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1. 예학의 발달
  • 1) 가례의 연구와 집성
  • (2)≪주자가례≫의 주석과 언해

(2)≪주자가례≫의 주석과 언해

 선조대에 이르러 사림은 공론에 입각한 사림정치를 행해나가면서 주자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확고히 해나갔다. 예에 관심을 가지고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이전 시기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늘어나고 그 수준 역시 상당히 높아졌다. 문장을 주로 하는 일부를 제외하고 이 시기 성리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의 거의 대부분이 예에 관심을 가졌으며 예에 관한 글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0309)이 글의<부표>조선 중기 예서 목록 (16세기 중반∼17세기) 참조.

 예에 대한 이해는 經書批判과 전례논쟁을 거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경서비판은 성리학의 심화에서 비롯되었다. 그리하여 三經보다는 四書가 더 중시되었으며 조선 전기에 주목받았던≪주례≫나≪예기≫보다도 주자가 강조했던≪의례≫와 주자가례가 중시되었다. 즉≪의례≫를 經으로,≪예기≫를 傳으로 인식하였으며≪儀禮經傳通解≫와≪儀禮經傳通解續≫이 부각되었다.0310)고영진, 앞의 책, 105∼112쪽.≪의례경전통해≫는 당시 사림들이 제일 갖고 싶어하는 책 중의 하나이기도 하였다.0311)柳希春,≪眉巖集≫권 5, 日記, 선조 즉위년 10월.

 사림들은 자신들이 기반으로 하고 있는 고례와 주자가례의 내용을 국가전례에서도 관철시키려고 하였다. 이는 선조대 전례논쟁으로 나타났다. 여기에서 상례를 지내면서 卒哭과 1년 후에 어떤 상복을 입어야 되는가를 놓고 고례에 가까운 宋의 孝宗例에 따라 白衣冠帶를 입어야 한다,≪국조오례의≫에 따라 烏紗帽·黑角帶를 착용해야 된다,0312)≪宣祖實錄≫권 9, 선조 8년 5월. 주자가례에 따라 黲笠을 사용해야 한다,0313)盧 禛,≪玉溪集≫권 4, 喪後服色議. 黑色鹿笠과 玉色團領을 착용해야 한다는0314)奇大升,≪高峯集≫권 2, 喪後冠服議. 등 다양한 견해가 개진되었다. 이 시기의 전례논쟁은 폭이나 깊이에서 이전 시기보다는 훨씬 수준이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0315)金恒洙,<宣祖 初年의 新舊葛藤과 政局動向>(≪國史館論叢≫34, 1992).

 16세기 후반에 오면 예를 성리학의 수양론과 관련시켜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도 본격적으로 행해졌다. 그 대표적 인물이 정개청이었다. 그의 문집인≪愚得錄≫은 예에 관한 이론서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많은 부분의 내용이 예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수양론에서 외적 행위의 기준으로 敬·義·禮를 강조하여 이황이 敬을, 조식이 敬과 義를 강조한 것과 비교가 되고 있다. 이는 예의 비중이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또한 예를 수양론의 天理人欲說과 결합시켜 인욕을 제거하고 천리를 보존하는 것이 바로 예의 역할임을 밝히고 있다.0316)고영진, 앞의 책, 120∼129쪽.

 이와 같이 주자가례를 중심으로 한 유교의례가 사회전체에 확대되고 예에 대한 이론적 탐구가 본격화되면서 가례에 대한 관심의 영역도 제례에 국한되지 않고 상례에까지 넓혀져갔다. 四禮 중 제일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제일 복잡하고 어렵다고 여겨졌던 상례에 대한 고찰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다양한 형태의 예서가 나타났으며 상제례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종합하여 하나의 일관된 체계 속에서 서술하는 喪祭禮書가 저술되었다. 劉希慶의≪喪禮抄≫, 申義慶·金長生의≪喪禮備要≫, 金誠一의≪喪禮考證≫등이 16세기 후반 나타나는 대표적인 상제례서이다.

