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4. 사족지배체제하의 신분질서
  • 1) 사족 중심 신분질서의 확립

1) 사족 중심 신분질서의 확립

 향촌사회 운영구조상에서의 사족지배체제는 16세기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16세기는 재지사족 중심의 새로운 신분질서가 정비되어 가던 시기였다. 사족이 독립된 배타적 신분층으로 굳어지게 되는 것은 16세기 후반기 이후이며,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에도 여전히 향촌사회의 중심 구조로 존속하였다. 이는 재지사족이 향촌사회에서 배타성을 갖는 향촌지배 규약을 통해 지배질서를 확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족 중심의 신분질서가 확립되어 가는 과정을 살피되 사족의 비사족(技術官, 庶族有職者, 胥吏, 鄕孫, 庶孼 등)에 대한 배타적 차별화에 주목하기로 한다.

 ‘사족’이란 용어는 고려 중기 이후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와 함께 ‘士大夫’란 용어도 거의 같은 시기에 나타났다. 14세기부터 자주 나타난 사대부는 고려 후기 能文能吏의 새로운 관인층으로서 학자적 관료이며 관료적 학자였다.0189)李佑成,<高麗朝의 ‘吏’에 對하여>(≪歷史學報≫23, 1964), 24∼25쪽. 세종대에는 중국의 예에 따라 4품 이상을 ‘大夫’라 하고 5품 이하를 ‘士’로 호칭하게0190)≪世宗實錄≫권 52, 세종 13년 5월 무진. 됨에 따라 有品者를 大夫·士, 곧 사대부라고 하였다. 사족은 사대부와 통용되기도 하였지만 ‘士大夫之族’의 준말로서 사대부의 족속을 의미하기도 하였다.0191)李成茂,≪朝鮮初期兩班硏究≫(一潮閣, 1980), 16쪽.
―――,<朝鮮初期 身分史硏究의 再檢討>(≪歷史學報≫102, 1984), 212쪽.
16세기 중엽의 全家入居(全家徙邊) 문제와 관련해서 설정한 사족의 범위에 자동적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兩邊四祖俱有顯官者’이거나 문무과 출신자의 자손인 사람이고, 생원·진사는 ‘當身’에 한정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본 사족의 범위는 관직자와 그들 관직자의 일정 범위내의 가족 및 후손을 말하는 것이다.0192)≪受敎輯錄≫刑典, 推斷.
宋俊浩,<朝鮮兩班考-朝鮮朝 社會의 階級構造에 관한 한 試論->(≪韓國史學≫4,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3), 342∼356쪽.
이처럼 사족이란 용어는 사대부와 함께 학자적 소양을 지닌 관료와 그들의 일정 범위내의 후손까지를 포함한 지배층을 뜻한다.

 지배층으로서의 신진사족의 생성은 대부분 13, 14세기에 걸쳐 군현의 土姓吏族에서 성장하였다. 군현의 토성은 고려 초기 이래 역대에 걸쳐 중앙이나 지방의 지배세력을 산출시키는 공급원 역할을 하였다. 15세기를 기준으로 하여 볼 때 이른바 鉅族과 사림파, 상급 향리층을 막론하고 그들의 뿌리는 각기 군현토성에서 분화된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같은 토성이라도 上京從仕하면 在京官人이 되었고, 그대로 토착하면 군현지배자로서 鄕吏세계를 형성하여 지방 행정실무는 물론, 향촌사회까지 영도해 나가는 위치에 있었다. 이처럼 토성에서 士族과 吏族이 분화되어 갔고, 이의 분화는 여말선초에 오면 더욱 촉진되어 종래의 재지세력이 다시 재지사족과 이족으로 구분되어 갔다.0193)李樹健,≪嶺南士林派의 形成≫(嶺南大 出版部, 1979), 142∼148쪽.

 재지사족은 대체로 여말에 재경관인 가운데 낙향 생활자가 생기고 군현이족이 신분적으로 향상되면서부터 생겨났다. 즉 왕조교체와 이후 수차의 정변으로 本鄕 또는 妻鄕·外鄕을 따라 낙향한 사류들과 添設職·影職 등을 통해 品官이 되어간 계층이 재지사족의 주류가 되었다.0194)李樹健, 위의 책, 155∼156쪽. 이들 사족은 대체로 중소지주로서의 경제적 기반과 사족으로서의 신분적 배경을 가진 계층으로서 점차 가문을 형성하고 혼인·학연 등의 연결을 가지면서 향촌사회의 지배층으로 성장하였다.

