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1. 예학의 발달
  • 2) 고전 예서의 연구

2) 고전 예서의 연구

 고전 예서란 이른바 ‘三禮’라고 부르는≪儀禮≫·≪禮記≫·≪周禮≫를 말한다. 이들은 모두 고대 중국의 周公에 의해 창제되고 孔子에 의해 정비되었다고 말해지는 책들로서, 예악 문물의 상징과도 같이 여겨지고 있는 고전들이다. 그러나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이 예서들은 전국시대의 격변을 거쳐 漢代에 이르러 수집, 정리된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이 주공과 공자의 예법이라는 인식은 상징성이 강한 관념일 뿐이다. 그러나 이들이 고대 중국의 예속이나 예제의 전통을 일정하게 계승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고 하겠다.

 ≪주례≫는 의례에 관한 내용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六官體制를 골격으로 하는 관제와 이상적인 행정 형태를 적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대체로 전국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며, 전한 말기의 劉歆에 의해 완비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考工記>와 같은 것은 字體와 文體에 대한 여러 고증을 통해 한대의 유학자들이 보충해 넣은 것으로 확인되었다.≪예기≫는 거의 대부분 한대의 학자들에 의해 창작된 것으로 밝혀져 있다.≪의례≫도 한대에 수집·정리된 것이기는 하지만, 고전적 요소가 많이 보존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의례≫가 고례를 대표하는 ‘經禮’로 생각되었고 그 때문에 가장 중시되었다. 그러나 이 책도 유실, 수습 과정에 보충된 내용이 많아 고전 예법의 원형을 완전히 전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중국에서의 예학 연구는 오랫동안 이들 古禮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한 작업에 몰두해 있었다.

 이와 같이 위의 3서는 여러 가지 서지학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통하여 중국 주대 고전 예법의 원형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많은 어려움과 논란을 야기하였다. 그러나 이들 고전이 내포하고 있는 禮와 樂의 원리나 이상적인 제도, 그리고 철학적 사유와 문학적 요소들은 그 자체로 매우 심오한 정신과 치밀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주공과 공자의 이름으로 유교의 중요한 경전에 포함되었고, 한대 이후 동아시아의 사회와 문화에 큰 영향을 남기게 되었다. 중국의 역대 왕조와 주변국들에게 있어서 국가적 차원의 왕조례 정비나 사회 일반의 예속 생활에 있어서 위의 3서는 최고의 고전이 되었다.

 중국에서 왕조례의 정비는 당의 玄宗 때 편찬된≪大唐開元禮≫(속칭≪開元禮≫)로 완성되었는데, 이것이 송-원-명-청 여러 왕조의 국가전례에 기초가 되었다. 명대에 이루어진≪大明會典≫과≪大明集禮≫는 조선왕조의 의례 정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들 왕조례는 고전 예학의 체제라고 할 수 있는 五禮(吉·凶·軍·賓·嘉禮)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남북조시대부터 국가적 전례와는 다른 체제로 귀족들이나 사대부계층의 의례 생활을 위한 실용적이고 간소한 예법이 모색되었다. 그 결과 여러 가지 형태의 가정 의례서들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북송대에 司馬光이 편찬한≪書儀≫와 남송대의 朱熹가 편찬한≪家禮≫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들 예서들은 대개 가정의례의 핵심이 되는 冠·婚·喪·祭禮의 四禮 체제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도 역시 기본적으로는≪의례≫와 같은 고전 예서들의 체제와 내용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가례≫류의 예서들은 중국의 중세사회에서 중심 계층이었던 사대부가의 의례 생활을 위해 편찬된 것으로서, 당시의 시대적 환경이나 정신을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고례와 전혀 상반된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 국가적 전례가 정비된 것은 고려 仁宗 때 崔允儀가 편찬한≪詳定古今禮文≫(50권)이 처음이었고, 1234년에 금속활자로 간행되었다. 이 책은 유실되었지만, 그 일부의 내용이≪高麗史≫에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0346)金海榮,≪朝鮮初期 祀典에 관한 硏究≫(韓國精神文化硏究院 博士學位論文, 1994). 조선 초기에는 국가의 전장과 문물제도를 확립하기 위하여 정부 차원에서 고례와 고제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었고, 그 결과로≪國朝五禮儀≫가 편찬되었다.0347)李範稷,≪韓國中世禮思想硏究≫(一潮閣, 1991). 위의 두 책은 국가의 전례를 위한 왕조례에 해당하는 것으로, 고전 예서에 대한 수준 높은 이해를 바탕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조선 초기의 고례 연구는 鄭道傳의≪周禮≫이해와 權近의≪禮記淺見錄≫등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정도전이 편찬한≪朝鮮經國典≫과≪經濟文監≫은 국가운영의 법제와 행정원리를 구상한 책이지만, 모두≪주례≫의 六典 체제와 행정원리를 토대로 이룩된 것이다. 권근의≪禮記淺見錄≫은 총 26권 11책에 달하는 대작으로 그의 고전 예서에 대한 이해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다.0348)權正顔,<權陽村의 禮記淺見錄 硏究>(≪東洋哲學硏究≫2, 1981). 조선 초기의 국가적인 고제·고례 연구 사업은 이러한 학자들의 개인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세종대에 간행된≪禮記大文言讀≫과 15세기 후반에 간행된≪禮記集說大全口訣≫은≪예기≫에 언문으로 구결을 단 정도의 책이기는 하지만, 구결을 다는 것도 본문에 대한 충분한 이해 위에서 가능한 것이므로 이 역시 15세기≪예기≫이해의 성과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조선 예학자들의 고전 예서 연구는 주로≪예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중국에서 중시되었던≪의례≫에 대한 연구는 미미하였다.≪예기≫는 5경에 포함되어 과거(문과) 과목으로 되어 있었지만,≪의례≫는 13경의 범위에 드는 것으로 그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낮아 조선 초기에는 국내에서 간행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중국에서 간행되는 원본≪儀禮註疏≫도 거의 조선에 유입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의례≫를 중심(經)으로 하고≪예기≫등을 세부자료(傳)로 하여 주자가 편집한≪儀禮經傳通解≫와 그의 제자 黃榦이 완성한≪儀禮經傳通解續≫이 소수의 학자들 사이에서≪의례≫이해의 수단으로 활용되었으나, 이 역시 17세기 중반까지는 조선에서 간행되지 않아 매우 희귀한 도서였다.

