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1. 사족의 향촌지배조직 정비
  • 2) 향촌지배조직의 복구와 정비
  • (2) 동계·동약의 중수와 상하합계

(2) 동계·동약의 중수와 상하합계

 임란 후 일향 범위에서의 향사당·향안 등의 재건과는 별도로 사족의 거주 촌락을 단위로 한 동계·동약이 적극 중수되거나 실시되고 있었다. 임란 전후에 실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동계·동약에 관한 자료는 다음<표 1>과 같다.0094)이 표는 박경하,<朝鮮時代 鄕村社會史 資料目錄>(≪역사민속학≫1, 1991)을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제 목 연 도 지 역 출 전 비 고
洞約
溫溪洞規
西湖契案
永保亭洞契

社倉契約束
洞中鄕約契序
族契立議後識
洞中約條小識
洞規後識
洛社合契序
缶契洞憲序
正明里社立議
高坪洞契更定
 約文序
洞中約規
三隱洞約
族契重修序
白也洞案跋
龜齡洞案
洞約序
洞契更定約文
元塘洞約文
洞中修契序
河東里社契約序
沙村洞契序
愚巷洞契約文
琴山洞約序
洛社契條約序
洞約序
洞中立約序
洞中立議
內外子孫及洞
 里人條約
龜齡洞案序
洞案跋
洞中約文
鳴山洞案跋
洞約序
洞契後序
洞中立議序
上枝鄕約序
洞內立議
16∼19세기
1548
1565
16∼18세기

1580
1590
1565
1599
1598(?)
1599
1600
1601
1601

1601
1601
1601
1603
1604
1605
1610
1613(?)
1615(?)
1615
1619
1616(?)
1616
1618(?)
1618
1619
1625
1628

1628(?)
1629
1635
1636
1637
1638
1638
1638
1641
봉화
예안
영암
영암

해주
합천
예안
예안
예안
상주
군위
평해
예천

나주
임실
인동
진주
밀양
진주
영주
진주

달성
성주

진주
상주
상주
예안
영해
달성

밀양
거창
나주


나주
선산
칠곡
목천
李弘準≪訥齋集≫
고문서
고문서
고문서

李 珥≪栗谷集≫
李 霙≪雲團逸稿≫上
琴瀾秀≪惺齋集≫ 2
琴蘭秀≪惺齋集≫2
金富倫≪雪月堂集≫3
鄭經世≪愚伏集≫15
孫起陽≪鰲漢集≫3
黃中允≪東溟集≫5
鄭 琢≪藥圃集≫3

鄭 詳≪金鞍洞誌≫
吳天民≪養靜集≫1
張顯光≪旅軒集≫
金大鳴≪白巖集≫1
고문서(연세대)
河受一≪松亭文集≫4
朴善長≪水西集≫3
李 靜≪茅村集≫3
張經世≪沙村集≫3
徐思遠≪樂齋集≫7
鄭 逑≪寒岡集≫10
鄭四震≪守庵集≫5
成汝信≪晉陽誌≫上
宋 亮≪愚谷集≫1
金 蕙≪松彎逸稿≫1
金 涌≪雲川集≫3
고문서
金忠善≪慕夏堂集≫3

金守訒≪九峰集≫1
林眞怤≪林谷集≫5
≪金鞍洞誌≫
鄭好仁≪暘契集≫2
鄭 栻≪愚川集≫7
羅海鳳≪南磵集≫1
郭 鉉≪三安堂集≫1
李道長≪洛村集≫
黃宗海≪朽淺集≫8


임란 후 및 1646년 중수
族契(1550)를 1649년에
 동계로 중수



임란 후 중수
임란 후 중수
임란 후 합계

合洞, 임란 후 중수
임란 후 중수


上下人 참여
임란 전의 족계중수
1552년의 洞憲 중수

임란 전 동약 중수
임란 후 중수

古契 重修
賤隷까지 포함

流傳之古例 중수







임란 후 중수
1599년에 동안 완성





1602년에 修契한 것을 중수
 

<표 1>임란 전후 동계·동약의 실시

비고 1) 연도는 동계·동약의 실시 또는 그 序·跋文이 작성된 연도이다.
2) 연도(?)는 실시연도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로 자료가 수록된 문집의 저자 몰년을 기록한 것이다.

 위의<표 1>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임란 후의 동계·동약은 대부분 난 이전의 것을 중수라는 형태로 복구한 것이다. 따라서 임란 후의 동계·동약은 난 이전 것의 검토를 통해서 구체적인 내용을 살필 수 있다.

