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4. 사족지배체제하의 신분질서
  • 3) 각 신분의 존재 양상

3) 각 신분의 존재 양상

 조선 중기의 각 신분은 향촌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비율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각각 어떠한 양상으로 존재하고 있었는가.

 조선왕조는 身分職役制를 포기한 적이 없이 존속하여 왔다. 조선시대의 각 개인(남자)은 원칙적으로 屬處가 있어야 했고, 이 속처를 직역으로 하였으며, 신분적 지위에 걸맞는 직역이 제도권내에서 결정되거나 이를 확보하려고 하였는데, 직역에 따른 권리·의무상의 차등이 법제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개인의 신분적 지위는 직역의 여하에 따라 파악할 수 있다. 이는 개인이 소속한 직역의 신분개념이 곧 개인과 집단의 법제적·사회적 불평등의 주요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역은 신분을 판정하는 유력한 수단의 하나이므로, 帳籍에 기재된 직역을 통하여 신분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존하고 있는≪山陰帳籍≫과≪丹城帳籍≫을 통하여 조선 중기 단성지역의 각 신분의 구성비를 보면<표 3>과 같다.0252)李俊九, 앞의 책, 212쪽의<표 7-1> 참조.

시기\신분 양반 중인 상민 노비 직역無記
선조 39년(1606) 43.5(93) 3.7(8) 29.4(63) 17.8(38) 5.6(12) 100.0(214)
숙종 4년(1678) 13.1(277) 4.4(94) 35.1(743) 46.8(991) 0.5(11) 99.0(2116)
숙종 43년(1717) 18.6(466) 8.6(216) 45.6(1145) 26.1(656) 1.1(28) 100.0(2511)

<표 3>조선 중기 단성현의 호주 신분구성비 (단위:%(호주수))

1) 선조 39년 호적은≪山陰帳籍≫6개 里 가운데 法勿也里의 호적이 파손되어 파악하지 못하였다.
2) 직역無記에는 일부 판독불명도 포함된 수치이다.

 우선 각 신분의 구성비를 나타내고 있는<표 3>의 수치가 시사하고 있는 바의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표에서 주목되는 것은 선조 39년 호적에서 양반호가 전체의 43.5%를, 노비호가 17.8%를 각각 점하고 있어 그 구성비로 볼 때 그 뒤의 式年호적과 크게 다르다는 점이다. 즉 선조 39년 호적에서 양반호와 노비호의 구성비는 그로부터 72년이 지난 숙종 4년 호적에서의 양반호가 13.1%를, 노비호가 46.8%를 각각 나타내고 있는 현상과 크게 비교된다. 이는 그 동안에 양반호의 격감과 노비호의 격증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같은 현상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선조 39년 장적에서 양반호의 구성비가 높고 노비호의 구성비가 낮은 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작용하였으리라 여겨진다. 그것은 우선 선조 39년의≪산음장적≫6개 里 가운데 같은 지역의 후대 호적과 비교하면 양반호가 적고 상민호가 가장 많았던 法勿也里의 호적이 파손되어 파악이 전혀 불가능한데, 이것이 양반호의 상대적 구성비를 높이고 있다. 다음으로 선조 39년의 양반호 가운데 군공 및 납속에 의한 품직취득자의 구성비(17.3%)가 숙종 4년(1%)·숙종 43년(1.6%)에 비해 월등히 높은 점과, 전란 과정에서 타처로 피신하였던 인구중 족적·경제적 기반을 이곳에 두고 있었던 양반은 전후 본거지로 빨리 귀환한 반면에 그렇지 못한 常·賤은 서서히 귀환한 점 등이 양반호의 상대적 구성비를 높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0253)李俊九, 위의 책, 211∼213쪽.

 이처럼 불완전한 장적의 파악과 임진왜란을 직접 경험하였던 지역적 특성 등이 반영된 현상으로 인하여 선조 39년 호적에서는 양반호의 구성비가 높고 노비호의 구성비가 낮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들과<표 4>에서 확인되는 광해군 원년(1609) 울산지역의 각 신분구성비를 감안한다면 임란 직후인 17세기 초반 단성지역의 신분구성비를 전국적인 보편현상으로 일반화시키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구분\신분 양반 상민(양인) 노비
蔚山戶籍(1609년) 10.5(115) 62.0(683) 27.5(303) 100.0(1,101)
北部戶籍(1663년) 16.6(113) 30.0(205) 53.3(363) 99.9(681)
金化戶籍(1672년) 14.2(34) 75.0(179) 10.8(25) 100.0(238)
大丘戶籍(1690년) 9.2(290) 53.7(1,694) 37.1(1,172) 100.0(3,156)

