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1. 16세기 사족의 향촌지배
  • 3) 사족지배체제와 수령권

3) 사족지배체제와 수령권

 이들 사족에 대하여 국가권력을 대변하는 수령은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가. 물론 우리 나라 전 시기를 통하여 지역사회에서 왕권을 대행하는 수령의 절대적 우위가 부정된 적은 없었다. 특히<부민고소금지법>은 15세기 말에 제정된 후 더욱 강화되어 지역사회에서 수령권을 부인할 수 있는 어떠한 힘도 존재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러한 약점을 이용하여 수령의 탐오와 불법이 우려될 정도였다.

 즉 16세기 중엽에는 국왕이 각 관의 수령들이 백성을 침학하고 불법을 저지른다고 하여<부민고소금지법>의 폐지 내지 완화의 의견을 구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朝臣들은 국가의 등급과 기강이 서지 않는다고 하여 그러한 의견에 대해 원래의 법을 준수하는 것이 옳다고 하고 있다.

 이 논의과정에 보면, 원래<부민고소금지법>이 元大典(≪經國大典≫)에는 杖100, 徒 3년에 그치고 있으나, 그 후의 受敎(≪大典後續錄≫에 수록)에서는 全家徙邊으로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억울한 일이 있거나 수령이 불법을 해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나타나니<부민고소금지법>의 완화 내지는 폐지를 하자는 입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원래의 법제를 유지하자는 입장은<부민고소금지법>아래에서도 관찰사가 黜陟을 하고 公論이 있어 수령을 견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거친 후 좌의정 沈連源이 국왕에게 回啓하기를 “조정의 이목이 비록 원방에는 미치지 못하나 감사가 이미 출척의 책임을 지고 있고 또 조정에 이목의 관원이 있어서 불시에 어사가 나가니 수령이 범법하고 침어하는 것은 저절로 공론이 있을 것이니 어찌 이 법을 기다려(이 법이 폐지 또는 완화되기를 기다려) 민원을 구하겠는가”라 하여,0019)≪明宗實錄≫권 11, 명종 6년 7월 무술. 아직 수령의 위상을 보호하여야 국가의 기강이 선다는 입장이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감사가 수령을 출척한다는 점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조정의 이목이 되는 관원들이 공론을 들어 수령을 견제한다는 점이다. 조정의 이목이 되는 관원이란 사헌부나 사간원의 관원을 말하는데, 공론이 어떻게 만들어져 전달되는가. 그것은 아마도 재지사족들의 향촌기구들을 통하여 중앙에 전달되리라고 생각되고, 그 대표적인 것이 경재소-유향소라고 하는 기구를 통하여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처럼 국가에서<부민고소금지법>을 제정하면서까지 수령권을 보호하려 했던 것은 어떤 면에서는 그만큼 재지세력들의 힘이 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0020)崔異敦은 부민고소금지법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세조 12년부터 直告制를 허용함으로써 수령 고소의 관행이 성행하였다고 한다(崔異敦,<조선초기 守令 告訴 관행의 형성과정>,≪韓國史硏究≫82, 1993). 따라서 재지세력을 규제하는데 정책의 주안점이 주어지던 16세기의≪대전후속록≫까지는 법전에 수령을 규제하는 조항이 따로 설정되지 않았었으나, 17세기에 들어가서 수령에 대한 통제 내용을 담은 조항이 숙종 24년(1698),≪受敎輯錄≫의 吏典에 독립적으로 수령조 13개 조항이 설정되기 시작하여, 18세기 초의≪新補受敎輯錄≫단계에서는 무려 44개 조항으로 늘어나고 있다. 이는 사족지배체제가 흔들림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조선 중기 초반에는 재지세력을 억제하는 입장에서 출발하였으나 점차 수령권이 강화되어 가자 17세기에 들어와서 이제 국가에서 수령권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한 점에서 본다면 16세기의 사족의 향권참여가 다른 시기보다도 컸던 것으로 인정된다.

 한편 16세기까지 각 지방에 두어졌던 교수·훈도의 역할에도 주의를 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의 유교적 이데올로기의 정착과 실천을 위하여 각 고을마다 향교가 설립되고 그러한 교육을 강화하기 위하여 각 군현마다 교수와 훈도를 두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교생들의 교육 회피와 교수·훈도에 대한 정부의 불충분한 대우 등으로 사실상 중앙의 成均館과 4學을 제외하고는 향교교육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교육정책의 불완전한 틈을 재지사족들은 사우와 서원의 설립을 통해 그 기능을 대행하게 되고, 결국 교수와 훈도의 파견은 폐지되었고, 향교의 기능 중 교육기능은 거의 유명무실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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