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3. 사족의 향권과 수령권
  • 2) 사족의 향권의 내용

2) 사족의 향권의 내용

 조선 중기의 기록들에서 사족의 향권을 규정하고 있는 기사를 찾기는 어렵다. 국가가 향권을 법적·제도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에서는 지방사회를 수령을 매개로 해서 통제하고 있었으며, 수령권을 위협하는 재지의 지배층들을 통제하기 위해 유향소를 활용하기도 하였지만, 이 유향소를 통제했던 경재소도 법적 기관이라기보다는 당시 지배신분층이었던 사족들의 관행에 의지하는 바가 컸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수령은 임기가 제한되어 있고 읍 사정에도 밝지 못해 세금을 거두어들이고 역을 차출하며 국가의 정책을 하달하는 데 각 지역의 공동체적인 조직이나 지배층들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0177)張顯光,≪旅軒先生文集≫권 7, 鄕社堂記. 향촌사회에서 수령 통치의 매개역할을 한 것이 바로 사족신분층이었다. 이들이 향촌에서 자신들의 출신 기반이기도 했던 향리층을 확실히 통제하고 향촌사회 권력을 장악하게 된 것은 지역에 따라 다소간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16세기 중엽으로 이해되고 있다.0178)鄭震英,<朝鮮前期 安東府 在地士族의 鄕村支配>(≪大丘史學≫27, 1985). 16세기 국가에서 파악하고 있던 품관층이 바로 이들이었는데, 국가는 이들 품관층을 유향소를 통해 결집시키고, 이들을 경재소를 매개로 통제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수령을 도와 읍사를 처리하는 가운데 이들의 위치는 지방사회의 권력구조 내에서 확고해지게 되었으니 향권도 바로 이같은 지방사회의 권력구조 속에서 나오게 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16세기 초 향권이 바로 유향소의 임원이 가지고 있던 권한을 의미하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중종 11년(1516) 눌재 박상이 쓴 아래의 光州鄕案 서문은 향권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우리 고을의 좌수 김숙양, 별감 김경보·설숭개·유자화가 눌재(나)에게 편지를 보내 가로되 … 지금 향소의 임원이 된 자는 邑長(수령)의 다음으로 일향의 권병(一鄕之權柄)을 주장하니 이서들이 엎드려 그들의 명을 받들고, 여항의 사람들이 몸을 굽혀 그 위세에 아부하고 의탁합니다. 크게는 조용조의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어그러져 혹 그 커다란 이익을 움직이는데, 이에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보기를 비루한 자들이 천금을 잡은 것 같이 합니다. 이는 이른바 향소라는 것이 온 고을이 쫓는 별종의 이권을 농단하고 그 사이에 간계와 위세를 부리고 행사함을 가리키는 것이니 진실로 국가가 그것을 세운 본래의 뜻이 아닙니다(朴 祥,≪訥齋續集≫권 4, 光州鄕案序).

 위 글에는 향소의 임원이 수령 다음으로 ‘一鄕之權柄’을 장악하여 이서들과 일반 백성 위에 군림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서 향임이 주장하고 있던 ‘일향의 권병’이 곧 향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위의 글은 그 향권의 실질적인 내용이 조용조의 세금 부과 등 부세운영권이었음도 알게 해준다. 위의 글에서 이서와 여항인, 곧 吏民이 향임의 통제하에 놓여 있었음을 지적한 것도 이 부세운영을 중심 내용으로 하는 향권을 좌수·별감 등 향임이 장악하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위에서 말하는 향권은 좁은 의미의 것이고, 16∼17세기의 향권은 보다 넓은 의미로 쓰여지고 있었다. 향임이 가졌던 권한은 물론 그 향임에 대한 인사권까지를 포함하는 사족의 일향 지배권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흔히 鄕論의 주도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같은 점은 17세기 경재소 혁파 이후 유향소의 운영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사족들이 중심이 되어 해결하려 했던 남원의 경우에서 잘 살펴볼 수 있다.

 인조 17년(1639) 경 남원에서는 향안작성과 그 운영의 문제에 관해서 향중의 논의를 수렴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문제를 지적하고, 이어서 “일국에 일국의 공론이 있듯이 일향에는 일향의 공론이 있어 향선생이 독천할 것이 아니며 오직 사대부가 그 공의를 주장해야 한다”고 하면서 사족이 중심이 되어 수습책을 모색하고 있었다.

