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1. 사족의 향촌지배조직 정비
  • 2) 향촌지배조직의 복구와 정비
  • (1) 경재소의 혁파와 향촌지배조직의 정비

(1) 경재소의 혁파와 향촌지배조직의 정비

 난전 재지사족의 향촌지배에 있어서 핵심적인 기구는 향청 또는 향사당이라고 불리던 留鄕所였다. 유향소는 고려시대의 事審官제도가 여말선초에 경재소와 분화되어 발전되어 온 것으로 선진지역의 경우에는 일찍부터 구성되어 치폐를 거듭하고 있었다.0079)이태진,<士林派 유향소 복립운동>(상, 하)(≪震檀學報≫34·35, 1972·1973). 유향소는 위로는 표리관계를 이루던 경재소의 견제와 보호를 받으면서, 자체적으로는 향리의 壇案에 대신하여 향안을 작성하였고, 향안의 입록과 운영 등 향촌지배의 전반적인 운영원리를 규정한 향규를 마련하여 향촌지배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향규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유향소를 규제하는 것이다. 향규가 향규를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규제하는 주체는 바로 유향소이다. 고을의 풍속이 아름다운가 아름답지 못한가는 향규가 행해지느냐 행해지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고, 향규가 행해지느냐 행해지지 못하느냐는 유향소 임원이 현명한가 현명하지 못한가에 달려 있다(李民寏,<題鄕規後>,≪영남향약자료집성≫, 87쪽).

고을에 향안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世族을 변별하기 위함이다. 세족을 변별하여 무엇에 쓸 것인가. 장차 그로 하여금 한 고을에 기강을 세우고 민속을 바르게 하기 위함이다(鄭經世,≪愚伏集≫ 권 15, 尙州鄕射堂題名錄序).

 이러한 인식은 유향소·향안·향규의 관계와 나아가 이것이 재지사족 향촌지배의 핵심적인 조직과 규약임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향안을 작성하고 향규를 제정하여 유향소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던 주체는 일향 사족의 모임인 鄕會였다. 향회가 재지사족의 향촌지배의 핵심이 될 수 있는 것은 여기에서 鄕中公論이 형성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향촌지배가 구체화되었기 때문이다. 공론의 형성은 재지사족의 향촌지배 여부를 가늠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조직과 규약은 사족의 존재를 전제로 한 것인데, 특히 향안은 지배집단으로서의 사족의 실체를 확인하게 해 준다. 따라서 향안의 존재는 재지사족의 향촌지배를 의미하는 상징성을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향안은 지역적인 차이는 있으나 그 기본적인 성격은 재지사족의 공론에 따라 작성된 사족의 명단이며, 부·모·처족에 신분적 하자가 없어야 입록될 수 있었던 신분적 패쇄성을 가지고 있었다.0080)金仁杰,<조선후기 鄕案의 성격변화와 在地士族>(≪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83). 이러한 향안은 사족세력이 일찍부터 형성된 지역을 중심으로 작성되어 오다가 대체로 17세기 초에는 각 군현마다 보편적으로 작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향안이 작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경우는 영남이 35개 지역, 전라도가 22개 지역, 충청도가 6개 지역, 강원도 4개 지역, 황해도·평안도·함경도가 각 3개 지역 등 76개 지역이다.0081)金炫榮,≪朝鮮後期 南原地方士族의 鄕村支配에 관한 硏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3). 그리고 인조 5년(1627)에 작성된 안동의≪鄕錄草案≫에 기재되어 있는 父·妻鄕의 향안 참여 여부를 통해서 볼 때 오늘날 경북 대부분의 지역에 향안이 작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존하는 향안의 대부분은 17세기에 작성된 것이고, 17세기에 작성된 향안의 대부분은 임란 이후 불타거나 훼손된 난전 향안의 중수를 표방하고 있어서 17세기 향안을 중심으로 한 사족의 향촌지배는 16세기의 유향소 체제를 계승·발전시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임란 후 향안의 중수와 작성은 곧 재지사족이 그들 중심의 향촌지배질서를 복구해 가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향안의 작성이 지배집단으로서의 사족의 결집과 이를 통해 유향소의 운영이 가능함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향안의 중수를 통한 임란 후 재지사족의 향촌지배질서의 복구는 각 지역의 사정에 따라 시기적으로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었지만, 대체로 영남과 호남 등지에서 임란 직후인 17세기 초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임란 후 향안의 중수를 통한 재지사족의 향촌지배조직의 복구는 단순히 난전 지배조직의 복구라는 차원을 넘어 사실상의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를 확립해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까지 유향소를 보호·견제하고 있던 경재소의 혁파에서 오는 것이다. 재지사족의 향촌지배는 우선은 왕조교체에 따른 신분의 재편과정에서, 그리고 향촌사회에서 유향소가 조직되면서부터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재지사족의 향촌지배는 안으로는 사족 자신의 결속과 지주적 기반의 안정·강화를 꾀하는 한편 밖으로는 기존의 향촌사회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향리세력과 경재소의 보호·견제를 배제하여 하층민을 그들의 통제하에 둠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0082)鄭震英,<朝鮮前期 安東府 在地士族의 鄕村支配>(≪大丘史學≫27, 1987).

