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2. 사족의 향촌지배와 서원의 발달
  • 1) 사족 중심의 향촌운영

1) 사족 중심의 향촌운영

 선조대 이후 士林勢力의 중앙정치무대에서의 우세확립은 향촌사회에서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지금까지 훈척세력과 연결되어 사림활동을 방해하고 갈등을 일으키던 品官層(世族)이 우세하던 지역에서 사림세가 보다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향촌에서 품관층이나 사림과의 대립은 훈척계의 장악하에 복설된 유향소에 대항해 사림세력이 세운 司馬所의 혁파를 요구한 연산군 4년(1498)의 柳子光의 상소0109)≪燕山君日記≫권 31, 연산군 4년 8월 계유.를 통해 드러나고 있지만, 특히 서원문제와 관련해서는 명종 11년(1556)에 일어났던 소수서원에서의 퇴계 이황 문인들과 有司 金仲文을 앞세운 順興安氏 一門과의 갈등과 空院事,0110)順興安氏一族은 고려 말에 安珦을 배출한 名門으로서 안향의 在京從仕로 그 직계 후손은 開城과 서울에 거주하였지만, 순흥에 世居하던 安氏들은 이들과 계속적인 연결을 맺고 그들을 배경으로 순흥 일대에 世族으로서 위세를 누리고 있었다. 주세붕의 백운동서원 창건시 그들이 여기에 깊이 관여했음은 물론이고 당시 경상도 관찰사이던 安玹이 서원의 재정적 기초를 마련하는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이나 서울로부터 안향의 영정을 가져와 奉安케 한 것 등은 在京 관료세력인 安珦 후손들과 순흥에 세거하던 안씨 일문의 밀접한 관계를 잘 말해준다(鄭萬祚,<朝鮮朝 書院의 政治·社會的 역할>,≪韓國史學≫10,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9, 92∼93쪽). 그리고 역시 명종 13∼14년경의 星州 迎鳳書院 건립을 둘러싼 이황 문인과 星州李氏 집안과의 분쟁0111)처음 영봉서원 건립 때는 목사 盧景麟과 星州李氏 一門이 힘을 합쳐 성주 이씨의 顯祖인 李兆年과 李仁復을 제향하려 했으나 뒤에 金宏弼의 入享이 논의되면서 퇴계 문인들과 갈등을 일으켰고 끝내 程子를 主享으로, 김굉필만 配享하며 명칭도 川谷書院으로 고치는 것으로 낙착되자 성주 이씨 집안은 따로 安峰影堂을 세워 이조년·이인복을 제향하였다(鄭萬祚, 위의 글, 94쪽).에서 그 구체적인 實例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품관층과 사림과의 대립은 위의 소수서원 공원사와 영봉서원 문제가 결국 사림측의 주장대로 결말이 난 데서 보듯이 이미 선조 이전부터 사림측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지만, 선조 이후 명실상부한 사림출신 관료인 사류의 집권이 실현됨으로써 이제 확실해지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유향소와 경재소의 연결 조직을 통해 훈척세력을 등에 업고 사림의 향촌주도를 방해해오던 품관층 내지 세족들은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 중에 안동지역 같은 곳은 세족과 신흥 사림계가 처음부터 상호 인척관계를 맺고 있어 큰 분쟁 없이 사림측에게로 주도권이 넘어가고 세족들은 사림에 용해·흡수되었거나 사림으로 전환됨에 의해 종전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0112)李樹健,<17∼18세기 安東地方 儒林의 政治社會的 機能>(≪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一潮閣, 1995), 558∼565쪽. 