 재지적 기반을 가진 이들 사족 가운데 일부는 성종대 이후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사림파를 형성하였고, 이들 사림의 정계진출과 병행하여 점차로 사족과 비사족을 구별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는 곧 사족의 自別의식에 의한 배타적 차별화의 시도였으며, 기술관을 그 대상으로 하였다.

 우선 재지적 기반을 토대로 성장한 사림의 기술관 및 서리에 대한 차별화 시도의 전개양상을 보기로 하자.0195)기술관 지위 격하논의와 관련한 이하의 서술은 주로 다음의 글을 참고하였다.
韓永愚,<조선초기 사회계층 연구에 대한 재론>(≪韓國史論≫12, 서울大, 1985), 338∼343쪽.
기술직에 종사하는 문반관료들을 東班에서 제외시켜 차별하자는 논의가 조정에서 일어난 것은 성종이 즉위한 이후부터였다. 특히 성종 8년(1477)에는 관제개혁에 대한 논의를 벌이는 가운데, 雜職官을 동반에 참여시킬 것인가 제외할 것인가에 대한 격론이 일어났다. 원래≪經國大典≫에는 잡직도 東班流品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때는 잡직 중에 檢律·算士·內需司書題를 동반유품에 넣을 것이냐가 논의 대상이 되었다. 즉≪경국대전≫의 규정을 준수하자는 입장과, 이를 바꾸어 잡직을 동반에서 제외시키자는 주장이 쉽게 타협을 보지 못했다. 찬반 양론의 논지 가운데, 잡직 차별을 가장 적극적으로 찬성한 것은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들로서, 이들은 士林名士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인간기질의 차이까지 내세우면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잡직 차별을 적극 반대하는 논의는 의정부와 6조의 판서·참찬·찬성 급에 속하는 고급관료들에 의해 이루어 졌다. 그 외에 절충론을 주장한 이는 의정부의 정승들과 판서 등 元老大臣들이었다. 이 문제와 관련한 성종 때의 정치분위기를 볼 때, 잡직을 士類와 구별하여 차별대우하자는 논의는 언관들의 주장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재지적 기반을 가진 사람들은≪경국대전≫체제하의 법제와는 달리 그들의 차별의식에 의해 기술관을 천시하려는 차별화를 기도하고 있었다.