 재지사족과 마찬가지로 여말선초 토착세력의 후예이며, 같은 土姓의 姓貫에서 분화되어 호장층을 세습해 온 在地吏族은 비록 군현지배자의 지위에서 지방관아의 행정사역인으로 전락하였지만, 여전히 지방의 행정실무를 매개로 수령과 사족 사이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들은 吏族案인 壇案과 집무소인 府·郡司를 중심으로 독자적이고도 엄격한 조직과 체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 향리들은 전체적으로는 조선왕조의 신분체제가 확립되어 가면서, 향촌의 개별 단위에서는 사족안인 향안이 작성되고, 그리고 사족이 중앙의 경제소의 힘을 빌려 이들을 억압함으로써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점차 향촌사회에서 지배력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사족의 세력이 형성되지 못한 지역에서는 향리가 여전히 향촌사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한편 경재소는 여말선초 군현의 사족이 在京官人과 留鄕品官으로 분화되는 과정에서 재경세력이 각기 경재소를 설치, 운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는 재경관인으로 하여금 제각기 연고지별로 경재소를 조직하여 각 지방의 유향소를 지배하게 함으로써 보다 효과적으로 지방을 통제하려 하였다. 이로써 군현토성에서 상경종사한 재경관료는 관품에 따라 최고 8개 鄕에서 최하 2개 향의 경재소를 맡게 되었다. 이러한 경재소와 유향소의 사정을 “주·부·군·현에는 각기 토성이 있는데, 그들 중 在京從仕하는 자를 경재소라 하고, 경재소가 다시 居鄕土姓 가운데 강명한 品官을 선정하여 유향소 유사를 삼는다”0083)≪成宗實錄≫권 137, 성종 13년 정월 신유.고 하였다. 이렇듯 경재소는 각기 소관 군현의 유향소와 긴밀한 종적 유대를 가지고 유향소 임원의 임면권, 향리규찰, 향중인사의 천거와 보증, 향풍교화, 貢賦·진상의 독촉, 경저리 사역, 공물방납 및 소관 군현의 요구사항의 건의 등 실로 광범한 활동을 하였다.0084)李樹健,<地方自治的인 諸機構와 鄕村統制體制>(≪朝鮮時代 地方行政史≫, 민음사, 1989).

