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1. 예학의 발달
  • 3) 예학의 경향과 전례 논쟁
  • (1) 예학의 두 경향

(1) 예학의 두 경향

 16세기 후반∼17세기는 조선예학사에서 하나의 획기적인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많은 대가들이 예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학문적 체계를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예에 대한 인식과 이념면에서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의 주된 관심은 종전의 오례를 중심으로 한 왕조예제에서부터 사대부계층의 실생활에 보편화된 四禮 즉 가정의례 쪽으로 전환되어 갔다. 따라서 이 시대의 예학은 대부분≪가례≫연구를 중심으로 하였으며, 이것이 그들의 예관념에 중요한 변화들을 가져오게 하였다.

 ≪가례≫는 16세기 이르러 성리학이 심화되고 사대부 계층, 특히 사림파가 정치·사회적인 주도권을 확립한 이후에 급속히 보급되고 또 시행되었다. 이에 따라≪가례≫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또는 학문적인 관심에서 연구가 진척되기 시작하였고 많은 저술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17세기의 조선 예학에는 아직도 신분차별적 고전예학의 전통이 많이 남아 있었으나,≪가례≫의 보급 및 연구와 함께 서서히 사대부례의 보편성을 강조하면서 왕조례와의 본질적 차이를 부정하는 경향이 대두하게 되었다.0354)李迎春,<潛冶 朴知誡의 禮學과 元宗追崇論>(≪淸溪史學≫7,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0).

 인조 즉위년(1623)부터 10여 년에 걸쳐 진행되었던 인조의 생부 정원군 추숭논쟁은 이 시대의 변화해가는 예학 경향을 잘 반영하고 있었다. 정원군을 追尊王(元宗)으로 올리기 위한 논의가 처음 제기되었을 때 대부분의 관료들과 학자들은 제왕례의 특수성을 들어 그것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제왕가의 예가 사대부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입장을 보여주는 고전 예학의 신분 차별적 관념이 그때까지도 강하게 남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원군 추숭 논쟁은 왕실의 대통계승에 있어서 손자가 조부의 종통을 직접 이을 수 있는가 없는가, 종묘의 신주 봉안에서 한 세대를 건너 뛸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예학적 관점의 차이에서 일어난 분쟁이었다. 사서인의 집에 있어서는 이러한 일이 좀처럼 있을 수 없고, 또 그것은 법적으로 금지된 일이었다. 그러나 제왕가에서는 왕위에 오른 사람만이 종묘의 제사를 주관하기 때문에 그 특수성이 인정되는 것이었다. 김장생은 그의≪가례≫에 대한 깊은 조예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러한 제왕례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고전적인 입장에 서서 추숭론을 비판하였다.0355)李迎春,<沙溪 禮學과 國家 典禮-「典禮問答」을 中心으로->(≪沙溪思想硏究≫, 沙溪·愼獨齋兩先生紀念事業會, 1991). 그러나 朴知誡(1573∼1635)를 비롯한 추숭론자들은 근본적으로 제왕례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왕가도 하나의 家인 이상 가계전승에 있어서는 사가에서와 마찬가지로 宗法의 원리가 준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추숭론자들은 종법이 대자연의 법칙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이의 적용에는 신분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세대를 건너뛰는 손자의 ‘祖統直承’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원종추숭 전례를 두고 김장생과 박지계로 대표되는 두 집단의 이러한 인식차이는 바로 이 시대 예학의 두 가지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17세기≪가례≫를 중심으로 형성된 예학적 평등이념의 대두를 말하는 것이다. 예학에서의 이러한 경향과 시각 차이는 여러 차례의 국가적 전례에서 첨예한 인식의 차이와 논리의 대립을 야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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