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1. 16세기 사족의 향촌지배
  • 4) 향촌기구의 여러 양상
  • (2) 유향소의 기능

(2) 유향소의 기능

 여러 가지 재지사족의 향촌기구 중에서도 국가의 지방기구 속에 반공식적으로 개입되어 있는 유향소에 대하여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유향소는 선초부터 두어졌다가 국가의 지방지배 강화책의 일환으로 파치되었으나 16세기에 들어와 사림파들의 건의로 다시 세워지기에 이르렀다. 다시 만들어진 유향소는 읍격에 따라 부 이상의 대읍에는 좌수 1명과 별감 3명을, 군에는 좌수 1명과 별감 2명을, 현에는 좌수 1명과 별감 1명을 두었다. 이들 유향소의 임원인 좌수와 별감은 유향품관들 중에서 논의를 하여 경재소가 임명하였다. 경재소는 그 지방 출신이나 그 지방과 8향 이내의 연고가 있는 재경 관인들로 구성되었다. 유향소에서는 좌수와 별감에 임명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향안이다. 향안은 따라서 鄕案·留鄕座目·鄕中座目·鄕座目·鄕籍·鄕射錄 등 다양한 명칭으로 작성되었다. 현재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향안은 경상도에 35개 지역으로 가장 많이 남아 있고, 전라도에 22개 지역, 충청도에 6개 지역, 강원도에 4개 지역 등 총 76개 지역이다.0025)金炫榮,<조선시기 사족의 향촌지배 연구와 자료>(≪조선시기 사회사 연구법≫,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 그러나 이는 조사가 전국적으로 충분히 되지 않은 것이어서 훨씬 더 많은 향안이 소개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거의 대부분의 군현에서 그 지역 사족의 명단인 향안을 작성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향안에의 입록은 엄격한 심사를 거쳐서 이루어졌는데, 가장 중요한 기준은 3향 여부에 있었다. 3향은 부향, 모향(모향은 외삼촌의 입록 여부가 기준이다), 처향을 의미하는데, 父·母·妻 3향이 모두 같은 고을의 舊鄕案에 입록되어 있으면 3향이고 그 중 2개가 입록되어 있으면 2향, 1개가 입록되어 있으면 1향이 된다. 이 가운데 3향인 경우에는 바로 입록이 되고(이를 直書라고 하였다), 2향 이하인 경우는 기존 향원들이나 향중의 원로들에 의하여 투표를 거쳐서 입록되었다(이를 圈點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향안에의 입록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 지역에의 토착성 여부이고, 그 다음으로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이 신분적 제한(관직 여부보다는 적서의 구별)이었다. 俛仰亭 宋純과 藥圃 鄭琢이 각각 거주지의 향안에 입록하기 위하여 향로들에게 잔치를 벌여 주었다던가 하는 고사는 향안에의 입록 기준이 관직 여부가 아니라 그 지역에의 토착성 여부가 향안 입록의 1차적 기준이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향안 입록 기준은 17세기 이후 한결 강화되었고, 그것은 결국 18세기 이후가 되면 향안의 파치로 귀결되게 된다.

 이렇게 향중에서 자치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제반 운영규정은 향규로 정리되어 있다. 향규는 향중입의·입의·입법·완의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규정되었지만, 향규의 기본 내용은 향안에의 입록 기준(이를 권리로 표현하면 鄕籍權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좌수·별감 등 향임을 선출하는 규정(이를 鄕薦權이라고 할 수 있다)이 주요 내용을 이루고 있다.