 성종 13년에도 사헌부·사간원의 관원들은 계속해서 잡직차별을 건의하는 疏를 올렸는데, 醫官·譯官은 사족이 아니므로 사대부와 列을 같이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언관들의 요청을 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성종대 이후에는 사림계열의 언관들이 특히 사족과 비사족을 族屬상으로 구별하여 비사족의 동반유품 참여를 억제하려는 노력이 집요하게 일어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언관들의 경직된 차별론이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진 예는 별로 없었을지라도 성족 즉위 이후에는 사림의 정계진출과 병행하여 점차로 사족과 비사족을 구별하려는 경향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한 추세 속에서 16세기 중엽의≪大典後續錄≫에서는 마침내 서얼의 잡과 응시를 허용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기술관원을 천시하는 풍조는 더욱더 커질 수 밖에 없었다.0196)韓永愚,<朝鮮時代 中人의 身分·階級的 性格>(≪韓國文化≫9, 서울大, 1988), 202쪽. 15세기 말부터의 이러한 현상은 그 이전에 볼 수 없는 새로운 현상으로써 사족의 기술관에 대한 차별의식에서 나온 것이며, 사족 중심의 새로운 신분질서를 예고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胥吏도 행정실무를 담당한다는 점에서 기술관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상급 서리였던 成衆官의 신분적 지위는 일반 사류와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 예컨대 그들은 호패·의복·군역제도 등에 있어서 流品朝士나 생원·진사·유음자제 등과 대체로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성중관이 錄事로 일원화된 이후로 녹사의 지위는 시대가 내려갈수록 저하되어 16세기의 중종 때 즈음 되면 녹사는 일반 사류와는 완연히 구별되는 하위 신분으로 전락되었다. 그리하여 녹사 출신자는 아무리 재능과 덕망을 겸비했다 하더라도 바로 녹사 출신이기 때문에 품관 진출이 저지되고 있었던 것이며, 반대로 녹사의 품관 진출의 폐쇄성은 일반 사류의 천시와 입속 기피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처럼 성중관 내지 녹사의 품관 진출을 봉쇄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게 하였던 가장 중요한 요인의 하나는 기술 내지 기술관을 천시하는 성리학의 발달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0197)韓永愚,<朝鮮初期의 上級胥吏와 그 地位-成衆官의 錄事로의 一元化 과정->(≪東亞文化≫10, 1971;≪朝鮮前期 社會經濟硏究≫, 乙酉文化社, 1983, 371쪽). 성종대 이후 이러한 현상도 기술천시의 풍토 속에서 사족들의 차별화에 따라 지위가 하락된 것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사족의 차별의식에 의한 차별화와 같은 관념적 현상은≪경국대전≫체제하의 법제와는 큰 거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5세기 말의 그러한 현상은 16세기 이후 더욱 촉진되기 시작하여 신분체제가 사족 중심으로 재편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특히 재지사족의 관점에서 본다면 16세기는 재지사족 중심의 새로운 신분질서가 정비되어 가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재지사족들은 향촌사회에서의 향촌지배 규약을 통해서 사족과 비사족을 구별하는 배타적 차별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이는 재지사족의 성장의 결과 혹은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鄕案·鄕規·鄕約 등을 통해서 그들 중심의 배타적 신분질서를 확립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족들을 결속시키고 사족 중심체제를 유지시키는 데에 역할을 하였던 향안은 재지사족의 신분적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향안이 상하 신분질서를 확립하는 士族案으로서의 기능은 16세기 후반에서야 가능하였다. 이는 기존의 향촌사회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향리세력을 규제하고 鄕孫의 향안참여를 배제함으로써 가능하였기 때문이다.0198)鄕孫의 향안참여 문제와 관련한 이하의 서술은 주로 다음의 글을 참고하였다.
鄭震英,<朝鮮前期 安東府 在地士族의 鄕村支配>(≪大丘史學≫27, 大邱史學會, 1984).
―――,<16, 17세기 재지사족의 향촌지배와 그 성격>(≪民族文化論叢≫10, 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1989).
재지사족과 마찬가지로 여말선초 토착세력의 후예이며, 같은 土姓의 姓貫에서 분화되어 戶長層을 세습해 온 在地吏族은 비록 군현지배자의 지위에서 지방관아의 행정사역인으로 전락하였지만 여전히 지방의 행정실무를 매개로 수령과 사족 사이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들은 吏族案인 壇案과 집무소인 府·郡司를 중심으로 독자적이고도 엄격한 조직과 체계를 확보하고 있었다. 또한 이들은 16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사족과 더불어 향안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은 士族鄕이라고 알려진 안동에서 중종 25년(1530)에 작성된<嘉靖鄕案>에 ‘鄕孫’(향리의 本孫·女壻·外孫)이 참여하고 있었던 것에서 확인된다.0199)≪安東鄕孫錄≫安東鄕孫事蹟序.

 그러나 서얼과 함께 향손의 향안 참여는 이후 사족에 의해 점차 배제되고 있었다. 이는 선조 14년(1581) 鄭士誠이 마련한 향안입록 규정을 통해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즉 서얼과 함께 향리의 直派·連派者는 반드시 4·5世를 淸族과 결혼한 연후에야 향안의 입록을 허락한다는 이 규정0200)鄭士誠,≪芝軒集≫권 3, 鄕約.
鄭震英, 앞의 글(1984), 73쪽.
은 사족과 비사족을 차별하는 사족 중심의 배타적 차별화 내지 폐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이후 선조 22년에 작성된<萬曆己丑鄕錄>0201)<(萬曆)己丑鄕錄>은 安東郡 豊川面 河回洞 永慕閣 소장으로 李樹健에 의해 소개된 바 있다(≪慶北地方古文書集成≫, 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1981, 20쪽).에서 289명의 입록자 가운데 향리 자손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데에서도 확인된다. 이것은 적어도 선조 22년에 이르러서는 재지사족이 이족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제 향안은 상하 신분질서를 확립하고 사족의 신분을 확인하는 사족안으로서 비로소 기능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것은 물론 지역에 따라 구체적인 사정을 달리하고 있었지만, 일찍부터 사족세력이 형성된 지역에 있어서조차 대체로 16세기 중·후반 이후에 이르러서야 향리세력을 배제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선조 36년(1603) ‘序’가 쓰여지는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咸州(咸安) 鄕案의 ‘立議’에서도 鄕孫의 향안 참여는 庶孼·錄事 및 閑散人 등과 함께 사족에 의해 배제되고 있었다.0202)≪咸州誌≫(國立中央圖書館, 한 62-172) 중의 咸州鄕案 立議.
金仁杰,<조선 후기 鄕案의 성격변화와 在地士族>(≪金哲埈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3), 529쪽.
이러한 향안에는 父·母·妻族에 모두 신분적 하자가 없어야 입록될 수 있었던 폐쇄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같은 향안의 기능은 향촌사회에서 기존 사족 중심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고 하겠다.0203)金仁杰, 위의 글, 531쪽. 이러한 성격과 기능을 가진 향안의 입록 규정을 통해서 확인되는 사족 중심의 배타적 신분질서는 이미 언급하였듯이 16세기 후반 이후에 이르러 확립되었고 임진왜란 직후에도 유지되었다.

