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2. 향촌자치조직의 발달
  • 3) 향촌자치조직의 변질

3) 향촌자치조직의 변질

 이같은 조선 중기의 향촌 자치조직은 16세기 말∼17세기 초반의 양란을 거치면서 기본 구조와 틀을 점차 변모시켜 갔다. 그렇다고 당시의 모습이 이러한 사족의 기본적인 향촌사회 지배력과 구조를 모두 잃어버린 채 해체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변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지배력의 내용이나 적용의 범위 등에서는 적지 않은 차이가 나타나고 있었다. 양란 이후 사회경제적 불안과 함께 신분혼효로 인한 양반신분층의 증가와 양반권위의 축소는 사족들의 자체 분열현상을 불러와 종래와 같은 사족들의 전일적인 향촌지배는 불가능해진다. 17세기 중반 이후의 향촌사회구조를 특징지우는 향안질서 해이의 모습은 향촌자치조직의 성격에도 그대로 연계되어 나타나고 있었다.

 주지하듯이 임진왜란으로 인한 사회경제적인 피해는 전국적인 농촌·농민층의 피폐를 가져왔고, 재지사족들의 경우는 많은 세력들이 양란의 과정에서 기반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복구의 과정에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들 성씨들간의 이해 대립으로 인한 갈등이 표출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여기에 더하여 양란 이후의 사회변화과정에서 새롭게 성장하여온 신흥 향촌세력의 대두로 사족들의 지위가 도전을 받게 되자 사족들은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자신들의 지위와 기득권을 유지하려 하였다.

 이제 사족들은 과거의 향안·향규·향약 등을 통한 일향의 지배보다는 혈연적인 족계를 만들어 문중의 결속력을 확보하기도 하고, 혹은 지연과 혈연(동족)적인 촌락을 중심으로 자기방어를 모색하게 된다. 이 시기에 하층민과의 유대가 강조되는 상하합계 형태의 동계(동약)가 일반화하면서 발전되는 것은 그 대표적인 변화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 이 시기 사족조직의 특징적인 형태였던 상하합계 형태의 동계가 일반화되는 현상은, 양란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함께 사족지배체제가 동요됨에 따라 대응 형태로 나타난 것이었다. 상하합계는 향촌사회구조의 이같은 변화를 반영하면서, 한편으로는 후속될 더욱 큰 변화를 예고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상하합계는 사족층들이 촌락사회 내에서의 상하민질서를 재확립하려는 의도를 표출한 것인 동시에, 한편으로 보면 하층민을 기반으로 하는 그들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도전받고 있음을 노증한 것이기도 하였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좀더 후대에 이르면 재지사족들은 각 문중별로 족적인 기반과 유대, 조직의 강화, 이를 토대로 동족촌락의 형성·발달, 또 그것을 기반으로 문중권위의 상징으로서 서원·사우를 건립하는 양상이 만연되기에 이르렀다.0063)李海濬,<조선후기 촌락구조 변화의 배경>(≪韓國文化≫14, 서울大, 1993). 즉 18세기 이후 사족 중심의 동계·동약조직은 향권과 관련된 부면에서도 수령권이나 향리세력과 갈등을 노정하고 있었다. 이는 이 시기 사족들의 한계성을 반증하는 일면으로, 점차 사족들은 촌락과 동족적 기반을 모체로 자체결속력을 다지는 방향으로 현실 대응의 방식을 달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문중적인 서원·사우의 건립이나 성씨별 상징물의 과시적 표출과 일정하게 연결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특정 가문 중심의 권위과시나 결속력 확보는 타 성씨와 관련될 때 상대적인 폐쇄성과 대립의식을 조장하게 마련이었다.0064)李海濬,<조선후기 문중활동의 사회사적 배경>(≪東洋學≫23, 檀國大 東洋學硏究所, 1993). 따라서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들은 향촌사회 구조변화와 상당 부분 관련되거나 영향을 줄 수 있는 또 다른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하면 과거와 같은 통일된 사족들의 입장이나 이해가 존속하기 어렵게 되면서 鄕案秩序마저 무너져 갔던 것이다.0065)李海濬,<조선후기 사회사연구의 성과와 전망>(≪韓國史論≫24, 國史編纂委員會, 1994).

<李海濬>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