<표 4>조선 중기 각 지역의 호주 신분구성비 (단위:%(호주수))

 한편 임란 이후 격심했던 호구의 이동이 점차 안정되어 가던 17세기 후반의 경우, 단성지역의 신분구성비(1678년)는<표 3>에서와 같이 양반이 13.1%, 중인이 4.4%, 상민이 35.1%, 노비가 46.8%를 나타내고 있다. 이같은 각 신분의 구성비는<표 4>를 통해서 확인되는바,0254)본 표는 아래의 글 참조.
韓榮國,<朝鮮 中葉의 奴婢結婚樣態(上·下)>(≪歷史學報≫75·76, 77, 1977, 1978), 183∼185쪽.
E. W. Wagner,<17세기 朝鮮의 社會階層-1663년의 서울 北部戶籍을 중심으로->(≪朝鮮身分史硏究≫, 梨花女大史學科硏究室 編譯, 法文社, 1987), 180∼189쪽.
S. Shin,<17세기 金化地域의 社會構造>(≪朝鮮身分史硏究≫), 160쪽.
四方博,<李朝人口に關する身分階級別的觀察>(≪朝鮮經濟の硏究≫3, 京城帝國大學 法學論集 10, 1938), 신분별 戶數를 참조하여 만든 표이다.
서울 북부지역·금화지역 대구지역 등과 비교할 때, 특히 금화지역이 양인의 구성비(75.0%)가 대단히 높고 노비의 구성비(10.8%)가 대단히 낮은 수치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17세기 후반의 신분별 구성양상도 각 지역에 따라 그 차이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물론 신분을 분류하는 기준이 다르고, 시기의 차이, 도시지역 및 농촌지역의 차이 등이 고려되어야 하겠으나 나타난 수치만을 참조할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좌우간<표 3>과<표 4>에서 확인되는 각 신분의 구성비 가운데 시기적·지역적 특수성이 강하게 반영된 단성지역(1606년)과 금화지역(1672년)을 제외한다면, 17세기의 각 신분은 대체로 양반호가 9.2%∼16.6%, 중인호가 3.7%∼4.4%, 상민호가 30.0%∼62.0%, 노비호가 27.5%∼53.3% 정도로 구성되어 있는 셈이 된다.

 이와 같은 비율로 구성되어 있었던 양반·중인·상민·노비 등 각 신분은 그들이 향촌사회에서 각각 어떠한 양상으로 존재하고 있었을까.

 우선 재지사족의 존재양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재지사족은 科擧, 蔭敍, 代加의 혜택을 입어 實職 또는 散職을 얻음으로써 관직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들중에는 無職·無蔭의 양반인 幼學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조선 중기의 향안등재자의 직역별 통계에서 실직·산직과 有蔭인 忠義·忠贊·忠順衛 등 직역에 비해 무음·무직인 유학(學生)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에서 확인된다. 즉 安東향안 등재자의 경우 유학이 선조 22년(1589)에는 전체의 61.6%, 숙종 33년(1707)에는 전체의 75.2%를 각각 차지하였으며, 尙州향안 등재자의 경우 유학이 16세기에는 전체의 43.8%, 17세기에는 전체의 76.0%를 각각 차지하고 있다.0255)李樹健, 앞의 글, 15쪽의<表 2>와 16쪽의<表 3>참조. 또한 1621년부터 1707년까지 작성된 丹城향안 등재자의 경우 유학(149)이 전체(303)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데, 특히 17세기 중반 이후에는 불과 몇 명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유학을 직역으로 가진 자들이 등재되어 있다.0256)가와시마 후지야,<「丹城鄕案」에 대하여>(≪淸溪史學≫4, 1987), 203쪽의<표 4>참조. 이처럼 재지사족 가운데는 무음·무직의 유학과 微官, 散職, 生進의 직함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해당 읍의 향안에 등재하여 재지사족으로서의 신분을 보장받음으로써 그들의 신분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각 고을의 전직관료·생원·진사·유학 등을 중심으로 한 재지사족들은 그들이 향촌지배 조직과 규약을 통하여 신분·계급적 이해를 관철시켜 나갔으며, 피지배층에 대해 배타적으로 제특권을 누리면서 존재하고 있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그들은 留鄕所·鄕案·鄕約·洞約·洞契 등을 만들어 운영하였다. 이는 재지사족들이 군현 단위에서 관권과의 일정한 양보와 타협 아래 향권을 장악하고 지배적 지위를 유지하는 데 있어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조직과 규약을 통해 그들은 신분적인 상하관계와 경제적인 지주·전호제의 안정적 유지, 그리고 부세운영에서 양반으로서의 신분적인 특권의 확보라는 사족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었다.0257)金仁杰, 앞의 글(1984), 141쪽.
韓相權, 앞의 글(1984), 66쪽.
鄭震英,<16·17세기 재지사족의 향촌지배와 그성격>(≪民族文化論叢≫10, 1989), 107쪽.
또한 서원과 향교는 성리학을 보급함으로써 지배이념을 전파하였고 아울러 사족이 자연스럽게 결집할 수 있는 터를 마련해 줌으로써 사족의 향촌지배를 보완하였는데, 이의 교육적 기능과 族契에서의 자제교육의 강조를 통해 재지사족들은 향촌지배층으로서의 위치를 재생산하고 있었다.0258)金武鎭,<조선중기 士族層의 동향과 鄕約의 성격>(≪韓國史硏究≫55, 1986), 23쪽.