 사족 중심의 신분제적 지배질서를 강요하는 또 하나의 기초로 작용한 것이 향약이었다. 16세기 후반의 栗谷鄕約을 중심으로 신분제에 관하여 살펴보면 사족들은 향약의 제특권을 배타적·독점적으로 향유하기 위하여 신분구분을 엄격히 하였으며 이는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0204)栗谷鄕約을 중심으로 신분제에 관련한 이하의 서술은 주로 다음을 참고하였다.
韓相權,<16·17세기 鄕約의 機構와 性格>(≪震檀學報≫58, 1984).

 첫째로 양반신분내에서 혈통의 순수성에 기초하여 순수 사족과 비사족으로 엄격히 변별하였다. 己卯士林들은 향약을 실시하면서 坐次를 결정하는 기준을 신분보다 年齒에 일차적인 비중을 두었다.0205)≪中宗實錄≫권 38, 중종 15년 정월 계사. 이처럼 16세기 전반의 중종대 향약이 신분보다는 연령을 중시함으로써 長幼有序라는 二倫的 질서를 강조한 반면에 상대적으로 신분적 관념이 약하였다. 이에 비하여 16세기 후반의 선조대 향약은 일차적으로 신분을 구분하고 이러한 신분제의 틀 안에서 연령을 중시하였다. 신분에 대한 이와 같은 강조는 사족들의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시도임은 물론이다. 사족들의 신분적 특권을 누리기 위한 방법은 신분간의 구분을 엄격히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양반신분내에서 순수 사족과 비사족을 변별하였다. 즉 “무릇 聚會에는 年齒에 따라 坐定하되 서얼과 비사족은 別序한다”는 것이다.0206)李 珥,≪栗谷全書≫권 16, 雜著 3, 海州鄕約 禮俗相交. 여기에서의 비사족은 “庶族의 有職者로서 사족이 아닌데도 양반이라고 일컫는 校生·忠贊衛·別侍衛와 같은 부류들”0207)李 珥,≪栗谷全書≫권 16, 雜著 3, 社倉契約束 會時坐次.로 파악된다. 이는 동일한 양반신분 안에서도 ‘사족의 서얼’이나 ‘서족의 유직자’들과 같은 비사족을 순수 사족과 먼저 일차적으로 구분한 연후에 이러한 구분선내에서 연령에 따라 좌차를 정한다는 것이다. 이로 볼 때 16세기 후반에는 신분이 연령보다 일차적인 기준으로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족과 서족이 族團的으로 구별되고, 서족으로서 관료가 된 자는 서족유직자로서 명칭을 달리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하여 사족 출신의 관료와 서족 출신의 관료는 향촌에서는 좌차도 차별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양반과 중인, 그리고 常漢이 점차적으로 분화되는 추세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0208)韓永愚,<朝鮮前期의 社會階層과 社會移動에 관한 試論>(≪東洋學≫8, 檀國大 東洋學硏究所, 1978), 254쪽. 이처럼 혈통의 순수성에 입각한 신분관을 강조하는 것은 이들 세력으로부터 오는 도전을 막고 향약의 지배력을 배타적, 독점적으로 향유하려는 사족들의 의지의 표현으로서 16세기 전반기의 사족에 비하여 신분관이 보수화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음으로는 鄕吏·書員·官屬들의 품관에 대한 능욕을 鄕所를 통하여 강력히 다스림으로써 사족들의 신분적 지위를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마지막으로 이른바 下人으로 통칭되는 양인과 천인들에 대한 지배 예속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한편으로는 신분적 지배관계를 ‘忠’, ‘悌’라는 綱常의 윤리규범으로 환치시킴으로써 교화를 통하여 지배윤리를 주입시키고자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어기는 자에게는 告官治罪, 笞刑이라는 법률적인 지배력을 구사하였다. 이처럼 사족들은 교화와 처벌을 상호 보완적으로 활용해 가면서 향촌민을 신분적으로 지배하였다.