 임란 전 즉 16세기 동계·동약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주로 族契로 표현되듯이 촌락내 양반들의 족적인 기반 위에서 실시되고 있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경우 촌락 하층민의 참여는 배제되고 있었다. 그러나 16세기의 동계가 족적인 기반 위에서 성립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후기의 동성동본의 동성과는 다른 다양한 성씨가 참여하고 있었다. 각 족계·동계의 다양한 성씨는 특정 양반가문과 이들의 여서·외손 등이었다. 족계·동계의 지역적인 범위는 몇 개의 자연촌락을 하나의 동으로 결합한 사족 중심의 인위적인 동 또는 이들의 생활영역권을 단위로 하여 실시되고 있었다. 이러한 족계·동계는 각 지역의 인적 구성과 이들이 처해 있는 사회경제적 조건에 따라서 다양한 편차를 보이고 있다.0095)金仁杰,<조선후기 鄕村社會統制策의 위기-洞契의 성격변화를 중심으로->(≪震檀學報≫58, 1984).

 동계의 기능은 촌락내 또는 사족 상호간 吉凶에의 상부상조가 주된 것이었다. 동계에서의 부조 내용을 경북 예안의<溫溪洞契>의 예를 통해서 보면 다음의<표 2>와 같다.

연 도 구 분 부 조 내 용
1554 길 사 쌀 5되, 꿩·닭 중 1마리씩 수합
흉 사 쌀·콩 각 5되, 종이 1권 수합, 장정 각 2명 2일 부역,
가마니 3장, 새끼[藁索] 40발, 이엉 20발씩 수합
1615
(更定)
길 사 쌀 10말 지급(不收合), 꿩·닭 중 1마리 수합
흉 사 쌀 10말, 콩 5말, 종이값 10말, 새끼 40발, 초석 5장, 포 3필
가마니 2장, 새끼 20발, 이엉 10발
役奴:각 장노 2명 1일 부역
회굽기(燔灰):洞員 각기 사람과 소를 내어 운반

<표 2><온계동계>의 길흉사 부조 내용

 위의<표 2>에서 볼 수 있듯이 상부상조 가운데서도 흉사, 즉 喪事에 대한 부조가 가장 중요시되었고, 부조의 내용은 곡물과 노동력의 제공이었다. 부조를 위한 곡물은 洞員(契員)으로부터 유사시에 수합하였으나 점차 동중의 公穀에서 지급되고 있었다. 동중의 공곡은 일정한 곡물을 수합하여 이를 取息하여 마련된 것이었다. 취식으로 마련된 공곡은 18, 19세기와 같이 公稅의 대납이나 洞內補役을 충당하려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로지 동계원의 길흉사에 대한 부조에 국한하여 사용되고 있었다.

 동계에서의 상호부조는 동계의 구성원이 대체로 사족에 국한되었듯이 사족 상호간의 부조였고, 하층민이 참여하는 경우에는 상하민 간에 차등이 있었다. 사족은 이러한 상호부조를 통하여 촌락사회에서 그들 상호간의 결속력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동계의 또다른 기능은 이러한 사족층의 결속력을 바탕한 하층민의 통제에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동약의 규약 속에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었다. 가령 앞의<온계동계>의 ‘洞令’은 동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家門奴婢를 통제하기 위한 것0096)≪溫溪洞契≫, 洞令, 1560년(정진영 외,≪영남향약자료집성≫).으로 이러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잘 보여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洞 令> 1. 本主와 他主에게 무례불손한 자는 笞 50에 倍까지 더한다. 1. 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도 위와 같다. 1. 형제간에 서로 싸우는 자는 태 50에 3을 더한다. 1. 간음한 자, 도적질한 자는 위와 같다. 1. 구타하여 서로 상처를 입힌 자는 태 50에 2를 더한다. 1. 친척과 이웃간에 화목하지 못한 자는 위와 같다. 1. 墓山에 방화한 자와 개간한 자는 위와 같다. 1. 먼 곳에 거주하는 자를 끌어들인 자는 위와 같다. 1. 경작지를 빼앗은 자, 천방을 굽게 한 자, 곡식을 베어서 취한 자는 위와 같다. 1. 묘산에 벌목한 자, 근거가 불명확한 자를 머무르게 한 자는 태 50에 1을 더한다. 1. 무리를 지어 술마시고 취해서 난동을 부린 자, 천방에 벌목한 자, 토지에 모래를 흘려보낸 자는 태 50에 처한다. 1. 牛馬를 방목한 자는 태 30에 처한다.