 그리고 재지사족들은 조상 전래의 토지와 노비, 가사를 소유하고 있었고 거기에다 매득·개간·증여 등의 수단을 통하여 재산을 증식시키고 있었다. 그들의 田民(토지와 노비) 증식 방법은 다양한 형태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첫째로 父·母·妻邊에서 전래되는, 즉 상속과 분배 및 기타 친척으로부터 受贈하는 경우, 둘째로 새 터전(卜居)을 잡거나 개간에 의한 새 가사와 전답의 확보, 셋째로 이러한 기반 위에서 매득하거나 증식하는 경우 등의 다양한 형태였다.0259)李樹健, 앞의 글(1987), 65쪽.
―――,<嶺南士林派의 在地的 基盤>(≪新羅伽倻文化≫12, 1981), 53쪽.
특히 그들은 그들 소유의 노비들을 良賤交婚시켜 노비를 증식시키는 것도 노비증식의 중요한 방법의 하나였다.

 재지사족들은 이러한 형태에 의해 취득되어진 토지와 노비를 경영하면서 대체로 중소지주로서의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었으나 한미한 처지의 재지사족도 많았다. 그들이 보유한 토지와 노비의 규모를 보면 다양하다. 16세기의 分財記에서 확인되는 그들의 토지보유 규모는 최대 2,312두락에 이르기까지 그 규모가 다양한데, 그 적은 규모에서조차도 양인이나 노비들보다 월등한 크기의 규모를 보유하고 있었다. 노비보유 규모에 있어서도 757口를 보유한 월등한 재지사족의 경우도 있었지만,0260)李榮薰,<古文書를 통해 본 朝鮮前期 奴婢의 經濟的 性格>(≪韓國史學≫9, 1987), 107∼108쪽. 17세기≪山陰帳籍≫에 나타난 양반의 노비보유는 영세한 규모이다. 즉 노비를 보유한 양반 가운데 55%가 1∼2구의 미소한 규모였고 86%가 5구 이하의 규모였다. 2%의 양반만이 21구 이상의 보유규모를 보이고 있었다.0261)崔在錫,<朝鮮前期의 家族形態>(≪震檀學報≫37, 1974), 145쪽의<表 6>참조. 이와 같이 같은 재지사족의 위치에 있더라도 단지 몇 명의 노비만을 보유한 한미한 처지의 재지사족도 많았던 것이다.

 재지사족들이 보유한 토지와 노비는 대규모의 경우 전국 각처에 분포되어 있었으나, 주로 거주지를 중심하여 부근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이는 혼인으로 인한 妻邊·外邊의 전민과 買得·別得·墓所·移居 등의 원인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효율적인 토지경영을 위해 外地田畓을 점차 거주지 중심으로 집적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17세기부터는 부재지주에서 재지지주로 전환되어 갔다. 또한 그들은 17세기 전반까지는 자녀균분을 원칙으로 하여 토지와 노비를 상속하고 있었으며, 대체로 자녀에게 분할주의를 지켜 분배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0262)李樹健, 앞의 글(1987), 70∼71쪽.
―――,<朝鮮前期의 社會移動과 相續制度>(≪歷史學報≫129, 1991), 50∼57쪽.
李榮薰, 앞의 글, 124∼129쪽.

