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1. 16세기 사족의 향촌지배
  • 4) 향촌기구의 여러 양상
  • (3) 향교와 사마소

(3) 향교와 사마소

 유교국가로서 尊賢과 교육을 위한 기구로서 각 군현에 설립된 향교는 16세기에 들어서면서 교육기능을 거의 상실해 가고 있었다. 이러한 향교의 교육기능을 서원이 설립되어 대체하게 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0028)향교의 교육기능을 대체하여 서원이 설립되는 과정과 退溪 李滉의 서원설립운동에 대해서는 鄭萬祚,≪朝鮮時代 書院硏究≫(集文堂, 1997) 참조. 16세기의 향교나 서원은 조선 후기에서 보는 것처럼 재지사족들의 향권기구로서의 역할은 하지 못하지만, 유향소와 함께 재지사족들의 향촌기구로서의 역할은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향교는 원래 국가에서 설립한 것이고 수령의 관할하에 있는 것이어서 수령권과 사족권의 대립이라는 점에서는 논의 대상에서 멀다. 그러나 향교 교생이 대다수 재지사족의 자제들로 구성되어 있고 집단화되어 있으며, 考講 등을 통한 사족에의 한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재지사족의 간과될 수 없는 향촌기구라고 하겠다. 향촌기구로서의 향교에 대한 연구는 그다지 많지 않다. 다만 조선 초기 향교의 교육적 기능과 교생에 대한 연구가 약간 있을 뿐이다.0029)李成茂,<朝鮮初期의 鄕校>(≪漢坡李相玉博士回甲記念論文集≫, 1969).
李範稷,<朝鮮前期의 校生身分>(≪韓國史論≫3, 서울大, 1976).
―――,<朝鮮前期 儒敎政策과 鄕校의 機能>(≪歷史敎育≫20, 1976).

 향교와 관련하여 司馬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향교와 같이 정부로부터 인정된 공식기구는 아니지만 재지사족세력의 의사대변기구로 존속하고 있었다. 사림파에 의해 건립된 사마소가 훈구세력에 의해 장악된 유향소와 대립적인 것으로 파악한 견해도 있지만,0030)李泰鎭, 앞의 글(1972·1973). 사마소가 조선 초기부터 전국의 각지에 설립되어 유향소와 협조 관계를 유지하며 재지사족의 향촌기구로 존속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0031)윤희면은 사마소를 지방의 생원·진사들의 교육장소로 파악하였는데, 그것은 무리라고 생각된다. 물론 사마소에 생원·진사들이 모여 서로 시를 짓고 강마하는 기능도 하였을 것이나, 그것을 성균관에 대체되는 교육기관으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된다(尹熙勉,<慶州 司馬所에 대한 一考察>,≪歷史敎育≫37·38, 1985). 사마소는 유향소와 대립하는 시기도 있지만 협조하는 관계가 기본적이었을 것이고 지역에 따라 많은 편차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례를 우리는 영천의 사마소에 대한 치죄 사건에서 볼 수 있다. 경상감사 李湛은 영천 향교 묘정의 오동나무를 베어낸 수령에 대해 항의하고 욕보인 품관·교생 등과 사마소의 생원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수령과 재지사족의 대립, 국가와 사족간의 대립사건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국면에서 사마소와 유향소는 오히려 협조관계에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경상감사 이담은 재지사족들의 횡포를 규탄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요즈음 습속이 날로 그릇되어 留鄕所 외에 별도로 司馬所라는 것을 두어 하나의 官府로 만들고, 한 지역에서 제일 어른 노릇을 하면서, 논의를 주장하여 公私間에 폐를 끼치고 있으며, 수령을 헐뜯고 칭찬하는 일도 그 손에서 나오고 있으니 현재의 폐풍 가운데 이보다 심한 것은 없습니다(≪明宗實錄≫권 26, 명종 15년 2월 계묘).

 즉 유향소 이외에 사마소가 또 하나의 향촌기구로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국왕은 승정원에 전교하여 “유향소와 사마소는 지방의 큰 걱정거리이다. 제멋대로 행동하여 폐를 끼치고 지나치게 무례하니, 마땅히 엄히 다스려야 할 것이다”고 하여 엄히 치죄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이 기사에 대한 史臣의 史評은 중앙정부의 입장과는 달리 오히려 성묘의 뜰의 나무를 벤 죄가 더 크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국가의 입장과 재지사족의 입장에 선 사관의 견해가 크게 달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金炫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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