 이와 같이 재지사족의 향촌지배 규약을 통해서 볼 때, 16세기 후반에는 사족 중심의 배타적 신분질서가 확립되었음이 확인된다. 그것은 사족들의 차별의식에 의한 순수 사족과 비사족을 족단적으로 구별하는 것이었다. 이 때 배타적 차별화의 대상은 ‘사족의 서얼’과 ‘서족의 유직자’ 그리고 향손·녹사·한산인 등이 주가 되었다. 이들은 향안입록에서 배제되거나 會時의 좌차에서 차별을 받거나 향약적 지배기구에서 차별대우를 받았다. 사족들은 이러한 배타적 차별화를 통해 그들을 반·상의 중간 신분층으로 종속시키고, 그 아래에 하인으로 통칭되는 양인과 천인들에 대한 지배와 예속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사족 중심의 신분질서 확립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같은 상하 신분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재지사족들은 각종 지배기구의 지배력을 배타적, 독점적으로 계속 향유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16세기 후반기에 사족과 비사족이 족단적으로 분화됨에 따라 이후의 신분구조는 사족양반과 서얼·서족유직자·향손·녹사·기술관·한산인 등 반·상의 중간 신분층과 상민(상한)과 천인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신분구조는 17세기에도 여전히 존속하였으며 각 신분간의 분한 등급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효종 3년(1652)에 작성된<一鄕立法>과 숙종 7년(1681)에 작성된<立法(草)>에 대한 조목별 검토를 통하여 볼 때, 燕岐지방의 사족들은 鄕員 뿐만 아니라 한산과 상한, 천민들에 이르기까지 儒鄕 중심의 향촌사회질서를 구상하고 있었다.0209)燕岐지방의 신분구조와 관련한 이하의 서술은 다음의 글을 참고하였다.
김현영,<17세기 燕岐지방의 鄕規와 향촌사회구조>(≪韓國學報≫61, 1990).
즉<일향입법>의 작성자들은 17세기 연기지방 향촌사회의 신분구조를 유향, 한산, 상한, 천민 4개의 계층으로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등급에 따라 하급계층이 상급계층을 침욕하거나, 分外의 직임을 맡는 것을 규제하였다.

 연기지방의 ‘유’와 ‘향’이 의미하는 것이 모든 지역에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향촌사회에서 이들은 법적으로는 양반층으로서 제반 특권을 부여받는 계층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의 ‘유’와 ‘향’은 그것이 구체적인 향촌질서 속에서 구별되고 있으나, ‘향’은 사족과 類를 같이 하는 양반층으로서 중인층으로 인식되고 있는 ‘한산’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존재이다.

 조선 후기의 한산이란 용어는 다양하게 쓰였는데, 無役無職의 閑遊者로서의 한산은 閑良과 같은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이러한 무역무직의 한산은 직역이 없는 한유자로서 儒業에 종사하는 경우도 있으나, 주로 弓術과 같은 무예를 익히는 부류이며, 피역을 위하여 歇役인 軍官에 冒屬하거나, 비록 종5품 判官에 限品敍用되기도 하였으나 천거를 통하여 出仕도 가능하였다. 이러한 한산층은 당시의 지식인들이 중인층으로 인식하기도 하였다.0210)李俊九,<朝鮮後期의 閑良과 그 地位>(≪國史館論叢≫5, 1989), 172∼173쪽.
―――,≪朝鮮後期身分職役變動硏究≫(一潮閣, 1993), 105∼110쪽.

 이러한 한산층에 대해서 연기의 향규는 관속들과 함께 자기(유향)들의 향촌사회 지배권에 도전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지목하고 이를 규제하는 조목들을 설정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한산층을 규제하면서도, 또 그 아래에 상한층을 설정하여 상한층이 한산층에 도전하는 것도 규제하였다. 이러한 규제는 기존의 유향 중심의 신분질서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것일 뿐 아니라 각 신분간의 분한 등급을 분명히 하고자 한 것이었다.

 17세기 중반 이후 연기지방의 위와 같은 4분적 신분구조는 그것이 비록 일향에 국한된 것이긴 하지만 당시 향촌사회에서 통행하는 신분질서로 이해된다. 즉 17세기 중반의 실학자 柳馨遠은 양반과 중인을 분명히 구별하고 있다.