 그들의 거주지는 邑治의 외곽지대에 있었다. 그들은 川防과 이앙법이 보급되는 16세기부터 川流와 계곡을 따라 사족집거촌을 이루고 살았는데, 17세기 전반까지는 자녀균분상속제와 자녀윤회봉사가 철저히 시행되고 있었으므로 촌락주민의 구성도 자연히 異姓集居村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17세기 후반부터 자녀균분제의 해소와 함께 점차 부계 중심의 동성동본이 집거하는 동족부락을 형성하게 되었다.0263)李樹健,<古文書를 통해 본 朝鮮朝社會史의 一硏究>(≪韓國史學≫9, 1987), 82∼83쪽. 그들의 주거형태는 豪大한 瓦家를 중심으로 주변에 奴家들이 밀집해 있는 소집락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한편 대규모의 노비와 토지의 보유는 田宅을 단위구성으로 하여 분산적으로 배치된 형태를 취하였는데, 그들의 가사와 토지가 결합된 전택으로서의 존재형태는 일반적으로 일정한 규모의 노비를 포섭하였고, 노비의 노동력을 기초로 직영적 농업경영을 영위하였으며, 또 直營分 이외의 토지는 그 노비를 포함한 소작농들에게 소작지로 대여하였다.0264)李榮薰, 앞의 글, 152쪽. 이러한 각 전택은 主家의 직영적 농업경영과 여분의 토지를 소작지로 방출하는 지주제의 결합으로 공통의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재지사족들은 身分內婚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양반사족의 신분내혼은 17세기의 장적에서 명확히 확인된다. 즉 당시 부녀자의 호칭 가운데 ‘氏’ 호칭은 양반부녀자를 지칭하였다. 그런데 부녀자의 호칭은 夫職(남편)에 준하는 것이 아니라 친가의 姓에 결합되어 ‘親父’의 신분과 庶孼從母의 원칙에 준하였다. 그러므로 양반의 처가 ‘씨’를 호칭한다는 것은 신분내혼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양반의 처가 ‘씨’를 호칭한 비율을 보면, 선조 39년(1606)의≪산음장적≫에는 89.1%, 숙종 4년(1678)의≪단성장적≫에는 94.3%를 각각 나타내고 있다.0265)李俊九, 앞의 책, 235∼236쪽. 이는 곧 양반의 신분내혼이 보편화된 사회였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다음으로 사족의 배타적 차별화 과정에서 형성된 중인층은 ‘庶族有職者’·‘庶孼’·‘鄕孫’·‘技術官’·‘錄事’·‘閑散人’ 등이었다. 그러나 향촌사회에 있어서의 중인층으로는 고급 기술관과 녹사가 제외된 서족유직자·한산인·서얼·향리 등이 주로 존재하고 있었다. 서족의 유직자는 校生·忠贊衛·別侍衛와 같은 부류들이었으며, 한산인은 직역이 없는 閑遊者로서 한량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였다. 이들 교생·충찬위·별시위·한량 이외에도 서족의 유직자로는 忠義衛를 제외한 忠順衛·忠翊衛·忠壯衛·定虜衛 등 衛屬과 武學·(常)出身·軍官 등이 17세기의 장적상에서 확인된다.