같은 경상도라도 진주지역의 경우는 판이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17세기 초에 편찬된≪晋陽誌≫에는 선조대에 들어와 사림계 인사들에 의해 세족의 근거지이던 유향소가 크게 약화되고 그 소속의 전지 100여 결이 屬公되었으며, 세족계 인물들이 사림계 관료에 의해 토호로서 박해를 받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0113)成汝信,≪晋陽誌≫권 4, 叢談. 이 시기 진주지역 사족간의 이러한 동향에 대해서는 李海濬,<17世紀初 晋州地方의 里坊編成과 士族>(≪奎章閣≫5, 1982)에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진주지역 세족의 하나이던 晋陽河氏 一門은 재빨리 사림계의 유현이던 曺植의 문하에 인연을 맺음에 의해 사림세력으로 전환하여 그 사회적 지위와 기반을 상실하지 않고 있었음도 아울러 서술되어 있다. 위와 같은 사실은 선조대 이후에 향촌에서도 사림계의 우위가 점차 확립되어 가는 양상의 일단을 반증하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족의 향촌지배에 있어 큰 전기를 마련하였던 것은 임진왜란이었다. 임란은 조선왕조의 지배질서를 전면적으로 재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고, 그것은 향촌에서의 사족지배구조에도 마찬가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변화는 우선 郡縣의 하부조직인 面里制의 재편으로 나타난다. 경상도 진주지방의 里坊재편의 예로 보건대 전란으로 인한 人的·物的자원의 감소와 경작지의 황폐로 종전의 면리는 일부가 복구·존속되는 외에 대부분 통·폐합되어 재편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그것은 대개 면리 숫자의 대폭적인 축소와 里예하의 평균 屬坊數의 증가로 특징지워지는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各里가 존속·폐합·복구되는 기준으로서 종전과 같은 戶口·田地의 많고 적음보다도 해당되는 里에 사족이 존재하는가의 여부가 크게 상관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사족세가 강한 지역을 중심으로 인근의 경제력이 양호한 平民集居지역을 흡수·편입하여 그들의 관할로 삼는다던가, 한때 다른 리에 폐합되었다가 일정한 기간이 경과한 후 다시 독립적인 리로 복구되는 경우도 대부분이 사족의 거주지였으며, 재편된 후 각 里坊의 경제적 여건 역시 사족거주의 이방이 평민거주 이방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한 상황을 보인다는 분석결과로 확인된다.0114)李海濬, 위의 글, 100∼103쪽. 이는 전란 후의 이방편성이 사족의 주도하에, 그들에 유리하도록 수행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경우 당연히 지방관인 진주목사의 반응이 문제가 되겠는데, 보기에 따라서는 수령권에 대한 침해로 비칠 수도 있는 이런 미묘한 事案에 대해 목사는 이를 방관하거나 오히려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당시의 쇠약해진 행정력으로서는 어차피 전란피해의 수습에 큰 힘을 미치기는 어려울 터이므로 사족이 주동이 된 향촌 재건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는 하였겠지만, 한편으로는 전란 전의 향촌지배력을 바탕으로 난중에 의병활동을 벌임으로써 자신들의 세력기반을 어느 정도 보호함은 물론, 하층민의 동요를 제어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로부터 在地세력으로서의 입장을 강화할 수 있었다는, 당시 사족들의 일반적 성향에 비추어 보더라도0115)鄭震英,<壬亂전후 尙州지방 사족의 동향>(≪民族文化論叢≫8, 嶺南大, 1988). 진주목사로서는 사족을 협조집단으로 인정하여 회유하지 않을 수 없기도 했을 것이다.