 위의 내용은 가족간 또는 촌락 내에서 지켜야 할 윤리규범과 함께 농촌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노비의 주인에 대한 무례불손을 가장 엄하게 다스린다는 점이다. 이것은 자기 上典뿐만 아니라 다른 주인을 포함한 것으로 사족과 노비의 상하신분적 지배예속관계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분적인 상하관계를 유교적 윤리규범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 하는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로 등치시킴으로써 노비의 奴主에 대한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노비는 노주와 신분적으로 상하관계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地主·佃戶관계를 가지는 것이었다.

 당시의 재지사족은 많은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 노비는 조상전래의 노비도 많았지만, 良賤交婚을 통하거나 몰락농민을 전호로 편입함으로써 형성된 것이었다. 양천교혼은 재지사족이 소유노비를 양민층과 결혼시키는 것으로, 사족층이 노비 증식을 위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또한 당시의 농민은 각종 부세와 공물 등 봉건수탈로 말미암아 몰락함으로써 결국 “부자는 날로 兼倂이 늘고 貧者는 立錐의 땅도 없게”0097)≪成宗實錄≫권 130, 성종 12년 6월 임자.되어 지주가의 전호로 편입되고 있었다. 양민의 전호로의 편성은 노비신분을 매개로 하여 성립되고 있었는데, 이것은 노비의 수적 증가와 더불어 한편에서는 상하신분질서를 이완시키고 있었다.0098)李景植,<16世紀 地主層의 動向>(≪歷史敎育≫19, 1974). 따라서 재지사족은 이들 전호노비에 대한 신분적·경제적 지배예속관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더욱이 당시 사족거주 마을은 대부분 노비호로 구성되었고, 사족은 농업경영뿐만 아니라 가사노동의 대부분을 노비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사족은 노비와 함께 그리고 이들에 의지해서 생활하는 셈이다. 따라서 노비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였을 것이다. 동계·동약은 바로 이같은 절실함을 반영하고 있다.

 동계·동약은 상하 신분질서의 확립을 위해 情으로는 가히 용서할 수 있는 것이라도 개별적인 통제가 아닌 동계·동약의 공론으로 처리하고 있었다.0099)≪溫溪洞契≫, 洞令(1560년).
≪河回洞契≫, 契約.
또한 노비가 통제의 직접적인 대상이었다 하더라도 촌락내 여타의 농민들이 이같은 통제에서 제외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재지사족층은 일방적으로 그들의 계급적인 이해만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양반지주층의 경제적, 경제외적 착취에서 하층민의 소농경제는 극히 불안정하였고, 여기에 따른 저항 또한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 대한 대책으로 재지사족은 그들 자신의 무단행위를 스스로 금지함으로써 하층민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하층민의 소농경제는 양반층의 봉건적 수탈에서 뿐만 아니라 각종 자연재해로부터도 위협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상하인을 막론하고 질병이나 水火 등의 재앙을 당했을 때 인력과 물자를 동원하여 부조하거나, 경작과 제초를 도움으로써 失農에 이르지 않게 하였다.0100)≪河回洞契≫, 患難相救.
金忠善,≪慕夏堂集≫< 內外子孫及同里人約條>.

 재지사족의 동계·동약의 실시는 기본적으로 상호부조를 통하여 그들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하층민을 통제하고자 한 것이었는데, 하층민의 통제는 향촌사회에서 양반 중심의 경제적·신분적인 질서의 일방적인 강요만이 아닌 하층민의 안정 즉, 소농경제의 보호라는 양반층의 최소한의 양보가 모색되고 있었다.0101)鄭震英,<16世紀 安東地方의 洞契>(≪嶠南史學≫1, 1985).