 17세기 이후 서족의 유직자 또는 한산층 가운데, 교생은 주로 평민의 상층부·서얼·납속수첩자들이 각각 교생이 되고 있었다.0266)尹熙勉,≪朝鮮後期 鄕校硏究≫(一潮閣, 1990), 74쪽. 그리고 충순위는 유음자손이 입속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상한 출신 및 그 子枝가 주로 입속하였고, 충찬위는 주로 원종공신의 支派 내지 庶派가, 충익위는 주로 원종공신 및 그 長派가, 충장위는 주로 戰亡者 및 납속수첩자가 각각 입속하였으며, 정로위는 주로 한량이 입속하거나 正兵을 시취하여 升屬시켰다. 무학은 원래 양반의 자제들이 입속하였으나 인조대에는 落講校生을 降屬시키기도 하였으며, 주로 中人輩가 입속하다가 상민층도 모속하였다. 한량은 본래 군안뿐만 아니라 호적에도 입록하지 않은 漏籍閑遊者로서 弓術과 같은 무예를 익히는 무리였으며, 武科擧子들이 과시에서 한량을 錄名하였는데 그 수가 인조·효종대에는 2천이 넘었다.0267)충순위·충찬위·충익위·충장위·무학·한량·업유·업무 등 직역에 대해서는 李俊九, 앞의 책 참조. 군관은 한량·납속수첩자·千摠·把摠·出身 등이 兵房軍官·禮房軍官이 되고 있었다.0268)李勛相,<朝鮮後期 吏胥集團과 武任集團의 組織運營과 그 特性-全羅道 南原의 各種 先生案->(≪韓國學論集≫17, 啓明大 韓國學硏究院, 1990)「附錄」B,≪軍官廳先生案≫참조. 이러한 직역을 가진 자들 가운데는 원래 사족인 경우도 있었으나 주로 중인층이었다. 그들은 有蔭이거나 아니면 경제력을 바탕으로 성장하여 그들에게 알맞는 직역을 제도권내에서 확보하고자 하였는데, 그것이 곧 중인직역이었으며 넓은 의미의 한산층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한산층에 대해서 17세기 중엽의 鄕規는 관속들과 함께 재지사족들의 향촌사회 지배권에 도전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지목하고 이를 규제하는 조목들을 설정하고 있었으며,0269)김현영, 앞의 글, 143∼144쪽. 이미 그들은 16세기 후반부터 향안입록에서 배제되거나 會時의 좌차에서 차별을 받거나 향약적 지배기구에서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이와 같은 중인직역을 확보한 자들은 향촌사회에서 일시적 면역 및 歇役으로 한유하면서 존재하고 있었다. 교생은 군역을 면제받는 대신 향교나 군현에서 각종의 일을 담당해야 하는 일종의 역담당자였으며, 校生考講에서 再落하면 定軍하였던 것이다.0270)尹熙勉, 앞의 책, 60·139쪽. 충익위·충장위·업유·업무·무학 등은 인조대에 規外免軍者였으며,0271)≪仁祖實錄≫권 19, 인조 6년 12월 신묘. 효종년간에도 한량·출신·업무·무학 등은 身役이 없는 직역으로 파악되었다.0272)≪備邊司謄錄≫18책, 효종 7년 9월 2일. 그러나 현종대에는 충순위·충익위·충찬위·정로위·무학 등 諸衛의 역이 종년토록 한유하고 겨우 正木 2필만을 부담하여 실역을 부담하는 水·陸·砲保에 비하면 하늘과 땅의 차이0273)≪承政院日記≫186책, 현종 5년 11월 8일.였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들은 한때 군역이 면제되기도 하였으나 헐역을 부담하면서 한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한산 즉 한량은 그 소수가 17세기 말부터 호적에 입록되기로 하였지만, 본래 役賦課의 기본대장인 군안과 호적에 입록하지 않고 無役閑遊하고 있던 부류였고, 그 수 또한 대단히 많았다. 이 때문에 양역 부족의 한 요인이 되었던 만큼, 조정은 이를 막기 위하여 한량을 양역에 충정하라는 원칙적인 명령을 내리곤 하였다. 이로 인해 한량들이 전혀 속처없이 한유하기가 어렵게 되자 이들은 군관에 투속하였는데, 당시의 군관은 1년에 한두 차례 관청에 얼굴을 내비치고는 종신토록 군역을 면제받은 헐역이었다.0274)李俊九, 앞의 글(1989), 162∼165쪽. 이와 같은 직역들은 그 역이 헐역이었기 때문에 有役下層民들의 모속을 유도하게 되었고, 따라서 하층민들의 신분상승의 階梯的 역할도 하고 있었다.

 서얼은 장적상에서 庶子·良妾子·許通 등으로 등재되다가 원래 양반직역의 하나였던 業儒·業武가 숙종 22년부터 서얼의 문무를 지칭하는 직역으로 규정되면서 업유·업무로 등재하고 있었다.0275)李俊九, 앞의 글(1985), 참조. 서얼도 사족 지배하의 향촌사회에 있어서 서족의 유직자와 마찬가지로 향안입록에서 배제되거나 회시의 좌차에서 순수 사족과 변별되었고, 洞案 작성시 사족안인 上契案에 기재되더라도 嫡子와는 달리 南行으로 구별되고 있었으며,0276)金仁杰, 앞의 글(1984), 121쪽. 향교의 額內校生으로도 입학하고 있었으나 東齋儒生과는 달리 西齋校生이라 하여 사족과 구별되고 있었다.0277)尹熙勉, 앞의 책, 47쪽. 한편 허통한 서얼은 문무과 및 소과에도 응시할 수 있었다.0278)裵在弘,<조선후기 서얼 과거합격자의 成分과 官歷>(≪朝鮮史硏究≫2, 1993), 190∼192쪽. 임진왜란 이후 허통한 서얼이 과거에 응시할 때에는 ‘허통’을 錄名해야 하였으나, 숙종 22년(1696)부터 완전 허통이 이루어지면서 문과 및 소과에서는 ‘업유’로, 무과에서는 ‘업무’로 녹명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서얼의 직역인 업유·업무는 군역이 없었으므로 그들이 한유하였기 때문에 유역하층민들의 피역을 위한 모속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鄕吏는≪단성장적≫각 式年 말미의 직역통계에서 戶長·記官만을 포함하고 있으나 貢生·醫生·律生 등도 상급 관속에 포함된다.0279)향리·武任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였다.
김필동,<朝鮮後期 地方吏胥集團의 組織構造(上·下)>(≪韓國學報≫28·29, 1982).
李樹健,≪朝鮮時代 地方行政史≫(民音社, 1989).
鄭震英, 앞의 글(1989).
李勛相,≪朝鮮後期의 鄕吏≫(一潮閣, 1990).
―――, 앞의 글.
李羲權,<朝鮮後期 邑吏의 地方統治 行政機能>(≪全北史學≫15, 1992).
호장과 기관층을 세습하면서 한 읍의 향리세계를 영도해 갔던 유력한 재지이족들은 사족과 더불어 16세기 초의 향안에도 참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이후 사족 지배체제하의 향안에서는 완전 배제되고 있었으며, 각종 향규에서는 규제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이들은 吏族案인 壇案과 집무소인 邑司를 중심으로 作廳·將官廳·使令廳 등 다양한 조직과 체계를 확보하고 있었는데, 각 房任別로 읍리들이 업무를 분장하고 있었으며, 上計吏·貢吏(進捧吏)·京邸吏·營吏 등의 조직을 통해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한편 지역에 따라서는 향리집단이나 武任집단의 퇴임자들로 구성된 養老堂이 있었는데, 그들은 관속의 인사에 관여하거나 군현 단위의 제례 및 신앙과 관련한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한 것에는 社稷壇이나 城隍堂, 임란 이후 숭배대상이 된 關王廟 등의 제례집행 등이 있다. 이는 읍치 중심으로 수행되었으며, 동시에 관속을 구심점으로 운영된 제례였다.