 향촌에서의 사족 주도력은 비단 里坊편성을 그들 위주로 관철시킨데서 그치지는 않았다. 사족 거주지역 위주의 이방편성은 곧 그렇게 편성된 이방 단위의 향촌사회가 사족의 주도하에 운영될 것임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진주지방의 경우 이방 재편성이 이루어지면서 뒤이어 鄕射堂이 중건되고 鄕校가 수리되는 외에도 德川書院 사액, 大覺書院 창건, 上寺里約 중수, 琴山洞約 증보, 南·北面書齋 중창 등의 사족 사이의 결속과 그들에 의한 향촌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제반 향촌조직이 속속 재건되었다.

 임진왜란 후 진주지방에서 보이는 이러한 사족세력의 성장과 향촌지배력의 행사는 安東과 尙州, 그리고 南原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보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0116)鄭震英, 위의 글.
―――,<朝鮮前期 安東府 在地士族의 鄕村支配>(≪大丘史學≫27, 1985).
金炫榮,≪朝鮮後期 南原地方 士族의 鄕村支配에 관한 硏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3).
金仁杰,<朝鮮後期 鄕權의 추이와 지배층 동향>(≪韓國文化≫2, 서울大, 1981).
난후의 향촌질서가 난전과 마찬가지로 사족 위주로 일단 복구되고 있으며, 단순한 복구에만 그치지 않고 보다 강화된 사족권의 성장을 수반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전란이 끝난 지 몇 년 되지 않은 선조 36년(1603)에 단행된 京在所의 혁파도 이런 상황과 관련지워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즉 경재소의 혁파를 단순한 하나의 제도의 소멸로서보다는, 그 동안 사림세력이 계속적으로 추구해 왔던, 수령 내지 이와 밀착된 官人주도형의 향촌통제나 경재소를 통한 훈척세력의 향촌관여의 배격과, 사족 위주의 향촌질서 수립운동의 구체적인 성과라고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이제 사족은 완전한 향촌지배세력으로서 지위를 확보하여 종전부터 그들이 마련해 시행해 왔던, 留鄕所·鄕案·鄕規·鄕約·洞契·洞約·族契·鄕會·鄕校·書院 등의 각종 향촌조직을 통해 향촌사회를 그들 중심으로 운영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들 각종의 향촌조직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상세히 설명되어 있으므로 여기서 다시 말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향회의 존재가 사족의 향촌운영에서 주체였음만 지적하고자 한다. 재지사족의 공동 관심사가 여기에서 논의되어 이른바 鄕中公論이 형성되었고 鄕中大小事의 결정 역시 여기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향회는 향촌조직의 상부구조로서 하나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논의될 事案과 개최되는 장소에 따라 다양하였다. 예컨대 賦稅 문제와 관련된 향중대소사는 대개 유향소에서, 그리고 문묘종사나 服制論議와 같은 斯文과 관련된 문제는 향교나 서원에서, 그리고 서원의 신설이나 제향인물의 추가 선정 문제 또한 서원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향회가 있다고 하더라도 향중공론의 주체는 동일하였으며, 각각 기능을 달리하며 존재하였던 것이다.0117)정진영,<16, 17세기 재지사족의 향촌지배와 그 성격>(≪조선시대 향촌사회사≫, 한길사, 1998). 公論의 형성은 곧 재지사족의 향촌지배 여부를 가늠하는 근거가 되며 17세기 후반부터 현저해지는 이른바 鄕戰이란 바로 이 鄕論의 분열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사족지배하의 향촌운영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은 관권 특히 수령권과의 관계였다. 사족간의 결속으로 인해 향촌에서 사족의 자율성과 재량권이 아무리 강화되었다고 하여도 임금을 대신해 백성을 다스리는 수령권에 대한 도전이나 침해는 용납될 수 없었다. 따라서 사족 중심의 향촌운영은 관권과의 일정한 양보와 타협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율곡의<海州一鄕約束>에 鄕員(鄕案入籍者인 사족)이 억울하게 죄를 입었을 때 사족들이 함께 수령에게 나아가 억울함을 호소하며 변호할 수 있는 집단적인 행동권은 규정되어 있으나,0118)정진영은 이를 수령의 부당한 조처에 대한 한정적인 저항권의 명시로 보고 있으나(정진영, 위의 책, 245쪽), 原文이 “鄕員以非罪 將受刑戮者 僉議立庭 呈單子救解之 如有民寃關重者 亦僉議立庭”으로 되어 있어 ‘저항권’으로까지 인정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하의 서술은 이 논문에 주로 의거하였음을 밝힌다. 일반적으로 수령의 통치에 대한 시비는 처벌조항을 두어 엄격히 금지하였으며 바로 이것이 “분수를 지켜 몸을 보존하는”(守分保身) 사족의 도리라고 규정되고 있었다. 이것은 사족이 관권 또는 수령권과의 관계를 원활히 하고 나아가 상호 이해를 일치시킴으로써 향촌지배의 일익을 담당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계제였다.

 이와 아울러 재지사족들은 향리층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 나갔다.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향리층의 통제 여하에 따라 사족의 향촌지배의 성패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李珥가 작성한<해주일향약속>에는 향리에 관한 규제가 ‘元惡鄕吏’라는 포괄적인 것에서부터 공물징수 등을 통한 구체적인 작폐에 이르기까지 명시되어 있다. 나아가 上戶房·吏房 등의 차정과 같은 향리의 천거나 作弊鄕吏에 대한 처벌까지 鄕所가 담당하게 함으로써 향리에 대한 사족의 장악력을 보장하고 있다. 사족에 의한 향리장악과 이러한 통제는 그들이 농민과 수령 사이를 연결해주는 존재였기 때문이며, 이는 결국 사족의 농민에 대한 지배와 수령에 대한 간접적인 견제를 의도한 것이었다.

 양민과 노비로 구성된 농민층은 재지사족의 직접적인 교화와 지배의 대상이었다. 사족의 향촌지배는 교화를 통한 간접 지배와 통제에 의한 직접 지배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족의 일차적인 관심은 소유노비의 통제였는데, 이는 主와 奴의 개별적인 관계가 아니라 동족 또는 촌락구성원간의 ‘공동체적’인 관계를 통해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결국 재지사족은 촌락과 그 확대로서의 一鄕의 범위에서 농민을 공동체적인 규제의 틀 속에 묶어두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재지사족이 理想으로 생각하였던 ‘공동체적’인 일향 지배를 담보하고, 보완해준 실질적인 내용은 교화와 부세운영이었다. 교화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가족·향당 구성원 상호간에 있어서의 윤리규범과 길흉부조의 강조뿐만 아니라 향촌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모든 행위가 규제의 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자타에 관계없이 상전(本主·地主)에 대해 무례 불손한 노비는 유교적 윤리규범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되는 ‘부모-자식’의 관계로 병치시켜 엄하게 다스리고 있었다.