 이러한 사족의 동계·동약과는 그 기원과 계통을 달리하고 있던 하층민의 생활공동체 조직이 있었다. 이런 조직은 주로 香徒와 契로 표현되고 있었다. 향도와 계는 별개의 것이 아닌 동일의 것으로도 이해되거나 향도계라는 결합된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향도는 오랜 기원을 가지는 것으로 고려시대에는 주로 군현을 단위로 한 佛敎信仰結社體로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향도는 여말선초에 이르러 한편에서는 지배층과 지배이념의 교체, 지방제도의 정비 등에 따라 기존의 존립기반이 위협당하면서 크게 변질되거나 억제되었을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불의 교체라는 과도기로 지배이념의 강요가 아직 불철저하였고, 농업경제의 발달에 따른 촌락공동체의 성장 등 새로운 형태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맞이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에서 여말선초의 향도는 그 규모가 군현 단위가 아닌 촌락 단위로 축소되면서 관권이나 이념 또는 신분적인 규제에서 벗어나 촌락사회의 민중적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이것이 이 시기 향도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불교신앙결사체로서 뿐만 아니라 자연촌 단위에서 거행되던 소위 淫祀와 祀神의 주체로서 또는 상호부조적인 洞隣契로서, 그리고 일정한 정착처가 없이 公役과 雜務에 동원되고 사역되는 有閑輩들의 조직 등으로 나타난다.0102)李海濬,<朝鮮時代 香徒와 村契類 村落組織>(≪역사민속학≫1, 1991). 그러면서도 변화의 주된 양상은 불교적인 이념의 퇴색과 상호부조적인 촌락공동체 조직으로의 발전이었다. 이에 따라 향도의 구성원에 있어서도 변화가 있었다. 여말선초에는 향리·농민·부녀자 등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이것은 향도의 다양한 성격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점차 향도가 촌락공동체로 발전해 가고, 아울러 향촌사회에서도 신분분화가 진행됨에 따라 사족층은 이탈하고 촌락내의 자영농민층이 주된 구성원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향도계는 당시의 빈발하던 자연재해와 질병에 대한 농민의 대응 조직이었으며, 마을 수호신에 대한 신앙으로 결집되고 喪葬의 일을 중요 소관사로 하며, 그 자체가 공동 노동조직의 단위가 되거나 그 태두리 속에 몇 개가 조직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0103)李泰鎭,<17·18세기 香徒組織의 分化와 두레 발생>(≪震檀學報≫67, 1989).

 농민의 공동체 조직인 향도계는 “안으로는 都下로부터 밖으로는 鄕曲에 이르기까지 동린계나 香徒會가 있다”0104)≪宣祖實錄≫권 7, 선조 6년 8월 갑자.거나, 또는 “中外의 방방곡곡에 모두 계를 만들어 서로 糾儉”0105)李睟光,≪芝峰類說≫권 2, 風俗.한다는 것처럼 사족의 동계와 병존하고 있었다.

 동계와 향도계와의 병존은 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가 정착되어 가는 과정과 자영농민층의 광범위한 몰락에 따라 크게 변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는 다름아닌 농민에 대한 신분과 경제적인 지배인데, 이것은 구체적으로 양반과 상천민으로서의 상하신분질서의 확립과 지주제의 안정적인 유지였다. 이것은 사족이 한편에서는 병존하고 있던 농민조직의 억제를 통해서, 다른 한편에서는 기존의 농민조직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던 소농경영의 안정을 계속적으로 확보하는 것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농민의 조직은 억제되어야 할 것이었지만 농민조직을 통해서 일정하게 확보하고 있던 재생산 기반은 여전히 필요한 것이었다. 지주제의 안정은 소농경영의 안정 위에서 확보될 수 있는 것이었다.

 16세기 이후 사족 중심이 향촌지배질서가 확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사족의 족계는 점차 농민조직인 향도계를 해체 또는 흡수하여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촌락사회에는 여전히 사족의 족계류와 하층민의 향도계가 병존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사족 자신의 결속만으로도 하층민의 지배가 가능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임란을 거친 이후에 ‘舊規’ 또는 ‘流傳之古例’의 중수를 통해서 실시되는 동계·동약은 난 이전의 것을 단순히 복구하는 차원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상당한 변화가 수반되고 있었다. 변화의 내용은 첫째, 족의 혈연적인 범위에서 동이라는 지연적인 범위로의 전환이고, 둘째는 사족의 족계와 하층민의 향도계가 상하합계의 형태로 결합한 것이었다.0106)鄭震英, 앞의 글(1985).
朴京夏,<壬亂直後의 鄕約에 대한 硏究-高坪洞洞契를 중심으로->(≪中央史論≫5, 1987).

 임란 후 상하합계로서의 동계·동약의 보편화는 우선은 난의 와중에서 많은 인명과 재산의 상실로 인한 향촌사회의 피폐에서 난 이전과 같이 사족만의 상호부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고, 이와 더불어 전후 복구를 위해서도 하층민의 적극적인 협조가 절실하였기 때문이었다. 난 이후 동약을 실시하기 위해 몇 개의 촌락을 合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러한 사정을 잘 보여준다.

琴山과 代如村을 합한 것은 병화 후에 人烟이 肅瑟하여 10집에 9는 빈 까닭에 두 마을을 합하여 하나로 하였다. 月牙 한 모퉁이는 경계가 서로 연해 있어서 또 하나로 합하여 모두 금산이라 하였다(≪晉陽誌≫권 상, 琴山洞約序, 1616).

