 물화를 사서 돌아올 때까지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이러한 배경에서 광해군 10년경 왜관에 머무는 일본인들이 1,000명에 이르렀고, 인조 2년에는 2,000명으로 증가하였다.

 17세기초 가시화되었던 明淸交替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중개무역의 중심지로서 조선의 위치는 변하지 않았다. 조선은 일찍부터 여진족에 곡물·면포·소금·농기구·耕牛 등을 공급해 왔거니와 명과의 전쟁 때문에 對中貿易이 중단되어 생필품을 비롯한 각종 물화를 조달하는 데 애로를 겪었던 後金은 물화의 공급자로서 조선을 더욱 주목하게 되었다. 더욱이 확대된 영토를 기반으로 유목집단에서 농경국가로 전환을 도모하던 시점에서 17세기 小冰期의 도래를 맞아 잦은 자연 재해와 그에 따른 기근과 농산물의 부족에 시달리던 후금은 남하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1305)李泰鎭,<前近代 韓·中 交易史의 虛와 實>(≪震檀學報≫78, 1994), 179쪽.

 인조 5년의 정묘호란은 바로 이러한 후금의 필요성에서 기인한 전쟁이었다. 조선에서 歲幣 명목으로 곡물과 면포 등을 공급받는 조건으로 후금의 침략군이 철수했거니와 정묘호란이 종식된 직후인 인조 6년 조선인 포로의 쇄환을 위해 열린 開市에서 후금 측은 조선에게 중국산 견직물과 면포 등을 공급하라고 요구한 바 있었다.1306)金鍾圓,<정묘호란>(≪한국사≫29, 국사편찬위원회, 1995), 253쪽. 인조 11년(1633)경에 이르면 조선은 椵島를 매개로 명에 대해서 뿐 아니라, 남으로는 일본, 북으로는 후금에 대해서도 물화를 공급하므로 힘이 부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데,1307)≪仁祖實錄≫권 28, 인조 11년 12월 갑술. 이것은 이제 조선이 동북아 3국 사이에서 물화 교역의 매개 역할을 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淸이 중원을 장악하여 점차 안정기에 접어들던 17세기 후반부터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중개무역의 거점으로서 조선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졌다. 그 분기점은 현종 9년(1668)이었다. 본래「寧波의 亂」을 계기로 중국과 일본 사이의 직접적인 무역은 정지되었지만 이후에도 제3국 상인을 매개로 간접 무역은 지속되었다. 선조 25년(1592)부터는 이른바 朱印船이라 불리는 선박들이 일본에서 출항하여 인조 13년까지 모두 356척이 마닐라·臺灣·캄보디아·샴 등지의 항구에서 중국 선박들과 무역을 벌였다. 당시 무역 허가증인 朱印狀을 얻은 상인들은 일본 상인과 중국 상인 이외에도 영국 상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또 포르투갈 상인과 화란 상인들 역시 각각 마카오와 대만을 근거지로 하여 17세기 초반 일본의 長崎(나가사키)를 왕래하면서 무역에 종사하였다.1308)永積洋子,<17世紀の東アジア貿易>(浜下武志·川勝平太 編,≪アジア交易圈と日本工業化 1500-1900≫, リブロポート, 東京, 1991), 105∼114쪽 참조. 이들 상인들을 통해 중국산 견직물과 生絲·도자기 등이 일본에 반입되었고 일본은 그 결제대금으로서 은을 지급하였다. 비록 16세기 후반부터 은 생산량이 폭증했던 일본이었지만 이 같은 중국산 물화들을 수입하면서 너무 많은 은이 유출되자 덕천막부는 현종 9년부터 장기로부터의 은 수출을 금지했던 것이다.