 16세기 중반부터 활성화된 예학 연구와 저술은 주로≪가례≫를 대상으로 하였고,≪주례≫·≪의례≫·≪예기≫등을 대상으로 하는 고례 연구는 그다지 활발하지 못하였다. 고례의 연구는 세종대에 국가 전례의 정비 차원에서 연구되어≪국조오례의≫로 정리된 후에는 큰 성과가 없었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러 예학의 연구가 심화되면서 소수의 학자들에 의해 고례 연구도 함께 추진되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은 寒江 鄭逑(1543∼1620)와 眉叟 許穆(1595∼1682)과 같은 남인계 학자들을 들 수 있다. 정구는 당시에 서인 예학의 거두였던 金長生(1548∼1631)과 더불어 쌍벽을 이룬 예학자였는데,≪가례≫의 연구와 더불어 고례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명종 18년(1563)≪家禮輯覽補註≫를 저술하기도 하여≪가례≫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지만 여기에 머물지 않고 연구의 영역을 고례로 넓혔다. 그리하여 선조 36년(1603)≪五先生禮說分類≫(12권 7책)를 저술하였고, 광해군 7년(1615)≪禮記喪禮分類≫, 광해군 9년≪五服沿革圖≫등을 편찬하였다.≪오선생예설분류≫는 주자의≪의례경전통해≫를 표준으로 하여 저술된 것이다. 그것은≪의례≫와≪예기≫를 중심으로 한 고례를 북송의 張載·程顥·程頤·司馬光 및 주자의 예설을 인용하여 분류,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가례≫류의 예서와는 달리 왕조례와 사대부례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는 유언으로 자신의 장례를≪의례≫에 의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보면 그가 얼마나 고례를 존중하였는지 알 수 있다. 그도 물론 주자를 숭배한 성리학자였고, 그의 예서에서도 주자의 예설이 주축이 되었지만 예학의 전체적인 체계는 고례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정구의 예학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특징은 신분에 따른 예의 차등화 의식이었다. 왕실의 예와 사대부의 예가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대부의 예와 선비의 예, 그리고 서민의 예가 각기 다른 차별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0349)金恒洙,<寒江 鄭逑의 學問과 歷代紀年>(≪韓國學報≫45, 1986). 이것은≪의례≫나≪예기≫와 같은 고전 예서와≪개원례≫나≪국조오례의≫와 같은 국가 예서의 기본적인 체계이기도 하다.≪오선생예설분류≫에는 왕조의 예뿐만이 아니라 일반 사서인의 예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그의 예학적 관심은 국가 의례와 사서인의 예속을 다같이 정리하는데 있었던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0350)고영진,≪조선중기예학사상사≫(한길사, 1995), 327∼332쪽.

