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2. 향촌자치조직의 발달
  • 1) 향촌자치조직의 발달 배경

1) 향촌자치조직의 발달 배경

 조선시대의 사회성격은 흔히 ‘양반관료제’라거나, ‘사족지배체제’라고 한다. 만약 그같은 성격 정의에 동의한다면, 특히 조선 중기 사회는 그 중에서도 사족 중심의 자율적인 향촌지배가 이루어졌다는 특징이 부각되는 시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양반, 혹은 사족들은 어떠한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하여 왔을까. 또 그들은 어떠한 지배구조와 운영원리 속에서 향촌사회 지배세력으로 존속할 수 있었을까.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올바로 살피려면, 그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그러한 재지지배력을 확보할 수 있느냐의 문제와, 향촌사회의 사족들이 가지고 있는 자율적인 조직문화를 규명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 초기에 재지사족들이 향촌사회에서의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극복해야할 두 가지의 커다란 과제가 있었다. 그 하나는 고려말 이래 향촌사회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토호적인 향리세력과 상대하여 우위권을 확보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조선건국 이래 중앙정부가 지속적으로 추진했던 지방통제정책에 맞서서 어떻게 자신들의 자율적 지위를 확보하는냐가 바로 그것이었다. 첫째의 과제는 성리학의 정착, 보급과정이나 중앙정부의 제도적 지원을 받으면서 진행되었지만, 둘째의 과제 측면에서 본다면 이는 오히려 수령이나 국가(중앙)권력에 의하여 사족들이 동원되는 형태였기 때문에 또다른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었다. 더구나 개국 이후 잦은 정변과 중앙권력의 재편이 어느 정도 완수되면서는 새롭게 특권을 지닌 공신과 훈척들의 간섭과 견제를 배제하는 일까지 새롭게 부가된다. 그것은 훈척들이 지방에 토지기반을 가지게 되면서 재지사족과 농민지배와 관련한 갈등이 야기되었기 때문이었다.0032)李海濬,<朝鮮前期의 鄕村自治制>(≪國史館論叢≫9, 1989).

 조선 중기 향촌자치조직은 어떤 의미에서 조선시대 사족의 향촌지배라는 기본적 성격을 특징지우는 요소라고도 할 수 있다. 조선 전기의 향촌사회는 조선 초 정립된 군현체제 아래에서 중앙정부에 의해 추진되는 수령 중심의 행정조직체계와, 이에 일정하게 대립·갈등하면서 재지세력들이 추구했던 자율적 향촌지배, 그리고 이러한 지배층들과는 다르게 자연촌적인 체계 속에서 생활공동체의 일부로 존재하던 기층민들이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면서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초 지방제도의 개편은 태종 13년(1413) 이후 단행되기 시작하여,0033)≪太宗實錄≫권 26, 태종 13년 10월 신유. 세조 2년(1456)에는<郡縣竝合事目>의 반포로 郡縣의 통·폐합, 郡縣治所의 新定 등0034)≪世祖實錄≫권 5, 세조 2년 11월 기축. 군현정비가 마무리되었다. 그 결과 세종 말까지는 군현의 수가 300여 개로 통폐합되었으며, 중앙정부는 궁극적으로 이들 지방군현을 직접 지배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 외관의 품계격상(태종대), 수령구임법과 부민고소금지법 실시(세종대) 등등은 바로 이같은 향촌에서의 수령권 강화를 위한 조치였다.

 그리하여 선초의 수령에게는 행정·사법·군사권 등 입법권을 제외한 담당 고을에서의 절대권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앙집권적이며 수령 중심적인 향촌통치책은 기존 향촌세력의 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의 향촌세력의 두 계열은 고려시대 이래의 토호적 성격을 계승한 吏族세력과, 새롭게 성장한 士族세력으로 구분할 수 있다.0035)李成茂,<朝鮮初期의 鄕吏>(≪韓國史硏究≫5, 1970).
李樹健,<高麗後期「土姓」硏究>(≪東洋文化≫20·21, 嶺南大, 1981).
그런데 이들 두 세력의 사회적 이해관계나 성장배경은 달랐지만, 조선 초기의 중앙집권 강화나 수령을 통한 관권 위주의 지방통제정책에 대하여는 모두가 비판적이었다. 다만 선초의 강화된 수령권에 대한 이족세력(향리)의 반발이 주로 수령능욕·구타·무고·모살 등의 불법적 방법으로 이루어졌다면, 재지사족들은 보다 조직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으로 향촌사회에서의 우위를 확보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런데 이같이 중앙정부가 기도했던 수령체제 혹은 수령권의 강화로 대변되는 지방통제 정책은 기득권을 확보하고 있던 재지세력(토호·이족)들과 고려말 이래 재지기반 위에서 새롭게 성장하고 있던 사족들에게 심각한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이같은 지방통제정책에 대응하여 향촌사회세력들은 다양한 자기 방어와 적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사족들은 바로 그 과정에서 나름대로 사림(사족)을 주축으로 하는 향촌자치 조직들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향촌의 자율을 추구하게 된다.

