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2. 향촌자치조직의 발달
  • 2) 향촌자치조직의 내용과 성격
  • (2) 향약과 향규

(2) 향약과 향규

 향약과 향규는 조선 중기 사족의 향촌자치조직으로서 주목된다. 향약은 어의상 ‘一鄕의 約束’ 또는 ‘鄕人間의 약속’이란 의미이지만, 향민 중에서도 특히 사족들이 주축이 되는 조선시대 향약의 성격은 외형상으로는 중국의<여씨향약>혹은<주자증손여씨향약>과 내용상 차이가 있다. 조선 중기에 조선적인 특성을 가지며 성립되는 향약은 두 가지의 서로 다른 기원과 전통을 가지고 있다. 우선 그 첫째는 중국으로부터 성리학의 수용과 함께 알려진 향약의 성격을 이어받은 것이고, 둘째는 사족들에 의해 마련된 향규가 향약의 명칭을 빌어 외형적 논리를 갖추는 경우이다. 조선 중기에는 흔히 양자가 착종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데, 양자를 좀더 분명하게 구분한다면 전자의 성격이 강하면 ‘鄕約’, 후자의 성격이 강하면 ‘鄕規’라 불러야 할 것이다.

 성리학자들에 의하여 향촌사회의 안정원리로 주목받기 시작한<주자증손여씨향약>은 중종대부터 그 보급운동이 추진되었다. 즉 중종 12년(1517) 6월 조정에서는 향약보급문제가 논의되고, 7월에는 적극적인 실시가 결정되게 되었다. 특히 경상도 관찰사 金安國에 의해≪주자증손여씨향약언해본≫이 간행되어 반포됨에 따라 향약은 급속도로 보급되었는데, 이 시기의 향약보급운동은 감사를 중심으로 하여 위로부터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의 향약은≪주자향약언해본≫을 대본으로 한 획일적인 내용으로 백성들의 성리학 교화에 초점이 두어졌을 뿐 조선적인 변형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중종대의 향약보급운동은 훈구파에 의해 장악된 유향소·경재소가 존속된 상태에서, 사림파에 의해 별도로 이루어졌고, 또 중종 14년의 기묘사화로 사림세력이 축출되었으므로 기묘사화 이후에는 훈구세력에 의해 전면적으로 부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향약실시는 명종·선조대에 이르러서야 각 지방의 현실적인 여건을 참작한 개별적인 시행으로 나타나게 된다. 명종대에는 개별적인 향약시행이 용인되고 趙光祖 당시의 향약과 달리 구휼적 성격이 강조되는 형태였다. 명종대에 개별적으로 실시된 향약의 실례로는 명종 11년(1556)에 李滉의 주도하에 만들어진<(예안)鄕立約條>(실은 鄕規의 성격이 강함)와 명종 14년에 李珥가 서문을 쓴<坡州鄕約>등이 있다.

 사림이 정권을 장악하는 선조 초에 이르면 예조와 사간원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향약실시논의가 다시 제기된다. 그러나 당시의 향약논의는 중종대의 강력한 향약시행 노력과 달리, 주자향약의 단순한 모방에서 벗어나 주자학에 대한 심화된 이해를 바탕으로 주자향약을 수정, 변용하는 응용단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향약시행논의에서는 동계·향도조직의 활용방안까지 제기되기도 하였다. 선조 6년(1573) 9월에는 예조에서 주자향약을 우리 나라 실정에 맞게 간추려 정하여 올렸는데 그 내용의 대강을 보면 다음과 같다.0052)≪宣祖實錄≫권 7, 선조 6년 9월 갑진.

① 매월마다 개최하는 강신회는 몇 개월에 1회로 전환할 것. ② 강신회 때는 술 한 동이와 밥 한 그릇으로 한정할 것. ③ 강신회 집회장소는 향교로 한정하지 말고 부근에서 각자 상회할 것. ④ 유소자가 존장자에게 6차 예견하던 것은 세배시에만 예견할 것. ⑤ 善惡籍은 善籍만 기록하고 惡籍은 폐기할 것. ⑥ 외방으로 사족이 적은 곳은 수령이 약정을 겸하게 할 것.