 경재소는 관주도 향촌지배체제를 수립하려는 중앙정부의 입장에서나 유향소를 통한 재지사족의 향촌지배에 있어서도 중요한 존재였다. 그러나 왕조의 집권체제가 일단락된 뒤, 그리고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가 어느 정도 틀이 잡혀가던 16세기부터는 그 폐단이 많았다. 재지사족의 세력이 미약하던 초기에는 사족의 향촌지배에 힘이 될 수 있었지만, 16세기 이후 재지사족이 성장하면서, 그리고 중앙정계에 등장하여 훈척세력과 대립하면서부터는 도리어 재지사족의 향촌지배를 크게 제약하고 있었다. 훈척세력은 경재소를 장악하고 수령권과 결탁하여 유향소를 견제하고 향촌사회에 그들 자신의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불법적이고 수탈적인 농민지배가 행해지고 있었다. 경재소는 유향소와 함께 향리규찰과 향풍규정에 1차적인 목표가 있었으나, 오히려 경재소가 경저리와 읍리를 침학하고 田民을 影占하거나 공물을 방납하는 등 민폐를 유발하는 사례가 문제되어 그것의 혁파를 주장하는 사람이 많았다. 따라서 재지사족은 중앙정계의 진출과 더불어 사창법·유향소·향약 등의 실시 건의와 아울러 이 시기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된 향촌피폐를 훈척세력의 견제라는 차원에서 제기하고 있었다.0085)정진영,<16세기 향촌문제와 재지사족의 동향>(≪민족문화논총≫7, 1986). 경재소의 혁파 주장 또한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여기에 임란으로 인해 향촌사회가 피폐하고 경중의 경재소가 오랜 전란으로 인원과 시설이 모두 유산되고 분탕되었기 때문에 그 기능이 일시 정지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선조 36년(1603)에 일체 혁파되고,0086)≪宣祖實錄≫권 158, 선조 36년 정월 갑신. 광해군 3년(1611)과 4년에 그 복설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었으나 끝내 복설되지 못하였다.0087)≪光海君日記≫권 58, 광해군 4년 10월 경인. 이렇듯 경재소의 혁파는 한편에서는 전란으로 인하여 없어져 버리고 파괴되어 버렸기 때문에, 다른 한편에서는 이 시기에 이르러 재지사족의 향촌지배가 일정하게 정착되었고, 또 원악향리와 같은 향리들의 횡포도 크게 문제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경재소의 혁파는 재지사족의 성장을 반영한 것이었고, 그것의 구체적인 표현은 임란으로 소실되거나 탕폐된 향안의 중수를 통한 난전 향촌지배조직의 복구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초의 향안 중수는 시기적으로나 그 구체적인 과정에 있어서 다양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대체로 일향의 사족이 유향소 운영에 적극 참여하여 기존의 향안에 새로운 인원만을 추록함으로써 경재소의 혁파에도 불구하고 재지사족의 향촌지배가 보다 확고하게 정착될 수 있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경재소 혁파 후 재지사족이 유향소 운영을 기피함으로써 일정 시기 기존 구성원의 직접적인 개입없이 향안이 작성되는 경우도 있었다. 후자의 경우에는 향안을 둘러싼 신구 향원간의 쟁단이 야기될 수 밖에 없었고, 이로 말미암은 향론의 분열은 사족 중심의 향촌지배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였다. 다음의 호남 남원에서 향안을 둘러싼 쟁단은 이같은 사정을 잘 보여준다.

난을 겪고난 후에 경재소가 폐지되므로 사대부가 향권을 잡는 것을 천하게 여겨 꺼리게 되고, 모든 논의가 가부를 정할 수 없게 된 까닭에, 무식하고 염치를 모르는 자들이 방자하게 행동하며 鄕籍을 개인이 발신하는 사사로운 쪽지로 알고 향임이 되면 집안을 일으킬 수 있는 돈방석에 앉게 될 줄로 알아 온갖 쟁단이 극에 달하였다(≪龍城誌≫권 3, 完議).

 남원과 같은 상황은 호남의 여타 읍에서도 비슷하였다. 즉 17세기 전반 광주를 제외한 3대 읍인 전주·나주·영광에서도 향론이 분열되고 향적이 파치되는 등 일읍이 마치 전장터와 같았다고 한다. 이같은 사정에서 鄕先生이 아닌 사대부가 향론을 주도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0088)≪龍城誌≫권 3, 完議 1639년.

 그러나 이같은 경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향론의 분열을 일단 사족이 중심이 되어 수습하고자 한 것이었다. 위의 남원의 사정은 순천·창평·장성 등과 같이 광주의 약조를 모범으로 하여 향회를 운영하고 파치된 기존의 향안을 사족이 주도하여 복구하고자 한 것이었다. 인조 17년(1639)에 마련된<約束條目>은 그것의 구체적인 노력의 일단이었다. 남원의<약속조목>은 향중의 모든 권한 즉, 향안입록, 향임의 선출과 규찰 등을 사족인 主論之員(鄕老·鄕長·鄕有司)에게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주론지원은 스스로 향임이 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사족이 유향소를 그들의 지배하에 두어 일향의 모든 일들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이로써 유향소의 직임인 향임층과 사족 사이의 괴리현상이 심화되어 나갔다. 이러한 현상은 儒鄕分岐로 인식되기도 하였는데, 여기서 유향의 의미는 사족과 성장하는 새로운 계층과의 관계가 아니라 사족 내부의 前朝官을 중심으로 한 사족과 향임층을 주로 담당하였던 토착세력으로 구분된다.0089)김현영,<조선후기 남원의 사회구조-사족지배구조의 변화와 그 성격->(≪역사와 현실≫2, 1989). 이같은 체제는 율곡의<海州一鄕約束>에서의 구조와 비슷한 것으로 유향의 분기가 보이는 지역에서 실시되기에 적당한 것이었다. 이들 주론지원은 향안의 복구뿐만 아니라 향약도 그들 중심으로 실시하고자 하였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 향촌지배는 17세기에 있어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0090)金仁杰, 앞의 글.

