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3. 사족의 향권과 수령권
  • 4) 조선 후기 향권의 추이

4) 조선 후기 향권의 추이

 조선 중기 향권은 재지사족들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다. 재지사족들은 군현 단위에서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권력기구를 확보하고 이를 매개로 하여 향촌사회를 그들의 지배하에 둘 수 있었다. 사족이 향촌사회에서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던 지배기구는 향안을 모태로 한 향회와 그 지휘를 받고 있던 유향소였다. 좁은 의미에서 향권이 향임이 갖는 권한을 의미하였던 데서, 보다 넓게 그 향임의 임면(추천)을 포함한 인사권과 제반 향중사의 의사결정권까지를 포함하는 의미로 쓰여지게 된 것도 위와 같은 사정에 기인한 것이다.

 이같이 관의 행정조직 외에 재지사족의 이해를 대변하는 향촌 지배기구가 향촌사회에 병존하고 있었던 것은 재지사족의 존재형태와, 국가의 지배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즉, 재지사족들은 자신들의 경쟁자였던 향리를 배제하고 향촌사회에서 지배적 지위를 확보하면서 향안과 향회를 통해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시켜 나가고 있었고, 국가 역시 그들을 매개로 해서 지방사회를 통치해야만 했기 때문에 그같은 향촌 지배기구가 운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조선 중기 관인들이 지방적 근거를 가지고 활동하고 있었던 사정과도 관련된다 할 것이다.

 그런데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사족들의 분열과 기반의 위축 등으로 인해 결속력이 약화된 틈을 타고, 향임층과 이서층들이 향권에서의 독자적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사족들의 지위가 약화된 데서 기인하는 것이었지만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수령권강화책, 억강부약책에 기인하는 바 컸다. 이 과정에서 기존 사족의 결집력의 상징이었던 향안이 더이상 작성되지 못하거나 파치되고 향회의 기능도 부정되어 나갔다. 그 결과 이제 사족들의 향권에서의 지위도 현격한 변화가 있게 되었다. 즉 기존의 사족이 갖고 있던 넓은 의미에서의 향권은 수령권에 의해 부정되고, 이제 향권은 좁은 의미에서 향임층이 갖는 권한 또는 儒·鄕任의 임면에 끼치는 영향력 정도의 의미만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권한도 이제 철저하게 수령에 의해 천단되게 되었다. 수령의 천단을 억제할 수 있었던 사족들의 견제기능이 상실된 결과였다.

 이같은 사족의 향권 상실은 결과적으로 수령과 수령의 비호를 받고 있던 이향층에게 향권이 집중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일부 지역에서 사족들이 유·향임의 임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고, 특히 향교의 재임이나 서원의 임원 등 유임은 여전히 이들의 관심사였기 때문에 그 영향력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이제 18, 19세기에 들어와 향권은 수령권에 철저히 예속되게 되었고, 수령권의 비호를 바탕으로 이향층이 향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점은 기존의 향족이나 서얼 등 사족에 미치지 못했던 층만이 아니라 새롭게 부를 축적하고 있던 부민층이 향권에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들 부민층은 수령의 수탈을 자각하는 단계에 이르기 이전에는 수령권을 배경으로 향권에 접근함으로써 각종 부담에서 빠지는 특권을 향유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신분상승을 모색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金仁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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