 이 중 ①∼④는 조선사회의 실정을 고려하여 번잡함을 덜기 위한 조치로 이후에 실시되는 개별 향약들에 반영되고 있다. 특히 ③은 앞서 동계나 향도조직의 활용을 제기했던 재상들의 의견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의 향약실시가 군현 단위에서 면·리 수준으로 현실화되어 갈 것을 암시해 주고 있기도 하다. ⑤는 약법을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 향약기구가 행사하는 처벌권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이는 중종대에 시행되었던 향약이 善惡籍의 운영을 엄격히 하고 수령권을 능가할 정도로 형벌이 마구잡이로 사용된 데서 야기되었던 폐단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즉 전국적으로 실시된 당시 향약은 중종대 기묘사림의 향약에 비하여 사회개혁적인 성격이 약하였다. 또한 수령을 대표로 하는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향약에 깊숙히 침투하기 시작하였으며, 향약의 성격도 주자학적 교화를 의미하는 권선징악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이와 같은 향약시행은 선조 7년 2월 西原(청주)향약의 실시 경험이 있는 이이가 ‘先養民後敎化’를 내세워 ‘鄕約實施太早論’을 주장하여 정지될 때까지 전국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이의 이 향약정지론 이후에는 더 이상 전국의 일률적인 향약정책은 추진되지 않고 향촌마다의 특수성이 반영된 개별적인 향약이 시행되었다.

 그런데 이상과 같은 국가의 정책적인 여씨향약 보급운동 이전에도 이미 지역에 따라서는 개별적인 향약의 실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자료에 의하면 향약이 가장 일찍 실시된 지역은 광주였다. 세종대(15세기 중엽)에 金文發에 의해서 이루어진 광주지역의 향약은 문종 원년(1451)에 李先齊와 현감 安哲石에 의해 마련되었고, 그 후 성종 원년(1470)에는 丁克仁이 태인에서 향약을 실시하였음이≪古縣洞約誌≫에서 확인된다. 또≪師友名行錄≫에 의하면 姜應貞도 성종 9년 이전에 향약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新增東國輿地勝覽≫전라도 용안현조에는 향음주례 기사와 함께 향약의 4대 조목과 5가지 출향규정이 기록되어 있고, 安鼎福의≪順庵集≫에서도 鄭汝昌이 안음에서 향약을 시행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록들은 단편적이긴 하지만 중종대의 전국적인 향약보급운동 이전에도 개별적인 실시 움직임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가 고려해 볼 수 있는 것은 향약의 시행이 반드시 여씨향약의 영향 속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향촌지배층의 향음주례나 사족계열의 족계형태, 그리고 기층민 중심의 향도 등 향촌공동체조직과 연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점에서 조선 중기의 향약 가운데 향규와 구별되는 진정한 의미의 향약으로 이이의<서원향약>과<해주향약>은 매우 주목되는 자료이다.

 향규는 향안에 오른 향원들간의 약속으로 유향소의 조직 즉 座首의 선임, 소관업무, 鄕案入錄자격 및 절차, 향계의 영수인 鄕先生 및 그 서무인 鄕有司의 업무, 호장·이방 등의 선임에 관한 규약이었다.0053)金龍德,<鄕規硏究>(≪韓國史硏究≫54, 1986). 이들 규약의 형태는 조선 초기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전하는 실제의 자료는 없다. 0054)이 조선 초기의 유향소들이 각 지역 유향품관의 자발적인 조직으로 이루어졌다고 추측한다면, 처음 단계의 규약들은 번잡하고 세밀한 것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아주 기본적이고 간략한 골격만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세조 4년(1458)에 성안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璿鄕憲目序>와 <孝寧大君鄕憲>은 바로 이 시기 유향소의 성격을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자료는 성종 19년(1448) 유향소가 복립될 때 중앙에서 일률적으로 제시되었다고 생각되는<留鄕所復立事目>과 비교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 보여진다. 이러한 향규는 성종대 이후 유향소가 훈구세력들에 의해 장악되고, 향촌의 사림세력들이 이에 대해 별도의 향촌지배질서를 도모하게 되면서 그 성격이 변질되기 시작했다. 즉 성종대에 향사례·향음주례가 부분적으로 실시되고, 중종대에 향약보급운동이 중앙으로부터 시도되자 향촌의 사족들은 향권장악과 향촌통제의 이념을 향약으로부터 도출해 내고자 하였다.