난을 겪고난 후에 경재소가 폐지되매, 사대부가 향권을 잡는 것을 천히 여겨 꺼리게 되어 모든 논의가 가부를 정할 수 없게 된 까닭에 무식하고 염치를 모르는 자들이 방자히 행동하며 鄕籍(향안)을 개인의 발신하는 사사로운 쪽지로 알고, 향임이 되면 집안을 일으킬 수 있는 돈방석에 앉게 된 줄 알아 온갖 쟁단이 극에 달했다. 향적이 다시 타 버리고 향임에 제 사람을 쓸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 도내 全·羅·靈 三大邑이 최근 모두 戰場이 되어 논의가 괴리되고 향적이 파해 없어졌는데 오직 光州 한 읍만이 향풍이 제대로 서서 지금까지 異論이 없는 것은 참판 박광옥이 기고봉과 박사암의 공의를 따라 약속을 엄히 세우고 영구히 전해 사대부로 하여금 논의를 주장하게 한 때문이었다(≪龍城誌≫권 3, 完議, 인조 17년).

 위의 문제제기에서는 사대부가 향권을 잡는 것을 천히 여겨 꺼리게 되었기 때문에 향안에 문제가 야기되고 향임에 제 사람을 쓸 수가 없게 된 사실을 지적하고, 사대부가 그 모든 과정에서 향론을 주도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향권은 향임을 천망하는 권한 및 향안에의 입록 여부를 결정하는 데 있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까지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향안에 입록시킬 것인가 여부를 결정하는 권한이 중요했던 것은 향안에 등재되어야만 향임이 될 수 있었고, 또 향중의 제반사를 결정하는 향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향임의 천망이라던가 향안에의 입록 여부는 각 군현에서의 ‘大小鄕會’에서 결정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향회의 논의를 주도하는 권한, 곧 향론의 주도권을 향권으로 인식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위와 같이 향중의 제반 지배기구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각종 향직을 매개로 하여 향권의 핵심 내용이라 할 부세 운영권을 조정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향회를 통해 결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향회는 향안에 등재된 사족, 즉 향원들의 모임이었으므로 향회의 기반이 된 것은 향안이었다. 향안은 일정한 심사를 거쳐서 통과된 향원들의 명단으로서 재지사족의 결속을 도모하는 역할을 하였고, 아울러 사족 자신들을 통제하는 기능도 행사하고 있었다. 이 향안에는 누대의 사족으로서 일정한 규약에 합당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었는데, 매우 폐쇄적이었으며 재지사족의 신분적 권위의 상징이었다. 이 향안 구성원들이 향회를 열어서 향안에 입록하는 자격을 심사하였으며 그 밖에 향내의 대소사를 처리하고 있었다.0179)향안에 관한 연구로는 다음의 글 참조.
田川孝三,<鄕案について>(≪山本博士還曆紀念東洋史論叢≫, 1972).
FUJIYA KAWASHIMA, The Local Gentry Association in Mid-Yi Dynasty Korea:A Preliminary Study of the Ch'anqnyŏng Hyangan, 1660∼1838 (≪Journal of Korean Studies No. 2≫, 1980).
―――, A Study of the Hyangan:Kin Groups and Aristocratic Localism in the Seventeenth and Eighteenth Century Korean Countryside (≪Journal of Korean Studies No. 5≫, 1984).
金仁杰,<조선후기 鄕案의 성격변화와 在地士族>(≪金哲埈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지식산업사, 1983).
신정희,<鄕案硏究>(≪大丘史學≫26, 1984).
김현영,<조선후기 남원의 사회구조-사족지배구조의 변화와 그 성격->(≪역사와 현실≫2, 1989).