 경재소 혁파 후에도 사족이 유향소에 적극 참여한 경우에는 그들의 향촌지배체제를 보다 용이하게 정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己丑年(1589) 향안이 병화로 더러워지고 혹은 파열낙장되어 후세에 전할 수 없게 되었다. 前鄕所 등이 비록 改書해야 한다고 말했고, 또 기록된 것을 보니 前案에 따르지 않고 사사로운 뜻이 개재되어 本案에 기록되지 않았던 사람이 엄연히 쓰여져서 鄕議가 격발하였다. 그런 까닭에 전인이 쓴 안을 파기하고, 본안에 의거하여 改錄한다(≪安東鄕錄≫, 1604).

 위의 내용은 임란 후 안동향안의 상태와 향중쟁단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다시 쓰여짐으로써 수습되고 있었다. 향안이 다시 쓰여진 것은 선조 37년(1604)이었다. 여기서 ‘본안에 기록되지 않았던 사람’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람을 지칭하는지 알 수 없으나 남원의 ‘무식하고 염치를 모르는 자들’과 대비된다. 남원의 경우가 향임층을 주로 담당하였던 토착세력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안동의 경우에는 이와는 다른 사정을 보여준다. 안동의 경우에는 좌수·별감 등 향임층과 前朝官 등의 사족이 구분되지 않았고, 따라서 전조관이라도 향임을 역임하는데 하등의 문제가 없었다.0091)金龍德,<安東座首考>(≪震檀學報≫46·47, 1979). 향안과 향규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따라서 임란 후 안동향안이 다시 쓰여진 문제를 향규와 관련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다.

 안동의 향규는<舊規>와<新定十條>가 있다. 전자는 선조 21년(1588)에 좌수가 경재소에, 후자는 경재소 혁파 뒤인 선조 38년에 향선생에게 여쭈어서 작성한 것이다. 여기서 향안과 향규가 경재소 혁파에 뒤이어 비슷한 시기에 다시 쓰여지고 재작성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것은 향안이 병화로 더러워지고 본안에 입록되지 않았던 자가 등재되어 있었고, 또<구규>의 미비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근본적으로는 경재소의 혁파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향규가 향안의 입록과 운영 등 향촌지배의 전반적인 운영원리를 규정한 것임을 염두에 둔다면, 결국 향안의 개록과 향규의 재작성은 경재소를 통한 중앙권력의 간섭에서 재지사족의 독자적인 향촌지배를 확인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안동에서의 쟁단이란 경재소와 연결된 향원을 삭적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0092)鄭震英, 앞의 글(1987).

 남원과 안동의 사정에서 알 수 있듯이 임란 후의 향촌질서를 누가 어떻게 확립해 가는가는 지역에 따라 상당한 편차가 있었다. 이것은 재지사족층의 존재형태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었다. 선초 향촌사회의 지배세력은 대체로 고려말에 첨설직·동정직·군공·과거 등을 통하여 土姓吏族에서 사족화한 계층으로, 이들 土姓士族은 또한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타읍 출신의 사족과 통혼관계를 맺었다가 왕조교체기와 이후 수차의 정변에 本鄕 또는 妻鄕·外鄕을 따라 낙향하여 재지적 기반을 확보하고 있던 재지사족이었다. 영남에서는 이러한 토성사족과 이주사족이 상호 구별되지 않았지만, 호남의 경우에는 여말 이래 재지세력의 토착적 기반이 미약하였던 관계로 대부분이 새롭게 이주해온 가문들을 중심으로 사족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0093)李海濬,<朝鮮後期 靈巖地方 洞契의 成立背景과 性格>(≪全南史學≫2, 1988). 따라서 호남에서는 토착사족세력과 이주사족세력 사이에 일정한 간격이 보인다. 율곡의<해주일향약속>에서 보이는 儒鄕은 바로 이들을 지칭한 것으로 생각된다. 호남의 이같은 사정은 이들 지역이 여말선초 왜구의 창궐로 말미암은 사회적 혼란을 경험하였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지역적인 차이는 유향소의 운영과 임란 후 향안의 작성에 있어서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인 것으로 생각된다.