 특히 중종대의 전국적인 향약보급운동이 실패한 이후, 명종대부터 지역별로 개별적인 향약의 보급이 추진되자 하층민에 대한 교화보다도 향촌지배에 더 큰 관심을 지녔던 지배사족들이 새로운 시도를 강구하게 되며, 그 결과가 바로 향규로 나타났다고 보여진다. 부연하면 이 시기 재지사족들은 종전의 지역적·신분적 성격이 반영된 결사체로서의 ‘유향소’ 조직과 공동체조직의 성격이 본질이었던 향약 본연의 성격을 가미하여 사족들간의 향촌공동체로서 ‘향약’을 만들어 냈고, 그 운영주체들의 결사체적 규약이 바로 ‘향규’였던 것이다.

 이 시기 향규가 실제 운영되는 사례 중에 鄕約·鄕規·鄕憲들이 명칭상 혼효되는 것도 이같은 시대적 성격이 반영된 결과이며, 조선 전기의 향규 중에서 ‘향규’라고 불려져 기록된 것도 안동부의 鄕規舊條 23조가 유일한 예이다. 향규에 참여하는 고을 유력 인사의 명단은 향안에 등재되어 있었다. 이러한 향안에 새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흔히 6조(부·조부·증조·고조·외조·처부) 중에서 3명(지역에 따라서는 4명 혹은 2명)이 이미 舊案에 기록되어 있어야 가능하였으니, 이를 三鄕(四鄕·二鄕)이라고 하였다. 삼향 미달인 경우에는 대읍에서는 유사를 정하여, 소읍에서는 향회에서 각각 圈點 또는 가부를 통문하여 一不, 二不 혹은 三不이하면 향안입록을 허락하였다.

 향안에 등재되어 있는 향원들은 유향소에서 향규를 운용하여 향중의 제반사를 처리할 행정사무원에 해당하는 향임을 택정하였다. 그러나 이 유향소가 향원조직인 향계의 최고기구는 아니다. 이 향임들을 감독하는 향계의 최고 기구는 鄕先生이고 그 아래에 향유사 등이 있어서 일향 여론을 좌우하였으니 이들을 보통 鄕執綱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은 일률적인 것이 아니고 지역에 따라 차이가 많다.

 향규는 향촌의 현족들인 향원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향규 자체가 일향의 지배권 즉 향권을 장악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므로 향규에 담겨있는 내용이 반드시 사족들에만 한정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향권의 장악에 관련되는 범위 내에서 향원 외라도 규제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당시의 사회가 주자학적 명분에 입각한 향촌질서를 추구하고 있었으므로, 하층민에 대한 주자학적 교화가 가미될 수밖에 없었다.0055)韓相權,<16∼17세기 鄕約의 機構와 性格>(≪震檀學報≫58, 1984). 이것이 바로 향약과 향규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점으로 생각된다. 그 후 신분질서의 혼동이 극심해지는 왜란 이후에는 사족들의 향촌에서의 지위가 흔들리게 되자 상하민간의 守分儀式이 강조되면서 교화가 주목적인 향약이 성행하게 되었다. 나아가 경재소의 혁파와 영장사목의 반포는 유향소(향청)의 변질을 초래하였으며 향규도 쇠퇴의 길로 접어들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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