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1. 예학의 발달
  • 3) 예학의 경향과 전례 논쟁
  • (2) 전례 논쟁의 배경

(2) 전례 논쟁의 배경

 주로 왕위계승에서의 종법적 정통성 문제와 관련하여 일어나는 이러한 전례 논쟁은 조선 중기에 이르러 빈발하게 되었고, 그것은 또한 커다란 정치적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왕위계승에서의 정통성 문제는 조선 초기에도 여러 차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례 논쟁으로 비화하거나 그것으로 인하여 정치적 파란이 일어난 일은 없었다. 조선 초기에도 적장자로서 후계자를 삼는다는 원칙은 인식되어 있었고, 그에 따라서 정상적인 왕위계승의 정통성이 부여된다는 관념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에서는 처음부터 종법의 원칙이나 상식에 어긋난 무리한 세자책봉이나 왕위계승의 사례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개국 초인 태조 7년(1398) 태조의 막내 아들인 芳碩을 세자로 책봉한 일, 그해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정종이 즉위하자 아우인 태종(芳遠)을 세자로 책봉한 일, 태종 18년(1418) 세자인 讓寧大君의 계승권을 忠寧大君(世宗)으로 교체한 일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종법의 원리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의 상식으로도 납득할 수 없는 계승자 선발의 이변이라고 할 수 있다.

 세조의 왕위 찬탈은 일종의 쿠데타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애당초 宗統이나 正統性을 운위할 것도 없지만, 세조 3년(1457) 세조가 적장자(追尊 德宗)의 아들인 적장손(月山大君)을 제쳐 두고 차자였던 海陽大君(睿宗)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위를 계승시킨 일이나, 예종이 즉위 1년 만에 죽은 후 이번에는 왕자인 예종의 아들들(仁城大君·齊安大君)을 제쳐두고 조카인 성종이 종통을 계승토록 한 일 등이 이러한 사정을 말해 주는 것이다. 더구나 성종에게는 친형인 월산대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정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나 왕실 내부의 사정 및 왕자들의 자질 등을 고려하여 취했던 처사였겠지만, 종법의 원칙이나 예학적 관점으로 본다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에서이건 정통성 시비나 전례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조선 초기의 왕실 종통의 난맥상은 德宗追崇에서 현저히 나타나고 있다. 예종의 둘째 조카였던 성종은 1469년 즉위하여 예종의 후사로 입승하였다(그때 예종에게는 두 왕자가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예종에 대하여는 아버지라고 부르고 생부인 덕종은 ‘伯考’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성종 2년(1471) 정월에 생부 추숭의 일환으로 덕종을 懿敬王이라고 추존하고, 그 夫人(昭惠王后)을 대비로 높였다. 방친에서 들어와 대통을 이은 왕은 私親을 추존할 수 없다는 것이 종법의 대원칙임을 당시의 대신이나 중신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의 없이 즉시 덕종을 왕으로 추숭하였다. 또 3년 후인 성종 5년 12월에는 중국에 주청하여 추숭을 허가받았고, 다음해 4월에는 덕종의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였다.0356)池斗煥,≪朝鮮前期 儀禮硏究≫(서울大 出版部, 1994), 119∼125쪽. 종묘 부묘를 두고 약간의 논쟁이 있었으나,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별로 논란거리가 되지는 않았다. 훗날 인조의 생부인 원종의 추숭을 두고 온 조정이 10여 년에 걸쳐 분쟁을 일으켰던 일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낄 수 있다. 원종추숭에 비하면 덕종의 추숭은 더욱 명분에 어긋난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 일이 별로 큰 논란을 일으키거나 정치적인 문제로 발전하지 않았다. 이는 세조비 貞熹王后와 韓明澮 등 강성한 훈척세력에 의해 추진되었던 일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세력이 없었던 것도 한 원인이었지만, 당시의 학풍과 학문의 수준으로 보아 이러한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란될 만큼 사림의 명분의식이 철저하지 못하였고 예학적 이해도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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