 재지사족의, 교화라는 명분론적인 지배를 보완하면서 농민을 지배 대상으로 묶어 둘 수 있었던 것은, 부세운영에 있어서의 일정한 참여였다. 즉 부세운영은 교화의 물적 토대라 할 수 있다. 이시기 농민 몰락의 원인을 중앙권력의 과도한 부세수탈에서 찾고 있던 사족은 부세운영에 관여함으로써 소농경제의 안정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부세운영의 실질적인 책임은 유향소가 담당하고 있었으며, 부세운영의 원칙은 균등한 부담에 기초하였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농민의 民瘼까지도 혁파하는 모습을 띠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족의 향촌지배의 구체적인 내용으로서 교화와 부세운영은 별개로서 기능을 갖는 것이 아니라 상호 통일적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한편 사족들에 의한 부세운영은 단순히 농민의 부담을 균등히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를 통해 사족 자신의 부세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었다. 국가의 모든 부세에서 사족이 원칙적으로 면제되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사족은 이렇듯 부세운영에 참여함으로써 점차 양반층으로서의 신분적 특권을 관철시켜갔던 것이다.

 이상에서 본대로 난중의 의병활동을 기반으로 전란 후의 향촌사회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강화된 사족권은 관권과의 일정한 협력하에 그들 위주의 지배체제를 구축하였으며, 유향소·향약·향회 등의 각종 향촌조직을 통하여 그들 중심으로 향촌사회를 운영해 갈 수 있었다. 이 시기 향촌사회의 이런 실상은 인조 2년(1624) 사헌부에서 올린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영남의 습속에 마을에서 죄를 지은 자가 있으면 임의로 毁家黜鄕 하였습니다. 이 습속은 曺植이 악을 지나치게 미워한데서 말미암았는데 그 폐단이 지금에 와서는 더욱 널리 퍼져서 심지어 다른 道에서도 이를 본받아 꺼리는 바가 없습니다(≪仁祖實錄≫권 6, 인조 2년 5월 병진).

 향촌에서 가하는 형벌 중 가장 무겁다는 훼가출향은 선조 초 진주에서 사족부녀의 음행이 문제되었을 때 조식이 문인을 시켜 음행한 여자의 집을 헐고 가족을 동네에서 몰아내면서 처음으로 표면화되었다. 중앙관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것은 弊風일지 모르나 사족이 풍기단속을 앞세워 士族家까지 규제하고 있는 사족 중심 향촌지배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따라서 그러한 훼가출향이 이제는 영남만이 아닌 다른 지역에까지 확산되고 있다는 사헌부의 지적은 이 시기의 향촌사회가 사족에 의해 통제되며 사실상 운영되어 나가고 있음을 反證하여 주는 사례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사족 중심의 향촌운영은 얼마가지 않은 17세기 후반0119)李海濬은 임진·병자의 두 차례 전란을 거치면서 농민과 토지를 중심으로 한 사족의 물질적 토대가 붕괴되는 반면 새로운 이향세력이 등장하여 국가-수령-사족의 연결구도가 국가-수령-이향으로 바뀌어가면서 사족지배체제가 동요된다고 하여 시기를 좀더 앞당기고 있다(李海濬,<조선후기 書院硏究와 鄕村社會史>,≪韓國史論≫21, 國史編纂委員會, 10∼13쪽).에 이르러 더 이상 추진되기 어려운 난관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견제와 사족 내부의 여건변화로 인한 분열 때문이었다.

 외부로부터의 견제란 국가의 對鄕村정책이 재지사족을 매개로 하던 간접적인 방식에서 소농민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형태로 전환된 것을 말한다.0120)이하의 서술은 朴京夏,<朝鮮中期 鄕村支配組織에 관한 硏究-鄕規·洞契를 中心으로->(≪國史館論叢≫59, 1994), 197∼199쪽의 서술을 주로 참고하였다. 경재소의 혁파로 유향소의 座首에 대한 選任權이 일단 향회의 추천을 받는 형식을 취하기는 했으나 守令에게 귀속되었고, 수령권이 서서히 강화되는 속에 좌수가 수령의 보좌역으로 격하되고 유향소마저 향청으로 바뀌어 수령 예하에 놓이게 되자 결국 사족의 手中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사족의 향촌지배를 실현하는 가장 중요한 향촌기구 하나가 떨어져 나간 것이며 그만큼 그 영향력은 위축되고, 반면 향리를 장악한 수령의 직접적 농민지배가 강화된 것이다.