 허목은 정구의 학문을 계승한 학자로서 성리학보다는 고전 유학이라고 할 수 있는 先秦儒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가례≫보다 고례연구에 치중하였다. 그가 지은≪經禮類纂≫(5권 5책)은 만년의 미완성 저술이었지만 그의 고례적 성격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책은≪주례≫·≪의례≫·≪예기≫등 고례 3서 가운데서 상례와 제례에 관련된 본문과 주석 1천여 조를 발췌하여 편집한 것이다. 조항마다 저자 자신의 간단한 해설을 붙여 놓았다. 본서는 경전 원문을 편차에 따라 그대로 발췌한 것이므로 제왕례, 사대부례, 서인례가 혼재되어 있으나, 그 차이를 명시함으로써 저자가 이를 통해 귀천을 분별하고 상하질서를 확립하려고 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본서의 편차는 대체로≪가례≫의 체제와 흡사하게 되어 있으나, 그 내용은 전적으로 고례에서 인용한 것이다.0351)李迎春,<服制禮訟과 眉叟許穆의 禮論>(≪震山韓基斗博士華甲紀念論叢-韓國宗敎思想의 再照明-≫, 圓光大 出版部, 1993).

 洪汝河(1621∼1678)가 1666년에 저술한≪儀禮經傳喪服考證≫(1책)은 제1차예송에서 채택된 宋時烈을 비롯한 서인들의 朞年說을 비판하기 위하여 저술된 것이다. 이는 남인들의 삼년설을 옹호하기 위한 경전적 근거를 밝히기 위한 저술로서 그의 ‘議禮疏’의 부록으로 조정에 올려졌던 것이다. 이 밖에 남인계 학자들의 고례 연구는 18세기의 安鼎福(1712∼1791)과 丁若鏞(1762∼1836)으로 이어졌다. 안정복은≪禮記疑≫1권과≪禮記集說≫1권을 저술하였고, 정약용은≪喪禮四箋≫(전 60권, 新活字本 전 50권)을 저술하였다.≪상례사전≫은 고전 예서의 연구를 집대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喪儀匡>17권,<喪具訂>6권,<喪服商>6권,<喪期別>21권의 4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0352)李迎春,<實學者들의 禮學思想-星湖와 茶山을 中心으로->(≪韓國獨立運動史의 認識≫-白山朴成壽敎授華甲紀念論叢-, 1991). 이들 연구는 남인계 학자들의 예학과 예론에서 고례를 중시하는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에 비해 서인계 학자들은≪가례≫의 연구에 더 치중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가례≫연구도 고례에 대한 치밀한 이해의 바탕 위에서 행해졌다고 할 수 있다. 김장생의≪家禮輯覽≫이나≪疑禮問解≫도 대부분의 근거를≪의례≫와≪예기≫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兪棨와 尹宣擧의≪家禮源流≫는≪가례≫에 있는 내용의 근원을 고례에서 찾아 정리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예학체계는 대부분≪가례≫의 사례체제 안에서 그것을 주석하고 보완하는데 있었다. 기호학파의 학자들 중에서도 고례에 관심을 두었던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소론에 속하는 朴世采(1631∼1695)와 崔錫鼎(1646∼1715)을 들 수 있다.

 박세채가 저술한≪六禮疑輯≫(33권 14책)과≪南溪先生禮說≫(20권 10책)은≪가례≫를 중심으로 하였지만 국가전례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육례의집≫은≪의례경전통해≫와≪가례≫를 주요 근거로 하고 여러 예서를 참고하여 관·혼·상·제 및 향음주례·사상견례 등을 정리한 것이다.≪남계선생예설≫은 박세채가 문인들과 예에 관하여 문답한 내용들을 편집한 책이다. 이 책도 대부분≪가례≫의 편차에 따라 정리한 것이지만, 일부는 문묘·서원 등의 제향과 왕실례를 수록하였다.0353)裵 晟,<南溪 朴世采의 生涯와 思想>(韓國精神文化硏究院 碩士學位論文, 1995). 최석정이 저술한≪禮記類編≫(18권 5책)은 숙종 19년(1693)에 간행되었는데, 이는 권근의≪예기천견록≫을 계승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그 체제는≪의례경전통해≫를 모방하여 편차와 장의 단락을 각각 한데 모아 분류하였다. 본서는 중국 원대의 학자 陳澔가 저술한≪禮記集說≫의 오류를 면밀히 고증하여 바로잡았다. 이 외에도 서인측의 고례 연구로는 영조 34년(1758)에 간행된 金在魯(1682∼1759)의≪禮記補註≫(30권 5책)가 있다.

<李迎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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