 그러나 상하합계로의 전환은 한편에서는 하층민의 동향 때문이기도 하였다. 난 이전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던 재지사족조차 그들의 소유노비에 대한 통제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었다. 하층민의 저항은 임란을 겪으면서 토적 등의 활동으로 더욱 적극화되고 있었고, 이러한 토적을 방어하기 위한 義軍이 조직될 정도였다. 이러한 하층민의 동향을 염두에 둘 때 상하합계로의 전환은 전란의 피해에서 오는 단순한 문제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임란 후에 하층민을 포함하는 동계를 실시하였던 다음의 경우는 이러한 사정을 잘 보여준다.

(퇴계의) 鄕立約條와 洞中族契가 모두 좋은 법이나 변란 이후 인심이 날로 사나워져서 刑杖笞罰로는 勸懲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런 까닭에 내가 夫浦洞에서 별도로 약조를 세워 인정으로 인도하고자 한다. 下人賤隷가 명분은 비록 다르나 천명을 함께 받았으니 어찌 비천한 무리라 하여 권유하여 至善의 경지로 함께 돌아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琴蘭秀,≪惺齋先生文集≫, 洞中約條立議小職).

 병화의 혹심함 속에서 또는 난후 인심의 변화에서 이제 사족들만의 족계는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었고, 또한 농민을 촌락의 구성원으로 적극적으로 포섭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사정에서 사족은 몇 개의 마을을 합하여 하나의 동으로 만들고, 귀천을 가리지 않고 상계와 하계를 하나로 합하였던 것이다.0107)徐思遠,≪樂齋集≫권 7, 河東里社契約序. 이러한 경향은 임란의 피해가 혹심하였던 곳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사족의 족계와 하층민의 향도계는 이제 상하합계의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혈연적인 것이 아니라 동리가 실시의 주체가 됨으로써 족계가 아닌 동약으로 전환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동약은 점차 성리학의 명분으로 수식되거나, 군현 단위의 향규와 결합하여 향약의 기초가 되기도 하였다. 동계·동약을 향약으로 인식하거나, 약조를 주자향약의 四綱目 체제에 맞추어 작성하였던 것이 전자의 예라면, 17세기 초반 예안에서 작성된<金圻鄕約>은 후자의 좋은 예가 된다. 金圻는 향약 조문의 제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퇴계 향약의) 法令이 아름답지 못해서가 아니라 근래에 행하지 않음이 애석하지 않는가. 다만 古今이 같지 않고 상세하고 소략함이 다르니 비열함을 생각지 않고 망령되어 덧붙이고 빼고 하였는데, 四約은 대략 呂氏鄕約을 모방하였고, 罰條는 퇴계선생의 향약을 오로지 사용하였다. … 기타 길흉에 부조하고 환난에 서로 구함과 춘추의 모임은 우리 나라 인민의 풍속에 통행되던 것이니 常人을 경계하고 상하인이 함께 약속하여 실로 風敎를 먼저하는 바인데, 아울러 加參定하는 본뜻은 인심을 바르게 하고 풍속을 두터이 하고자 함이다(金 圻,≪北厓集≫, 鄕約).

 즉, 인심을 바르게 하고 풍속을 두터이 하고자 향약조목을 제정하였는데 여기서 비로소 17세기 이후 일반적인 추세이던 주자의 4강목을 기초로 하여 퇴계의<禮安鄕立約條>過罰條와 고유 동계·동약의 吉凶弔慶·患難相救·春秋講信이 결합된 향약을 보게 된다. 國俗의 동계와 주자향약과의 결합의 노력은 임란 이후에 비로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선조대의 좌의정 朴淳이 당시 널리 행해지고 있던 洞隣契와 香徒會를 기초 조직으로 활용하여 향약을 실시하고자 하였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0108)≪宣祖實錄≫권 7, 선조 6년 8월 갑자.

 상하계의 합계나 이를 바탕으로 한 향약의 출현은 임란 이후의 특징적인 현상이었다. 이것은 임란 후 변화된 인심 속에서 사족의 결속만으로는 하층민을 일방적으로 통제할 수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에 따라 하층민을 향촌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동계·동약을 기초로 하여 성립된 향약은 군현 단위에서 뿐만 아니라 동 단위의 동약으로도 그대로 이용되었다. 이로써 17세기 이후의 동약은 그 내용에 있어서 향약과 동일한 형태를 취하기도 하였다. 임란 후 사족에 의해서 난 이전의 동계·동약이 중수되고 정비되어 갔다는 것은 다름아닌 임란 후에도 여전히 사족의 향촌지배가 복구되어 관철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鄭震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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