 이와 같이 서족의 유직자와 서얼, 상급 관속으로서의 향리와 무임을 포함한 중인층이 각 신분에서 차지하는 구성비는 단성현의 경우<표 3>과 같이 선조 39년(1606)에 3.7%, 숙종 4년(1678)에 4.4%, 숙종 43년에 8.6%로 점차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다음으로 상민층은 장적상에 있어서 각종의 軍兵·徭役·保人·匠人·下級衙前·驛屬人과 기타 役名이 없는 良人·居士·病人 등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직역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전형적인 상민층은 기타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형태로든 역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 상민층은 비록 역명이 다를지라도 기본적으로는 능력에 따라 토지를 경작하고 있던 농민들이었다. 이는 16세기 장인의 경우 전답을 放賣하거나 品官과 土民에게 전지를 侵占당했던 사례에서도 확인된다.0280)鄭震英,<16세기 鄕村問題와 在地士族의 대응>(≪民族文化論叢≫7, 1986), 109∼110쪽.

 그들 상민층은 국가의 각종 수취 대상이 되었는데, 그들은 토지를 대상으로 부과하는 전세, 양인 장정의 인신을 대상으로 하는 군역, 토지소유를 기준으로 하는 요역, 다시 토지·호구의 복합 기준에다 分定하는 호역으로서의 공물, 그리고 원래는 농민에 대한 진휼제도로 시작하였지만 점차 강제적 고리대로 변질해 간 환곡 등을 부담하고 있었다. 16세기 이래로 토호의 겸병과 고리대 운영, 그리고 전세를 제외한 군역·요역·공물 등의 부담이 점차 가중되어 갔고, 군현별로 定額制에 따라 야기되는 족징·인징이라는 분외의 수탈 등이 상민층에게 집중 부과되면서 상민층은 과중한 국역부담을 견디지 못하여 점차 파산해 갔다. 이로 인해 가난한 상민들은 ‘富家의 長利’로 연명하다가 전답으로 상환하거나 放賣하기도 했으며 전호·협호가 되거나 노비화의 길을 걷기도 하는 한편 피역·유망·代立 등의 저항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였다.0281)金泰永,<朝鮮時代 農民의 社會的 地位>(≪韓國史市民講座≫6, 一潮閣, 1990), 63∼68쪽.
鄭震英, 앞의 글(1986), 94쪽.
그래서 그들은 노비와 함께 그들의 안정을 바탕으로 존립하고 있던 재지사족들에 의해 교화와 부세운영의 직접적인 지배의 대상이 되었다.