 상제례서는 체제와 내용에서 크게 두 가지 경향이 나타났다. 하나는 유희경·신의경처럼 실제 상장례를 執禮하였던 경험을 바탕으로 실용성을 강조하고 주자가례를 거의 그대로 따르면서 가문의 생활규범서로서의 성격을 발전시켜 일반화한 예서를 저술한 경향이었다. 특히≪상례비요≫는 신의경이 저술하고 뒤에 김장생이 교정하고 보완하여 만든 책으로 당시 조선사회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18세기 이후 사례를 행하는 데 가장 많이 준거가 되었던≪四禮便覽≫도≪상례비요≫의 항목과 내용을 거의 그대로 따랐으며 이 책을 당시 조선사회에서 제일 긴요한 책으로 평가하였다.0317)李 縡,≪四禮便覽≫ 跋.

 다른 하나는 김성일의 경우처럼 학자관료로서 실용성에 유의하면서도 학문성을 지녔으며 주자가례를 따르면서도≪예기≫를 상대적으로 중요시하는 예서를 저술한 경향이었다. 이는 관료로서 국가경영에 필요한≪예기≫에 대한 관심이 15세기≪예기≫에 대한 강조와 결합하여 나타난 것이었다.0318)高英津,<16세기 후반 喪祭禮書의 發展과 그 意義>(≪奎章閣≫14, 서울大, 1991).

 다양한 예설의 개진과 예론의 대두, 그리고 가례에 대한 관심의 확대와 더불어 주자가례에 대한 주석과 언해의 노력이 16세기 후반부터 이루어졌다. 주자가례의 주석은 주자가례를 종합적으로 이해해보려는 데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주석작업은 1570년경부터 개인과 학파에 의해서 행해졌으며 그 결과가 家禮註釋書의 저술이었다. 여기에는 李德弘의≪家禮註解≫, 김륭의≪가례강록≫, 朴枝華의≪四禮集說≫, 鄭逑의≪家禮輯覽補註≫, 姜濂의≪四禮要解≫등이 있다.

 ≪가례주해≫는 이황이 사촌의 孫女喪에 참석할 때 같이 따라간 이덕홍에게 설명해준 것을 계기로 저술되었다. 이 책은 주자가례에 있는 내용들을 항목으로 하여 그 항목 아래 책 제목처럼 간단히 주를 붙여 해설한 것으로 사례의 내용을 순서대로 다 다루었으나 목차가 따로 있거나 완벽한 체제는 아니었다.

 ≪가례강록≫은 김륭이 이황에게 배운 것을 기록·정리한 것으로 주자가례의 체제와 항목들을 그대로 따르면서 각각의 큰 항목 속에서 의심스럽고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들을 뽑아 주로 그 뜻을 해석하였다. 각 항목의 해석은 용어나 문장의 내용 논증이나 의의를 서술한 것보다는 용어의 간단한 설명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가례집람≫과 같이 16세기 말에 등장하는 四禮書보다는 비록 수준은 상대적으로 낮았으나 주자가례를 종합적·체계적으로 고찰하는 데 기여하였다.0319)고영진, 앞의 책, 195∼206쪽.

 상제례서와 초보적인 가례주석서를 바탕으로 16세기 말에 나타나는 것이 사례서였다. 宋翼弼의≪家禮註說≫나 金長生의≪家禮輯覽≫은 완벽한 체제와 내용을 가진 본격적인 가례주석서라고 할 수 있다.≪가례주설≫은 주자가례를 충실히 따르면서도 그 범위내에서 해석하지 못하였던 부분들을 고례나 기타 예서에 입각하여 학문적으로 전문적인 주석작업을 한 결과물이었으며 당시까지의 예서 중에서는 최고의 수준이었다.0320)裵相賢,≪朝鮮朝 畿湖學派의 禮學思想에 關한 硏究-宋翼弼·金長生·宋時烈을 中心으로-≫(高麗大 博士學位論文, 1991), 66∼102쪽. 그러므로 본격적인 가례주석서로서의 사례서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가례집람≫ 역시≪가례주설≫처럼 주자가례의 註 부분까지 세세하게 고증하여 주석을 달았으나 항목은≪가례주설≫보다 훨씬 많아 당시 예서 중에서는 제일 방대하고 수준이 높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중국의 예서와 경서, 중국학자들의 예설뿐만 아니라 이황·김인후·정구·송익필·宋寅 등 당시 예에 조예가 깊었던 조선학자 대부분의 견해를 인용하여 조선에서의 주자가례에 대한 연구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리는 데 기여하였다.0321)鄭玉子,<17세기 전반 禮書의 성립과정-金長生을 중심으로->(≪韓國文化≫ 11, 서울大, 1990). 김장생은 17세기 초 정구·韓百謙과 함께 조선의 대표적인 예학자로 지목되었으며0322)≪光海君日記≫권 3, 광해군 즉위년 4월 병인. 1623년 인조반정 이후 그의 제자들인 서인이 정권의 담당자로 되면서 조선조 예학의 大家로 평가되었다.