양반은 大夫·士의 자손과 족속들이다. 우리 나라 제도에는 오직 대부·사의 족속이라야 문무관의 正職에 참여할 수 있으므로 속칭 양반이라고 한다. 庶族은 원래 庶人의 족속으로서 官序에 참여하거나 校生이 될 수 있는 사람이니 속칭 중인이라고 하며 또 閑散方外라고도 한다(柳馨遠,≪磻溪隨錄≫권 9, 敎選之制(上) 鄕約事目).

 유형원에 의하면 양반과 중인은 혈통에 따라 족단적으로 구별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참여할 수 있는 직능까지 분명히 구별하고 있다. 즉 양반사족은 문무반의 정직에 참여할 수 있는 족속이었다. 그러나 중인은 대부·사의 족속과는 혈통적으로 구별되는 존재로서 원래 서인의 족속이지만, 官序 즉 官衙와 鄕里의 학교에 참여하여 서족의 유직자가 될 수 있는 계층이었으며, 또한 한산층이었다. 이처럼 혈통과 직능까지도 구별되어진 중인층은 사족의 배타적 차별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공존하는 어느 사회에서나 피지배층의 계층상승 시도와 이에 대한 지배층의 배타적 통제, 그리고 지배층의 특권 유지를 위한 도태작용이 거듭되면서 대부분의 경우 이들 양 계층의 중간적 존재가 출현하게 됨은 필연적이며, 이러한 원리는 조선 중기 사회에서도 예외없이 적용되었다. 즉 양반과 상민의 중간층의 출현은 이러한 원리상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그들 계층은 그들에게 알맞는 직역을 제도권 안에서 확보하고자 하였고, 이 관점에서 반·상의 중간층으로서의 중인 신분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사족들의 배타적 차별화의 대상이 되었던 서족유직자·서얼·향손·녹사·기술관 등 비사족은 점차 족단적으로 차별되어 중인층화되어 갔다. 이는 결국 사회적 평가의 결과 家系의 위신이 양반사족에 비하여 낮게 평가되어 형성된 신분층이었다.0211)池承鐘,<身分槪念定立을 위한 試論>(≪한국 고·중세 사회의 구조와 변동≫, 한국사회사연구회 논문집 11, 文學과 知性社, 1988), 88쪽. 양반과 상민의 중간에 위치하는 광범위한 중간계층을 의미하는 중인층은 務本抑末이라는 유교적 이념에서 생겨난 기술천시의 풍토 속에 신분이 하락되었던 기술직·이서, 정통·비정통을 철저하게 가리는 성리학적 명분론에서 연유한 嫡庶관념에서 도태된 서얼로 구성될 뿐 아니라,0212)鄭玉子,<朝鮮後期의 技術職中人>(≪震檀學報≫61, 1986), 45쪽. 서족의 유직자 또는 한산층으로 간주되는 忠贊·忠順·忠翊·忠壯·定虜 등 衛屬과 校生·武學·(常)出身·軍官·閑良 등의 다양한 직역을 포괄하고 있다.0213)李俊九,<朝鮮後期 兩班身分移動에 관한 硏究>(上·下)(≪歷史學報≫96·97, 1982·1983).
―――, 앞의 책, 32쪽.
이러한 중인층은 사회의 진전에 따라 점차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상민층으로부터 신분을 상승시킨 성취적 중인층 혹은 冒屬 중인층으로서의 한유자층이 증가하면서0214)金盛祐,<17·18세기 前半 ‘閑遊者’層의 증가와 정부의 대책>(≪民族文化硏究≫25, 高麗大, 1992), 273∼274쪽. 중인 범위가 더욱 두터워지고 복잡해져 갔다.

 따라서 16세기 후반 이후에는 사족 중심 신분질서의 확립과 더불어 반·상의 중간 신분층이 형성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17세기 초 인조 때부터는 중인이라는 용어의 사용과0215)韓永愚,<朝鮮後期 ‘中人’에 대하여-哲宗朝 中人通淸運動資料를 중심으로->(≪韓國學報≫45, 1986), 73쪽.
한영우는 중인뿐만 아니라 특권적 지배신분으로서의 양반도 16세기의 과도기를 거쳐서 17세기에 뚜렷하게 성립되었다는 견해를 이미 1978년에 밝힌 바 있다(韓永愚, 앞의 글, 1978).
함께 양반, 중인, 상민, 천인의 4신분층을 골간으로 하는 신분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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