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1. 예학의 발달
  • 1) 가례의 연구와 집성
  • (1)≪주자가례≫에 대한 학문적 관심

(1)≪주자가례≫에 대한 학문적 관심

 고려 말 신흥사대부들에 의해 성리학과 함께 도입된≪朱子家禮≫는 학문적으로 주목을 받기보다는 불교나 민간신앙적인 생활관습에 대응하기 위한 유교의례의 시행이라는 측면에서 강조되었다. 주자가례는 고려시대에는 주로 성리학적 소양을 지닌 관료들에 의해 행해졌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국가적으로 그 시행이 장려되었다. 그리하여 선초부터 국가는 제례에서는 家廟制, 상례에서는 三年喪, 혼례에서는 親迎 등을 중심으로 주자가례를 시행할 것을 사대부들과 일반민에게 강요하였으며 동시에 불교식 喪葬禮나 민간신앙적인 淫祀를 금지하였다.

 또한 태종대부터 과거시험과 7품 이하의 관료들에게 주자가례를 시험보게 하고0295)≪太宗實錄≫권 5, 태종 3년 6월 을묘. 평양부에서 주자가례 150부를 인쇄하여 각 관청에 나눠주었으며,0296)≪太宗實錄≫권 6, 태종 3년 9월 갑술. 당시 음양오행이나 풍수지리적인 葬書들을 가지고 상례를 주관하였던 經師들에게 주자가례를 가르치는0297)高英津,<15·16世紀 朱子家禮의 施行과 그 意義>(≪韓國史論≫21, 서울大, 1988), 98∼99쪽. 등 주자가례의 보급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주자가례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조선 전기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태종대에 설립되는 儀禮詳定所나0298)李範稷,≪韓國中世禮思想硏究-五禮를 中心으로-≫(一潮閣, 1991), 203∼226쪽. 세종대에 의례상정소의 기능을 이어받은 집현전에서 古制 연구를 하는 과정 속에서 주자가례에 대한 연구도 행해졌다.0299)崔承熙,<集賢殿硏究>(上·下)(≪歷史學報≫32·33, 1966·1967).

 15세기는 국가·왕실의 예인 五禮가≪國朝五禮儀≫로 집대성되는 시기였다.≪주자가례≫는 이 책의 편찬과정에서≪大唐開元禮≫·≪洪武禮制≫등 다른 예서들과 함께 이용되었으며 四禮와 관련된 개개 항목들을 규정하는 경우에는 중요한 전거가 되었다.0300)池斗煥,<國朝五禮儀 編纂過程 (1)-吉禮宗廟·社稷祭儀를 중심으로->(≪釜山史學≫9, 부산사학회, 1985). 그러나 이 시기 주자가례에 대한 연구는 그 내용을 그대로 이해하여 예의 실천항목을 설정하기 위한 근거를 대는 수준, 즉 禮制 연구에 불과하였으며 예의 본질적인 면을 고찰하고 경전에 입각하여 체계화시킨 예학의 수준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0301)池斗煥,<朝鮮初期 朱子家禮의 理解過程-國喪儀禮를 중심으로->(≪韓國史論≫8, 서울大, 1982).

 15세기≪국조오례의≫가 성립되기까지 상호 보완적인 성격이 강했던 오례와 가례는 16세기 성리학적 소양을 강하게 지닌 사림이 등장하면서 서로 마찰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중종대 전례논쟁 과정에서≪국조오례의≫에 입각하여 주자가례의 부분적 시행을 주장하는 대신 중심의 國朝五禮儀派와 주자가례의 전면적 시행을 주장하는 사림 중심의 古禮派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다가 결국≪국조오례의≫대로 거행하되 주자가례를 참작하여 행하는 것으로 결정나기도 하였다.0302)高英津, 앞의 글, 127∼143쪽. 그러나 양자의 대립도 주자가례를 이해하는 한도내에서였다. 아직도 이 시기까지는 주자가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0303)≪中宗實錄≫권 36, 중종 14년 7월 무오.

 주자가례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본격화되는 것은 명종대였다. 이는 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심화와도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주자가례가 사림들을 중심으로 널리 시행되고 몇 대를 거치면서 관습적으로 축적된 데서 기인하였다. 세종대에 수입·간행되었으나 세월이 많이 흘러 일반학자들도 구하기 힘들었던≪性理大全≫이 중종 13년(1518) 金安國에 의해 간행되고, 중종 38년≪朱子大全≫이 중국에서 들어와 처음 간행됨으로써 조선학계에서의 성리학 연구는 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0304)金恒洙,<16세기 士林의 性理學 理解-書籍의 刊行·編纂을 중심으로->(≪韓國史論≫7, 서울大, 1981). 중종 13년에는 주자가례의 羽翼書라고 할 수 있는≪家禮儀節≫도 수입·간행되어 주자가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0305)≪中宗實錄≫권 34, 중종 13년 11월 무오.

 家禮書의 출현은 바로 주자가례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본격화되는 하나의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림들은 단절적·분산적으로 시행해오던 주자가례에 대해서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가문 대대로 전수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면서 이전의 家訓·家令 등을 발전시켜 제례를 중심으로 한 가례서인 祭禮書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16세기 중반에 등장하는 제례서에는 宋麒壽의<行祀儀節>, 李賢輔의<祭禮>, 李彦迪의≪奉先雜儀≫등이 있다.

 이들 제례서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우선 집안마다 달랐던 의식을 하나로 통일하려는 목적이 있었기에 형식이나 내용에서 거의 주자가례를 따랐다. 그러나 주자가례의 내용이 조선의 풍속과 현실에 맞지 않은 경우 國制나 俗制를 따르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다음으로 제례서는 생활규범서로서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학문적이기보다는 실용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물론≪봉선잡의≫에서는 예의 본질적인 면을 강조하기도 하였다.0306)고영진,≪조선중기 예학사상사≫(한길사, 1995), 64∼80쪽.

 16세기 중반 사림들은 제례서의 저술을 통해 생활의례로서 주자가례를 행하는 동시에 주자가례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徐敬德·金麟厚·李滉·曺植 등 당시 대표적인 성리학자들이 주자가례의 내용과 의의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논의하였다. 이 시기 사림의 주자가례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학파와 관계없이 일반적인 현상이기도 하였다.

 김인후가 저술한≪家禮考誤≫는 주자가례의 내용을 설명하고 그 속에서 의문나는 곳을 자기 나름대로 수정한 최초의 예서로 주자가례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본격화되는 시초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0307)高英津,<16世紀 禮學과 河西 金麟厚의 위치>(≪河西 金麟厚의 道學과 文學思想≫, 광주광역시 향토문화연구회, 1995), 80∼82쪽.

 주자가례에 대해 본격적으로 광범위하게 연구하여 예에 대한 관심의 확대와 발전에 적지않은 기여를 한 인물이 이황이었다. 그는 이기심성론뿐만 아니라 禮說에도 조예가 깊어 학우·문인 및 가족들과 예에 관한 많은 서신을 주고받았으며0308)周 何,<李退溪의 禮學>(≪退溪學報≫19, 퇴계학연구원, 1978). 이는 그가 죽은 뒤에 문인인 趙振에 의해≪退溪喪祭禮答問≫이라는 책으로 편집되었다. 이황은 서신교류뿐만 아니라 도산서당에서 주자가례를 제자들에게 강의하여 그 내용이 金隆에 의해≪家禮講錄≫으로 정리되기도 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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