 이 때 향권의 행사는 향회와 향소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는바, 그 행사 방식은 향회의 구성과도 관련하여 삼남지방의 경우 영남과 양호가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즉 안동을 대표로 하는 영남의 경우에는 향회가 유향소(향소) 조직을 기반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광주를 대표로 하는 호남의 경우는 유향소 조직 위에 따로 상부조직(鄕老·鄕長·鄕有司 등)을 갖추고 이 상부조직의 구성원이 향회를 주관하고 향소까지 통제하고 있었다. 많은 예를 확인할 수 없으나 호서의 경우 양자를 절충한 형태가 발견되기도 한다. 이 향회는 지방에 따라 차이가 있었겠으나 대체로 1년에 춘추 2회 열리는 것이 보통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전 구성원이 모이는 대회와 실무자들의 모임인 소회로 나누어 개최되고 있었다.

 이 향회는 향내 제반 문제를 감독 지휘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향회에서는 주로 향안 입록자를 결정하고 향임을 천망하며, 사족 중심의 지배질서에서 벗어나는 제반 행위를 적발, 향소나 관으로 하여금 처벌하도록 하는 한편, 선행자를 포상하기도 하였다. 이 향회에서는 각종 규제조항을 두었는데, 그 규약이라고 할 수 있는 鄕規는 향안에 오른 향원을 일차적 대상으로 하는 규약이었지만 그 내용은 사족 자체의 결속문제 외에 吏民에 대한 통제의 문제를 아우르고 있었다.

 영남 향규의 대표적인 예로 거론되는 柳成龍이 撰한 安東<新定十條>가 ‘重鄕任 嚴會儀 厚彛倫 正鄕案 明禮俗 尊高年 禁非爲 治吏胥 均徭役 訓童夢’으로 구성되어 있는바,0180)≪永嘉誌≫, 新定十條. 그 중심 내용은 향회의 운영, 사족 자체의 결속, 이서층에 대한 통제, 부역체제의 유지 등에 관한 것이었다. 17세기 호남 담양의 경우, 향회에서는 향적 수정, 향임 천망 외에 향임이나 향집강을 거스르려는 상한을 다스리기도 하고, 향원의 공통된 이해에 저촉된 행위를 한 자나 사족으로서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를 한 자를 징벌하고, 이서층의 작폐를 규제하였던 것0181)全炯澤,<17세기 담양의 鄕會와 鄕所>(≪韓國史硏究≫64, 1989). 등에서도 향규의 내용이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재지사족은 그들의 신분적 권위의 상징이었던 향안을 모체로 한 향회를 통해 향권을 장악하고 향소 등을 통해 이민을 지배하고 있었는바, 향권의 핵심 내용은 향촌사회의 제 권력기구에 대한 인사권과 부세운영권이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그 실무를 집행하는 향소의 향임은 그 지위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혁혁한 사족으로서는 기피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일이 매우 고된 것이었을 뿐 아니라 경재소 혁파, 영장사목의 반포 등으로 그 지위가 열악해진 것도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0182)金龍德, 앞의 책, 46∼48쪽. 따라서 같은 향안에 오른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점차 향소의 소임을 맡은 인물이 소속한 가문과 그렇지 않은 경우와는 괴리현상이 나타나고도 있었다.

 위와 같은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체제는 일시에 갖추어진 것은 아니었다. 향촌사회 외부로는 왕조 초기 관권을 매개로 한 중앙집권세력과 대항하면서, 안으로는 지주적 기반의 확립과 안정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는 한편 향촌사회에서 그들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도전세력이었던 향리층을 배제하고 하층민을 그들의 통제하에 결속시켜 나가는 가운데 그같은 체제를 갖출 수가 있었던 것이다. 조선 전기의 유향소복립운동, 위로부터의 향약실시운동 등은 정치적인 차원에서 추진된 대표적인 운동형태였다. 이같은 운동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제시된 문제해결의 방향은 이후 향촌사회체제의 성격을 규정짓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국가가 향촌사회에서 그 권력을 행사함에 있어 재지사족의 지지가 필수적임을 확인시킨 것도 성과의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재지사족은 그들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권력장치를 향촌사회내에 마련하면서도 국가권력과의 마찰을 최대한 줄일 수 있는 규범을 제시함으로써 국가권력과의 타협점을 발견하고 자신들의 향권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조선 중기의 향권은 관권(수령권)과 대립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재지사족의 이해를 대변하는 향회나 유향소(향소) 등의 권력기구도 수령의 행정을 보좌하는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수령은 당시 사족의 지지 위에서 그같은 권력기구의 도움을 받아 고을을 다스리고 있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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