 임란 후 재지사족의 향촌지배조직은 그 구체적인 시기와 내용에 있어서 지역적인 차이는 있었지만 난전의 조직이 복구·정비되고 있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난전의 향촌지배를 계승한 것이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경재소의 혁파에 따른 조직과 규약의 재정비였던 것이다. 물론 지역에 따라서는 이 시기에 이르러서 재지사족의 향촌지배조직이 비로소 마련되기도 하였다. 이제 향규의 내용을 통해 재지사족의 향촌지배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재지사족의 향촌지배에 있어서 향리에 대한 통제는 엄격하였다. 그것은 이들이 행정실무를 담당하고 있었고, 이들에 대한 통제 여하에 따라 재지사족의 향촌지배의 성패가 달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향리에 대한 규제는 ‘元惡鄕吏’라는 포괄적인 것에서부터 공물징수 등을 통한 구체적인 작폐에 이르기까지 명시되고 있었다.

鄕所가 吏民의 풍속을 도맡아서 살핀다. 鄕吏·書員 등이 品官을 능욕하면 향소에 알려 죄를 다스린다. 향리 중에서 청렴하고 부지런한 자를 택해서 上戶長·吏房으로 임명한다(李珥,≪栗谷全書≫권 16, 海州一鄕約束).

治吏胥는 민간에 출입하면서 마구 거두어 들이는 자. 각 色吏와 결탁해서 폐단을 일으키는 자. 관을 속여서 政令을 어지럽게 하는자. 공물을 받을 때 함부로 더 많이 거두는 자. 향중에서 무례하여 풍속을 손상시키는 자. 冒占한 良民을 숨겨서 부리는 자. 권력에 아부하여 本役을 피하고자 하는 자. 양민의 여자나 관비를 첩으로 삼는 자. 書員으로 권력을 남용하여 폐단을 일으키는 자(≪永嘉誌≫권 5, 新定十條).

 이상은 사족이 군현의 행정실무를 담당하고 있던 향리의 임면권과 활동 전반을 장악·통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향리에 대한 통제는 다름아닌 향리 자체에 대한 통제이기도 하였지만, 이것은 결국 재지사족의 민에 대한 지배와 수령에 대한 간접적인 견제이기도 하였다.

 재지사족의 향촌지배에 있어서 중요한 내용의 하나는 부세운영이다. 이를 17세기 초반 안동의<신정십조>와 현풍의<향규>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均徭役는 府의 戶口와 토지는 별도의 한 책으로 만들어 賦役 마련시에 향소에서 다과와 허실을 참고할 것. 모든 잡역 등은 八結法에 따르고 그것의 경중을 비교하여 각 면에 돌아가면서 담당하게 할 것. 豪悍함을 믿고 토지를 모점하여 세금(租賦)을 등한시하는 자와 토지를 숨기거나 누락하여 요역에 응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관청에 보고하여 죄를 다스릴 것(≪永嘉誌≫권 5, 新定十條).

모든 貢賦徭役을 分定할 때에는 향소가 온 고을에 알려 여럿이 의논하여 定奪하고, 힘들고 헐한 것을 분간하여 균일하게 할 것. 人吏民夫 등의 戶役은 옛 규약에 따르고, 모든 대소 民瘼은 향소가 수소문하여 온 고을의 회의에 붙여 모두 없앨 것(≪鄕案設立初定規謄草≫1621년, 玄風).

 이것은 유향소가 부세운영의 실질적인 책임을 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부세운영의 대원칙은 균등한 부담에 기초하고 있으나, 한편에서는 적극적으로 민막까지도 혁파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재지사족의 향촌지배에 있어서 가장 주목되는 현상은 사족 자신에 대한 규정이다. 이것의 내용은 가족·향당 구성원간의 윤리규범과 사족 상호간의 상부상조를 솔선수범함으로써 농민을 교화하고 동시에 농민에 대한 침학을 엄격히 규제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향규가 다름아닌 사족 자신들의 규약이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사족의 자기규제 가운데서도 특히 주목되는 내용은 농민에 대한 직접적 또는 공권력을 통한 침탈이나, 환곡을 갚지 않고, 부역에 임하지 않는 무단토호적인 행위를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족의 자기규제는 농민의 저항과 국가권력과의 이중적인 대립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사정에서 오는 것이었다. 자기규제라는 점에서 재지사족의 향촌지배는 역사적으로 일정한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여기서의 자기규제란 일차적으로 사족의 신분적·경제적인 이해를 바탕한 위에서의 하층민에 대한 양보였다.

 재지사족의 향촌지배는 원칙적으로 향촌사회에 신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들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하고자 한 것이었지만, 이것은 개개 사족의 사적인 이해에서가 아니라 일향 단위에서의 사족 공동의 이익을 추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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