 나아가 국가는<五家統事目>과 里定法의 시행을 통해 賦稅 행정실무를 面里任과 향리의 연결 조직을 이용해 수령에게 귀속시키고 사족에게는 교화의 책무만 맡게 함으로써, 종래 사족세력이 유향소를 통해 지녔던 부세운영권을 무력화하여 小民에 대한 지배권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사족의 향촌지배에 대한 견제는 신향으로 불리는 새로이 성장한 향촌세력의 도전으로부터도 주어졌다. 효종 5년(1654)의<營將事目>반포로 향청의 鄕任職을 세습하는 鄕族層이 등장, 鄕案의 入錄을 요구하며, 鄕權을 놓고 기존의 사족세력(舊鄕)과 갈등을 빚고 있었다. 小民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를 추구하는 국가의 향촌정책과 신향의 도전은 사족세력의 향촌운영을 크게 위협하는 요소였고, 결국 18세기 이후 향안의 작성이 중단되고 끝내 罷置되는 데서 보듯이 사족영향력의 감소와 유명무실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위와 같은 외부의 견제와 함께 17세기 후반에 이르게 되면 사족세력의 내부분열이 심화되어 더 이상 결집된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이 일어난다. 그것은 우선 촌락형태의 변화에서부터 비롯한다. 男歸女家婚·子女均分制·輪回奉祀를 특징으로 하는 조선 초 이래의 가족 및 상속제도가 17세기에 이르러 가례의 보급에 따라 親迎禮와 長子相續制·長子奉祀制로 바뀌면서 종래의 父·母·妻系의 異姓三族이 동거하던 同族村 형태로부터, 父系親 중심의 동성동본의 친족이 한 마을에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同姓村이 형성되어 발달한다. 그런데 이런 촌락형태의 변화는 촌락 안에 있던 家舍·家垈·田畓·墓山을 둘러싸고 옛날에는 같은 동족으로 간주하던 씨족·문중·촌민들 사이에 이해관계의 충돌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17세기부터 점차 심각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는 향촌사족간의 山訟과 재산분쟁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며, 이런 과정에서 일향 사족 전체의 공동 관심사보다는 동성촌락을 단위로 한 족적 결속과 門中勢의 확산에 주력하게 된다.0121)이상의 서술에서는 李樹健,<嶺南學派의 鄕村支配體制>(앞의 책), 435∼444쪽을 주로 참고하였다.

 이 시기에 사족간의 분열을 불러온 요인에는 중앙정계에서의 붕당간 대립의 심화도 포함된다. 아니 어떻게 보면 이것이 더 본질적일 수 있다. 조선 붕당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당론의 세습성에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先代의 정치적 갈등과 대립은 그 후손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것은 중앙에서는 정쟁으로 나타나지만 향촌에서는 중앙의 정치문제나 향촌사회의 주도권 문제를 놓고 당해 후손간에는 물론, 각기 이들과 학연 및 혼인관계로 연결되는 사족간의 지지와 상호 배척으로 인해, 심지어는 一道가 휩쓸리고 여러 개의 문중이 총동원되다시피 하는 향전이 벌어졌다. 효종 6년(1655) 전라도 나주의 景賢書院 운영을 놓고 벌어진 서인계 및 북인계 지지 사족간의 대립과, 숙종년간 전라도 무안의 紫山書院의 훼철과 복구를 놓고 노론과 남인계 사족간에 벌어진 서원향전은0122)金文澤,<16∼17세기 羅州地方의 士族動向과 書院鄕戰>(≪淸溪史學≫11,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4).
金東洙,<16∼17세기 湖南士林의 존재형태>(≪歷史學硏究≫7, 全南大, 1977).
그것의 저명한 사례에 불과할 뿐이었다.

 이와 같이 사족의 향촌지배권이 약화되는 속에 사족 내부의 분열까지 겹치게 되면서 18세기 이후 사족 중심의 향촌지배는 점차 후퇴하고, 새로이 형성되는 동성촌락을 중심으로 한 족적 결속과 문중조직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향촌사회의 운영도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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