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2. 향촌자치조직의 발달
  • 2) 향촌자치조직의 내용과 성격
  • (3) 동계와 동약

(3) 동계와 동약

 이상에서 살펴본 유향소나 향약·향규로 대표되는 사족들의 자치조직들은 군현 단위의 규모로서 신분적 위상을 엄격히 하는 지배층의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조직은 수령으로 대변되는 중앙권력 즉 관권에 대항하는 조직으로서 일정하게 향촌자치를 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다르게 군현 단위는 아니지만 지배신분층인 사족들의 좀더 축소된 범위를 가지는 조직으로 洞契·洞約조직도 있었다.

 동계는 一洞 구성원간의 조직으로 族契·洞憲·洞規·洞約 등으로 불리워지기도 하였다.0056)鄭震英,<16世紀 安東地方의 洞契>(≪嶠南史學≫1, 嶺南大, 1985).
金龍德,<洞契考>(≪斗溪李丙燾博士九旬記念韓國史學論叢≫, 지식산업사, 1987).
동계가 언제부터 성립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여말선초 자연촌의 성장과 함께 이미 동계의 시원적인 형태는 이루어졌을 것이다. 15세기 후반에 이르면 이미 사족이 중심이 되었던 촌락 단위 동계의 존재가 여러 자료를 통하여 확인된다.

 고려시대부터 토착적 기반을 가졌던 이족들과는 달리 조선 초기 향촌재지사족들은 대부분의 경우 새롭게 성장하거나, 그들의 터전을 부식하면서 족적인 기반을 축적시켜 간 부류들이었다. 따라서 의식과 목표를 같이 하는 유사한 성격의 사족계열 인사들은 자신들의 재지기반을 토대로 동계 형태의 결사체를 만들어 그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동계조직이 가장 발달했던 시기는 대체로 사족 중심의 신분제적 질서가 강화되고 지주제가 발전을 보이기 시작하던 16세기였다. 동계조직은 우선 이념이나 구성원의 신분적 권위를 과시하는 형태로 조직되며, 따라서 구성원의 자격과 入契의 규정·절차도 엄격하였다. 동계조직의 출현은 재지사족들의 자체 결속을 목적한 것이었고, 그러한 결사체적 조직력으로 향촌사회의 대표자임을 자임하면서 관권과 대립할 수 있는 힘을 길러가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실제로 향규조직의 하부구조로서 동계가 구체적 기능을 담당하는 사례도 볼 수 있으며, 또 동계 조직은 일향의 사족지배를 가능케 한 배경으로서도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대체로 16세기의 동계조직들은 새롭게 재지기반을 마련하여 가는 사족층의 결사적인 성격이 강하여 ① 친린적인 유대, ② 학문적인 성향이나 동문의식, ③ 연령이나 지역적인 연결을 도모하고 있었고, 공통적으로 성리학적 사회질서와 이념을 향촌사회에 이식시키는 것에 공감하거나 앞장선 부류들이었다. 따라서 이들 동계의 창립 주역들은 향약이나 향안·향규 등 군현 단위 향촌자치조직의 핵심 성원으로 진출하거나 그에 동원되면서 사족의 일향지배에 크게 기여하였다.0057)李海濬, 앞의 글(1990).

 이 시기 사족 중심의 동계(동약)조직들은 하나의 촌락, 혹은 지연·혈연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수개의 자연촌락에 거주하는 유력 姓氏나 사족집단의 결사체적 성향이 강하였다. 사족들은 동계조직들을 통해서 하층민을 통제하려 하였고, 또한 이를 매개로 수령권·관권과 유대를 긴밀히 하거나 타협하고자 하였다, 이같은 대표성의 존속은 일정하게나마 향촌사회에서 그들의 권위를 유지시키는 방편도 되었을 것이다.

 동계조직은 사족들의 결사체로서 조직구성원의 신분적인 제한규정이나 가입의 절차, 운영규정 등에 강한 규제들이 마련되고 있었으며 조직 내부에서는 구성원간의 평등성이 전제되지만 조직 외적으로 매우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형태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들 결사체로서의 동계·동약들은 하나의 독립된 촌락공동체만을 기반으로 하지는 않았다. 사회경제적으로 연결되는 인접 수개의 촌락을 그 지배 아래 운용하면서 대외적인 대표성과 권위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지하듯이 ‘향약-동계·동약’으로 이어지는 사족 중심의 결사체들은 조선 전기 사림세력이 그들의 성리학적 지배질서를 향촌사회에 확산시켜 가는 과정에서 보편화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념의 확산과 사족의 정치적 입장 변화에 따라 이들 조직들은 대상범위와 조직구성원의 폭을 변모시켜 왔을 뿐이었다. 예컨대 조선 초기 지연과 혈연을 바탕으로 族契나 門人契, 同甲契 등등의 형태로 단초를 연 사족결사체조직들이 보다 넓은 범위의 ‘향규나 향약류로 성장’하기도 하고, 수령 중심 혹은 관권에 의해 강제되던 군현 단위의 향약이 유명무실화되면서는 하나 혹은 수개의 인접한 촌락을 연계시키는 동계·동약형태로 변용되기도 하였다.