 많은 상민들은 16세기 이래 임란 이후에도 파산과 저항, 그리고 유망이 급증하는 등 열악한 사회·경제적 환경 때문에 移居·移入의 빈도가 높아, 한 촌락에서 여러 대를 지속하며 머무를 정도의 안정된 주거기반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0282)李俊九, 앞의 책, 212쪽의 註 5.
鄭勝謨,<朝鮮後期 丹城縣의 身分構成比變化와 그 動因>(≪泰東古典硏究≫9, 1992), 93쪽.
그러나 상민층의 일부는 임란 후 황폐한 농토를 다시 개간하고 수리시설을 복구했으며 농업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영농방법을 개선하고 소득을 높이기 위해 새로운 작물을 개발하면서 부농층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농민의 경영자립도가 점차 높아지고 전호농민에 대한 신분적 수탈이 어렵게 되어가면서 농가경제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고, 그에 따라 장시를 중심으로 하는 농촌상업이 발달하였다. 상민들은 생산물의 일부를 장시에 내다 팔았는데, 쌀과 베가 거래수단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성장과 정부의 제도적 조처에 편승한 일부 상민층은 군공·납속 등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 신분직역의 상승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도 상민층은 주로 신분내혼이 행해지고 있었으나 ‘婢’와의 양천교혼도 하면서 존재하고 있었다.≪단성장적≫에서 확인되는 상민층의 妻의 호칭은 선조 39년(1606)의 경우 ‘姓+氏’가 14.0%, ‘姓+召史’가 55.8%, ‘良女+名’이 14.0%, ‘婢+名’이 16.3%로 나타나 있다. 숙종 4년(1678)의 경우 ‘姓+召史’가 27.8%, ‘良女+姓+召史’가 16.5%, ‘良女+名’이 32.8%, ‘驛女+名’이 2.4%, ‘婢+名’이 20.4%로 나타나 있다.0283)李俊九, 앞의 책,<附表 1>·<附表 3>참조. 이것으로 볼 때 17세기의 상민층은 상민부녀자를 지칭하는 ‘소사’ 내지 이름 앞에 ‘양녀’·‘역녀’ 등의 단서를 붙일 수 있는 상민층 집안과 신분내혼을 주로 행하고 있었으나 한편 ‘婢’와의 양천교혼도 하면서 존재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끝으로 노비는 일반적으로 그 소유주가 국가기관이면 公奴婢, 개인이면 私奴婢로 구별된다. 또한 공노비는 그 소속된 관청에 따라 寺奴婢·官奴婢·內奴婢·驛奴婢·校奴婢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사노비는 그 존재형태에 따라 率居노비와 外居노비의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그들 공사노비는 국가기관과 주가에 대한 부담 형태로써 직접 勞役에 종사하거나 身貢을 바치게 되어 있었다.0284)李成茂,<朝鮮時代 奴婢의 身分的 地位>(≪韓國史學≫9, 1987), 216쪽.

 사노비는 종래 金錫亨으로 대표되는 통설이 그들의 존재형태를 단순히 주가와의 거주지역의 원근에 따라 솔거와 외거로 구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래에는 사노비의 존재형태를 거주지역과 상관없이 주가의 家內使喚과 농업경영에 사역되는 노비를 ‘솔거노비=仰役노비’, 신공만을 바치는 노비를 ‘외거노비=納貢노비’로 파악하고 있다.0285)李榮薰, 앞의 글, 166쪽.
―――,<朝鮮社會 率居·外居奴婢區分再考>(≪韓國近代經濟史硏究의 成果≫, 螢雪出版社, 1989).
또한 주가에 직접 신역을 바치는 솔거노비와 현물의 형태로 된 신공을 바치는 외거노비로 구분하고, 솔거노비를 다시 ‘가내사환노비’와 ‘率下노비’로 나누고 있는데,0286)李鎬澈,≪朝鮮前期農業經濟史≫(한길사, 1986), 445쪽. 전자는 주로 주가의 가사노동에 종사하는 존재들이었으며, 후자는 주가의 인근에 거주하면서 주가의 농장경영에 주로 부역노동의 형태로 사역되는 존재들이었다.

 이와 같이 근래에는 주가에 대한 부담형태인 사역과 납공의 여부에 따라 사노비의 존재형태를 솔거와 외거로 구분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솔거노비는 그 주거형태에 있어서 주가에 포섭되거나 직접적으로 연접해 있는 형태였음이 그 전형이었으며, 古文書에서 확인되는바 솔거노비의 비중이 16세기에는 대개 73∼86%의 압도적 다수였음에 비해 17세기에는 20∼50%의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17세기 초(1609) 울산호적에서는 사노비의 52.5%가 솔거노비였다. 그들 중 소수는 가족구성과 농업경영이 결여된 채 주가에 의한 각종 사역과 직접적 급양하에 놓여 있었으나, 나머지 다수의 경우 독자적인 가족구성과 소농민경영의 담당자로 존재하고 있었다. 외거노비는 그 대부분의 경우 주가의 토지경작과는 무관하게 별도의 自己經理를 보유하면서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상적인 형태의 가족구성으로 존재하였으며, 또한 주가의 것이 아닌 가사와 토지, 나아가 노비조차 소유하고 있었다. 주가의 토지경작과 무관하게 존재했던 그들이 주가에 대해 부담했던 것은 노비신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신공과 선물이었다. 해남윤씨가문의 경우 布納인 元貢은 공노비의 예에 따라 수납되었는데, 대체로 16세기에는 노와 비를 불문하고 각각 常木 1필이었던 것이 16세기 말∼17세기 초에는 노비 공히 平木 2필로 수납되다가 17세기 중반에는 노 2필, 비 1필반으로, 17세기 말에는 다시 무명(綿布) 2필로 환원되었다. 餘貢인 선물은 上典家의 자의대로 백미·참깨·신발·미역·전복 등 생활 전반에 걸친 품목이 수취되었으며, 광해군 13년(1621) 신공문기에는 放役된 老奴婢에게까지도 이 선물을 거둬들이고 있었다.0287)安承俊,<16∼18세기 海南尹氏家門의 土地·奴婢所有實態와 經營>(≪淸溪史學≫6, 1989).