 유향소를 중심으로 한 향촌지배세력의 수령권에 대한 반발이나, 수령 혹은 경재소를 통한 중앙정부의 재지세력 통제 욕구는 바로 이 시기 향촌사회가 갖는 복잡한 구조를 대변한다. 여기에 향촌사회 내부에서의 사족과 이족간의 갈등, 그리고 지주적 특권을 가진 사족과 기층농민 사이의 문제가 혼재되면서 조선 전기의 향촌사회는 중앙권력과 재지사족 양자간의 타협이 전제되는 ‘16세기의 사족지배체제’를 완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되어가는 과정상에서 훈구파와 사림파라는 서로 대립적인 정치세력의 상충이 있었고, 그들이 함께 추진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성리학이라는 이념적 사회운영원리가 작용되기도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향약시행을 둘러싼 논의나 향촌지배권을 선점·확보하기 위한 대립도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정치·사상적인 변화상과 함께 향촌사회 내부에서는 지주층으로 성장하는 사족들이 자신들의 향촌지배권을 중앙권력(수령권)으로부터 지키려는 자발적인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다. 때로 그것은 향약이나 향규·향안과 같이 一鄕을 망라하는 조직형태로 구체화되기도 하였고, 그보다는 좀더 하부체계로서 親隣·同志的 성격을 가지는 사족들의 결사체인 洞契 조직으로 성립되기도 했다. 이들 조직은 부언할 필요도 없이 성리학적 사족지배질서를 향촌사회에 이식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동계조직과 향약·향안·향규조직은 서로 기반과 배경이 되면서 이들 사족들의 이해를 대변·반영하는 향촌지배구조를 성립시켰으며, 적어도 16세기 중반경에 이르면 이들 조직의 결속력을 기반으로 사족들은 일향의 지배를 실현할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16∼17세기의 사족지배체제는 바로 이러한 복잡한 과제의 극복과정에서 나타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사족들에 의하여 추진된 일련의 이 시기 향촌활동들이 모두 이러한 재지사족의 지위유지와 그 성장수단으로 모색되고 추진되었다고 할 수 있다.0036)李泰鎭,<士林派의 留鄕所 復立運動>(≪韓國社會史硏究≫, 지식산업사, 1986). 따라서 그 내용은 대체로 자율적인 재지지배권 확보와 결속력 의지를 반영하게 마련이었고, 그 모습은 유향소나 경재소의 조직과 운용, 향약과 사창제의 시행, 동계의 조직 등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 16세기 이래 재지사족들은 부세운영과 향임층에 대한 인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자율권을 행사하기도 하고, 향규·향약·동계를 만들어 향리와 일반민들을 그들의 지배하에 수렴할 수 있었다.

 이같은 사족들의 향촌지배구조를 우리는 鄕案秩序라고 부르는데 향안이 바로 이들 주도적인 향촌사족들의 대표적인 조직이자 그 名案이었기 때문이다. 향안에 입록된 사족들은 ‘鄕會’로 대표되는 그들 중심의 합의체적 향촌권력기구를 통해 留鄕所(鄕所)의 좌수·별감 등 鄕任을 선출·통제하였고 ‘鄕規’를 만들어 吏胥와 하층민들을 통제하고 위로는 관권과 일정하게 타협하면서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사족이 매개가 되는 지방통치의 방식은 봉건정부의 당시 입장에서 보면 상보적인 타협의 소산이기도 하였다. 즉 국가권력으로서도 지방지배에 있어 고려 이래의 토착적 기반을 가지고 있던 향리집단들을 제어하는 동반자로서 사족을 선택하여야 했던 현실, 그리고 향촌사회의 공동체적 질서와 물적 토대가 확고했던 재지사족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같은 향촌사회의 지배구조가 가능했던 기본 배경에는 이 시기 지배이념과 사족들의 위상강화가 연결되어 있었고, 그와 함께 사족들의 결사체적인 조직들이 발달할 만한 사회·경제·문화적 기반이 마련되어 있었다. 성리학 이념의 정착과정, 15세기 이후 농법의 발달과 그에 수반한 경지의 확대과정은 사족들의 경제력 상승에 크게 기여하였다.0037)李泰鎭,<15∼6세기 新儒學 定着의 社會經濟的 背景>(≪奎章閣≫5, 1981).
―――,<16세기의 川防(洑) 灌漑의 發達>(≪韓㳓劤博士停年記念史學論叢≫, 1981).
더구나 아직은 사족들의 경제적 성장이 기층민과 마찰을 야기할 상황에 이르지는 않았으므로 자율성과 성리학 교화이념을 앞세운 사족들의 향촌지배는 자연스럽게 진행되었으며, 이해를 같이하는 사족들의 공동이해를 반영하는 洞契와 같은 결사체적인 조직들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한 기층민 지배도 가능하였던 것이다.0038)이해준,<조선후기 동계·동약과 촌락공동체조직의 성격>(≪조선후기향약연구≫, 민음사, 1990).

 이러한 향촌의 자치와 자율추구 경향은 중앙권력의 통제와 지배층(사림·사족)의 공조적인 타협으로 일시 변형되기도 하고, 일정하게는 조선 전기 향촌사회가 구조적으로 지니고 있던 한계 속에서 본래 목적했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한 면도 있었으나 꾸준히 그 자율추구의 성향을 지속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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