 유향소를 중심으로 한 재지사족들의 향권과 중앙정부 또는 중앙권력과의 관계를 검토해보면 다음과 같다. 중앙정부-(관찰사)-수령의 체계로 전달되고 수령이 향리, 군관 등 자신의 手下機構를 활용하여 지방을 통치하는 공식적인 지방통치기구 이외에 국가에서도 거의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활용되고 있는 유향소의 운영 메카니즘이 사족지배체제의 중심으로 자리하면서 존재하고 있었다. 사림파의 지방장악의 한 방법으로 여러 차례의 복설 논의를 거치며 치폐과정을 반복하다가 16세기에 들어와 정착된 유향소는 향촌사회 내에서는 수령과 협조체제를 유지하면서 부세·군역 등 국가의 지방통치에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유향소가 수령과 대립관계에 놓이면서 그 지역 사족의 이해를 대변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유향소가 수령과 대립하면서까지 사족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경우는 그 지역 사족들의 재경연합체라고 할 수 있는 경재소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물론 경재소가 지방 품관층을 통제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해석도 있다). 즉 중앙정부-수령으로 이어지는 공식적인 지방지배 루트와 경재소-유향소로 이어지는 비공식적인 지방지배 루트도 설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재소-유향소로 이어지는 지방지배 루트야말로 사족들이 그들의 의지에 따라 지방지배를 실현할 수 있는 기구였던 것이다.

 지방 수령의 비행에 대한 風聞彈劾의 루트를 통해서 재지사족은 수령권의 횡포를 견제할 수 있었다.≪大典續錄≫에도 留鄕色掌을 府 이상은 4인, 郡은 3인, 縣은 2인을 差定하도록 하면서 이들의 임무를 규정하여 풍속에 관계되는 것을 논죄하도록 하였는데, 경재소에 移文하여 논죄하도록 하고 있다.0026)≪大典續錄≫권 3, 禮典 雜令. 풍속에 관계되는 것의 범위가 명확치는 않으나 이를 보면 경재소와 유향소의 상응관계를 이해할 수가 있다. 한편 역으로 색장이 인연하여 작폐하는 경우에는 관찰사 및 사헌부가 탄핵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렇게 지역 출신 중앙관료는 유향소를 통하여 재지사족을 지배하기도 하고 재지사족의 지방지배를 후원하기도 하였다.

 다음은 16세기 지방관을 역임했던 權橃(1478∼1548)과 權文海(1534∼1591)의 수령 재임시의 일기를 통하여 유향소와 수령과의 관계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권벌이 永川군수 때인 중종 9년(1514) 37세 때의 일기인≪永陽日記≫에도 수령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좌수·별감에 관한 기사가 자주 등장한다. 9월 14일에 영천군수에 제수되어 10월 13일에 辭陛를 하고, 11월 2일 현지에 부임하여 훈도와 생원들을 접견하고 바로 기관들을 감사, 병사, 수사, 수영우후 등에게 禮狀을 보냈다. 이틀 후인 4일에는 좌수를 접견하고, 다음날인 5일에 別置倉에 가서 유향소 임원들과 함께 荒租 1,880석을 監納하였고, 그 다음날인 6일에도 관채(환곡) 황조 2,189석과 太 68석, 木麥 7석 등 합계 2,214석을 감납하였다. 다음날인 7일에도 의창에 앉아 공채를 납입하는 것을 감독하였다.0027)權 橃,≪永陽日記≫(필사본, 영천군수시의 일기). 이와 같이 환곡을 분배하고 납입을 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유향소의 임원인 좌수 또는 별감이 함께 참석한 것을 볼 수 있다.

 선조 14년(1581) 권문해의 공주목사시의 일기에 의하면, 고을의 옥에 갇혀 있는 죄인들에 대한 감시의 책임도 향소가 지고 있는데, 이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강력히 개진하기 위해서는 품관층들의 지원이 필요하였다.

9월 26일 죄인이 도망, 탈출한 일로 사유를 갖추어 감사에게 보고하다. 향소 등이 使相(관찰사) 전에 발괄[白活]하려고 품관들을 이끌고 淸河로 향하였다. 掌務 향리를 잡아서 決杖하고 돌아오게 하였다. 모두 청하 땅에 도착하였다. 향소 등이 모두 돌아왔다(權文海,≪草澗日記≫, 韓國精神文化硏究院, 선조 14년, 48세시).

 이와 같이 유향소는 수령과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여러 측면에서 그를 보좌하였다. 환곡의 분배와 감납, 형옥의 관리 등 지방행정 전반에 걸쳐 수령을 보좌하면서 재지사회를 통치하고 지배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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