 장기를 통한 日本銀의 수출이 중단된 이후 조선의 왜관은 중개무역의 중심지로 더욱 각광을 받게되었다. 이제 대마도와 조선을 통한 무역로는 일본이 중국산 물화를 수입하는 거의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중국산 비단과 원사, 그리고 조선의 인삼을 수입하면서 일본은 은을 수출하였는데 그 양은 숙종 12년(1686)의 10여 톤을 정점으로 숙종 10년부터 36년까지 총 188톤, 연평균 약 7톤에 이르렀다. 숙종 12년 중국 상선들이 장기로부터 겨우 2톤 정도의 은을 실어갔던 것을 고려하면1309)Kazui Tashiro, Exports of Japan's Silver to China via Korea and Changes in the Tokugawa Monetary System During the 17th and 18th Centuries, Precious Metals, Coinage and the Changes of Monetary Structures in Latin-America, Europe and Asia, Leuven University Press, 1989, 100∼102쪽 참조. 中日貿易의 중개 거점으로서 조선이 차지하는 위치는 절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중개무역을 통한 일본은의 유입은 조선에 여러 가지 영향을 미쳤다. 우선 중개무역을 통한 이득이 높아지자 17세기초 이래 잠상배들이 이를 노리고 대거 東萊 등지로 몰려들었다. 동래의 왜관은 일본은의 집결지이자 조선이나 중국으로 유통되는 출발점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국가 기밀의 유출을 우려한 조정은 누차 잠상을 단속하라는 禁令을 내렸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단속의 책임을 맡은 동래부사가 잠상들과 연결되어 그들을 옹호하는 형편이었다. 다음으로 은의 집합처로서 왜관의 존재는 조선 조정에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17세기 초반 왜관과의 교역과 收稅를 통해 획득한 은은 조선이 明使를 접대하고, 궁궐을 영건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으로 충당되었던 것이다. 특히 명사들의 과도한 은 요구 때문에 전전긍긍할 무렵에는 왜관에서 그것을 대여받거나, 광해군 10년(1619) 명의 요청으로 후금을 치는 원병을 요동으로 보낼 때에는 군량의 운송 부담을 줄이기 위해 미곡을 왜관에 보내 은으로 바꾼 다음 그것을 요동에서 다시 곡물로 바꾸는 방식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인조대에는 조선 상인 가운데 왜관과의 잠상무역을 통해 7만냥의 은자를 축적하는 사람이 나타날 정도였다.1310)韓明基, 앞의 글, 33∼34쪽. 이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둘 때 조선이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중개무역을 거의 독점하게 된 현종 9년 이후로는 그 경제적 이득이 더욱 컸을 것임은 명약관화한 것이다. 17세기 후반 이른바 八包制가 실시되면서 조선의 譯官과 富商大賈들은 일본산 은을 갖고 연경에 가서 白絲와 紬緞 등을 수입하고, 그것들을 다시 왜관에 수출하였다. 현종 11년의 경우, 조선 상인들은 白絲 100근을 은 60냥에 수입하여 왜관에 전매할 때에는 160냥을 받고 있었는데 이를 보면 조선 상인들은 중개무역을 통해 약 2.7배의 이익을 취하고 있었다.1311)柳承宙, <朝鮮後期 朝·淸 貿易小考>(≪國史館論叢≫30, 國史編纂委員會, 1991), 229쪽. 또 이들 譯商輩들에게 편승하여 재부를 축적해 갔던 중외의 관청들은 역상배들에게 公用銀을 대여하여 利殖을 도모하기도 하였다.1312)柳承宙, 위의 글, 226쪽. 이 같은 추세에서 중개무역은 상업자본의 축적을 촉진하였고, 17세기초 실시된 大同法이 끼친 긍정적인 영향과 맞물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피폐해진 조선 경제가 회복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1313)李泰鎭,<國際貿易의 성행>(≪韓國史市民講座≫9, 一潮閣, 1991), 79∼80쪽.

 17세기 중반 이후 본 궤도에 오른 중개무역을 통해 조선이 이익을 보았던 추세는 18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일본 국내에서 점차 은의 대량 유출에 대한 우려가 나타나고, 은화의 순도를 낮춘 惡貨를 주조하는 등 통제정책을 취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더욱이 1730년대 덕천막부가 장기로부터 중국의 남경에 이르는 직접 무역로를 개설하면서부터 대마도와 동래를 연결하는 중개무역은 결정적인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1314)Kazui Tashiro, 앞의 글, 108∼109쪽. 자연히 일본산 은화의 유입은 현저히 줄어들었으며 동래에서 거래하는 물화는 미곡을 비롯한 소소한 생필품 몇 가지로 위축되었다. 요컨대 왜란 이후 100여 년 동안 조선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었던 중개무역은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韓明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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