 16∼17세기 상·하합계는 사족층과 그들의 사회경제 기반이었던 촌락민사회를 하나로 묶은 조직이었다. 매우 관념적이기는 하지만 이황의<溫溪洞規>(1568년) 중 洞令에서 보여진 매우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사족(지주)층의 입장들0058)예컨대, “本主이건 地主이건 무례불손한 자, 무리지어 술을 마시고 난동을 부리는 자, 川防에서 벌목하는 자, 밭에 모래 흙을 흘려 보내는 자” 등에서 보는 바처럼 下民(奴婢)에 대한 통제적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李 滉,≪退溪集≫, 溫溪洞規 洞令).은 이 시기가 되면 “同胞幷生 不計貴賤”0059)徐思遠,≪樂齋集≫권 6, 河東里社契序(1592년).이라는 표현이나 “하인이나 노비들도 비록 명분은 다르나 天命之性을 함께 받았다”0060)琴蘭秀,≪省齋集≫권 2, 洞中約條小識(1598년).거나, 또 “士夫·平人·庶孽·庶民·僕隷는 모두가 一類”0061)朴 絪,≪无民堂集≫, 三里鄕約立議(1611년).라는 등의 표현에서 보는 것처럼 강력한 통제나 지배의지가 무의미해졌다고 할 만큼 완화되고 회유적인 것으로 바뀐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앞에서도 지적했던 바와 같이 이 시기 동계·동약조직들이 점차 사족들에게서 유리·이탈되어 가는 하민들을 포용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더욱이 대부분의 이 시기 동계·동약들이 촌락내의 제반사, 예컨대 교량이나 도로의 보수·산림의 보호 등에 직접 관여하고 洞事에 태만한 사람들을 ‘黜契’가 아닌 ‘黜洞’으로 처벌하고 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 역시 당시의 동계조직이 촌락공동체적 기능에 일편 주력하면서 결속력을 강화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16∼17세기의 동계조직들은 이같은 일련의 사족지배체제 변동과 연결되면서 특유의 성격을 갖게 된다. 대체로 그것은 기존 촌락사회의 운영원리를 기조로 하면서 여기에 상·하 洞民을 결속시켜 사족적 신분질서를 재강화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0062)金仁杰,<조선후기 鄕村社會統制策의 위기-洞契의 성격변화 중심으로->(≪震檀學報≫58, 1984).
韓相權, 앞의 글.
朴京夏,<倭亂直後의 鄕約에 대한 硏究-高坪洞 同系를 중심으로->(≪中央史論≫5, 中央大, 1987).
이러한 시대적 성격을 반영하는 동계의 형태가 바로 상·하합계였던 것이고 이를 통해 사족들은 기층의 민중조직을 포용·흡수코자 하였다고 생각한다. 그 성격을 대변하는 이 시기의 대표적 동계조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565년, 靈岩 鳩林里 西湖洞憲 1584년, 安東 河回洞契 1601년, 任實 洞中修契(吳天民) 1618년, 安東 河回洞契(重設立議) 1666년, 泰仁 古縣洞約 1688년, 沙村里約(南夢麥) 17세기 후반, 靈岩 花樹亭洞約 1692년, 宜寧 鄕約行規(李崇逸)

 내용상 이 16∼17세기의 동계, 동약조직은 역시 본질적으로는 사족 중심의 지배체제를 강화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동계는 향촌사회에서 사족 중심의 지배질서가 정착되면서 그 기능의 폭이 증대되어 간 조직이었으며, 일정하게 그에 기여하였다. 따라서 운영상 여러 형태의 하층민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며 미구에 새로운 성격변화를 자초하게 되었다. 즉 사회변화가 급속해지는 18세기 이후가 되면 재지사족을 매개로 하던 기존의 수취체계가 점차 사족을 배제하는 형태로 바뀌어지고, 동계조직 역시 수령향약의 하부구조로서 共同納 체제 속에 포함되면서 그 본질적 성격은 변모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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