 16세기 후반 주자가례를 주석하려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과 더불어 언해하려는 노력도 이루어졌다. 16세기 중·후반 이황·유희춘·이이 등에 의해 四書三經과≪소학≫등 성리학의 기본 경서에 대한 口訣과 언해작업이 이루어졌다. 경서의 구결과 언해는 보급대상의 확대 이외에도 경서의 내용과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것으로 성리학 연구의 심화를 의미하였으며 그 바탕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학파 사이에 나타나는 학문적 이견들을 지양하기 위한 것이었다.0323)金恒洙,<16세기 經書諺解의 思想史的 考察>(≪奎章閣≫10, 1987). 이 작업들은 광해군대까지 교정청을 중심으로 계속되었다.

 주자가례의 언해도 이 시기 경서언해작업과 궤를 같이하였다. 선조 6년(1573) 심의겸이 주자가례를 번역할 것을 청하여 선조가 승락을 하자 홍문관은 金宇顒을 적임자로 추천하였다. 그러나 김우옹은 자신이 예학에 조예가 깊지 못하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하고 주자가례의 언해가 시기상조임을 주장하여 결국 이 일은 무산되었다. 이는 주자가례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의미하였다. 주자가례의 완전한 이해는 방대한 중국 경서와 예서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힘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주자가례의 吐釋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선조 38년 다시 제기되었지만 결국 시행되지 않은 듯하다.0324)≪宣祖實錄≫권 193, 선조 38년 11월 계유.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주자가례 언해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데 반하여 사림 개인에 의한 작업은 계속 행해졌다. 이미 16세기 중반 이황이 주자가례의 주석뿐만 아니라 언해도 하였던 듯하며,0325)이황이 주자가례를 언해했다는 사실은 선조 38년 조정에서 주자가례 언해작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朴弘老가 밝히고 있다(≪宣祖實錄≫권 193, 선조 38년 11월 계유). 그의 작업은 제자인 이덕홍과 김륭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는≪가례강록≫이나≪가례주해≫의 내용 속에 한글로 吐를 달거나 언해한 곳이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

 16세기 말에 저술되는 申湜의≪가례언해≫는 최초의 본격적인 가례언해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주자가례의 항목은 본문을 그대로 쓰고 그 밑에 한글 음과 토를 달았으며, 주자가례의 註들은 본문을 쓰지 않고 언해한 것만 수록하였다. 신식은 이 책을 저술하면서 김장생과 의견을 교환하기도 하였다.≪가례언해≫의 저술은 두 가지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주자가례에 대한 이해가 절정에 달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어려운 한문을 한글로 번역함으로 인해 주자가례가 더욱 광범위하게 퍼져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이다.0326)고영진, 앞의 책, 208∼214쪽.

 가례언해서는 이후 계속 저술되어 17세기 전반 종실인 德信正 李文叟가 상례의 初終 부분을 언해하여≪喪禮諺解≫를 저술하였으며,0327)金長生,≪沙溪全書≫권 5, 喪禮諺解序. 이후 17세기 중반 선산부사 安某는 葬禮와 제례를 추가로 언해하여≪家禮喪葬祭三禮諺解≫를 저술하였다.0328)金應祖,≪鶴沙集≫권 5, 家禮喪葬祭三禮諺解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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