 사노비 가운데 특히 사환노비는 상전의 사치노비로 존재하였다. 그들의 역할은 상전의 일체 노동을 대신하는 것으로 祠堂屬, 墓直, 薪水, 炊事, 舂精, 轎前奴, 편지나 서책 등 전달, 농기구 제작, 청소, 세탁, 유모, 여행·仕宦·귀양시 수행, 婢妾, 매매·收貢 대행 등등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幹奴·舍音奴·首奴 등은 상전의 지시를 받아 집 안팎의 대소사를 총괄하고 있었다.0288)金容晩,<朝鮮時代 私奴婢의 存在形態 一硏究>(≪民族文化論叢≫11, 1990), 126∼127쪽. 그리고 私奴는 원래 군역을 부담하지 않았으나 束伍軍·縫燧軍·牙兵·禁衛保 등 帶役者들이 17세기 후반의 장적상에서 확인된다.

 국가기관에 소속된 공노비는 그 속처에 따라 부담형태가 달랐다. 공노비 가운데 內·寺노비는 정기적인 選上立役과 납공을 교대로 강요당했으며, 관노비는 郡縣·鎭營 등 지방관아에, 역노비는 驛站에, 교노비는 향교에 각각 입역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공노비의 선상·입역제는 16세기 이래 양역과 마찬가지로 대립·납포제가 널리 시행되다가 17세기 이후 전면 폐지되었다. 이에 따라 이제 그들은 국가에 대한 노동력 제공의 의무에서 벗어나 신공납부의 의무만을 부담하고 있었으며 대부분 소속 官司의 有土와는 무관하게 거주하고 있었다.0289)全炯澤,≪朝鮮後期 奴婢身分硏究≫(一潮閣, 1989), 86∼94쪽. 광해군 원년(1609)의 울산호적에서 확인되는바 공노비는 그 구성비가 전체(3,226명)의 8.9%(287명)를 점하고 있다.0290)韓榮國, 앞의 글(하), 115쪽. 숙종 4년(1678)의≪단성호적≫에서 확인되는바 공노비는 그 구성비가 전체의 2.7%를 점하고 있으며, 가족수는 평균 3.46구였다. 공노비의 보충은 재생산과 이동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역의 납부에 따라 거주형태에 차이가 있었다. 내·시노비는 납공노비였기 때문에 그들의 거주지는 제한이 없었다. 이와는 달리 관노비는 邑司를 중심으로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었으며, 교노비와 역노비도 향교 부근과 역촌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는 그들이 그들의 속처에 직접 입역하였던 데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파악된다.0291)金相煥,<朝鮮後期 公奴婢의 身分變動>(≪慶北史學≫12, 1989), 50쪽.

 공사노비들은 토지를 가지고 있을 경우 상민들과 마찬가지로 조세를 부담해야 했으며, 그들의 재산은 자녀들에게 상속할 수 있었으나 자녀 없이 죽은 그들의 재산은 本主에게 귀속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공사노비는 양천교혼이 국법으로 금지되고 있었으므로 원칙적으로 노비끼리만 혼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양천교혼이 불법적으로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 16세기 경북지방의 분재기에서 확인되는 奴良妻 소생의 비중이 1/3∼1/4에 달하는 수준이었다.0292)李榮薰, 앞의 글, 107쪽. 17세기 초(1609) 울산호적에서는 사노비의 경우 기혼인구의 60% 정도가, 공노비의 경우 기혼인구의 27% 정도가 양천교혼하고 있으며,0293)韓榮國, 앞의 글(하), 123쪽. 17세기 말(1678) 단성호적에서는 公奴의 경우 32.9%가, 公婢의 경우 33.3%가 양천교혼하고 있었다.0294)金相煥, 앞의 글, 77쪽. 사노비의 양천교혼율이 높았던 것은 교혼이 주가의 재산증식의 중요한 재원이 되었을 뿐 아니라 노비노동력을 확보하여 농업경영과 개간사업 등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기 때문이며, 공노비는 원래 賤賤相婚의 성향이 강했으나 점차 양천교혼이 확대된 것으로 파악된다.

<李俊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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