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1. 예학의 발달
  • 3) 예학의 경향과 전례 논쟁
  • (4) 공빈의 추숭 논란

(4) 공빈의 추숭 논란

 선조의 후궁이었던 恭嬪 金氏는 광해군의 생모로서 광해군을 낳은 2년 후에 죽었다. 광해군 2년(1610) 2월 선조의 삼년상이 끝나고 신주를 종묘에 부묘할 때가 되자 광해군은 공빈을 왕후로 추존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다. 광해군은 후궁 소생으로서 적자도 아니고 장자도 아니었기 때문에 세자 시절이나 왕으로 즉위한 초기에 명나라 황제의 고명을 받지 못하여 정통성 문제가 제기되는 등 고통을 겪은 적이 있었다. 따라서 생모를 정식 왕후로 추존하는 일은 그에게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신하들을 시켜 경전적 근거와 고사를 상고한 결과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황제의 생모를 추숭한 전례가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를 근거로 광해군은 예조에 공빈의 추숭전례를 논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은 후궁을 높여서 왕비의 지위로 올리는 것은 정통을 어지럽히고 명분을 문란시키는 것이라 하여 반대하였다. 공빈은 선조의 왕비였던 懿仁王后의 생시에 후궁의 신분으로 죽었으므로, 그를 추존하게 되면 정통의 왕후가 둘이 되어 “諸侯無二妻”란 예법에 위배되고, “妾을 올려 妻로 삼지 말라”는≪춘추≫의 대의를 어기는 것이 되어 명분이 바르지 못하게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왕의 생모를 존숭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특별한 호칭을 올리고 제사를 융숭하게 하며 사당과 묘역을 성대하게 치장하여, 왕의 효성을 보이자고 건의하였다. 다만 정통과 명분의 문란은 불가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생모를 추숭하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당시 영의정 李德馨 이하 여러 신하들은 이 추숭을 난처하게 여겼으나, 왕의 강요에 마지못하여 공빈을 王妃로 추존하고 別廟를 세워 제사할 것을 건의하였다.0360)≪光海君日記≫권 25, 광해군 2년 2월 을해. 그러나 광해군은 공빈을 왕후로 추존하는 것은 물론 신주를 종묘에 부묘할 것까지 바라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예조와 삼사를 비롯한 조정 전체가 반대 의사를 개진하고 영의정 이덕형과 좌의정 李恒福은 사직상소를 올리면서 간쟁하였다. 신하들에게서 동의를 얻지 못하게 되자, 광해군은 그 해 3월에 독단으로 追崇都監을 설치하여 전례를 추진하라고 독촉하였다.0361)≪光海君日記≫권 25, 광해군 2년 3월 계묘. 그의 추숭 논리를 보면, 중국의 역대 제왕들 중에 후궁인 생모를 황후로 추존한 사례가 매우 많고, 신주를 종묘에만 모시지 않으면 혐의스러울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신하들은 극력으로 다투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들은 이것이 국가의 안위나 치란에 관계가 없는 일이므로 너무 고집할 필요가 없다 하여 드디어 추숭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3월 말에 추숭도감을 설치하고 공빈을 恭聖王后로 추존하고, 別廟(奉慈殿)를 세워 신주를 안치하고 묘를 능으로 개봉하여 成陵이라 하였다.0362)≪光海君日記≫권 25, 광해군 2년 3월 갑진·을미. 3개월 후 공빈의 신주를 별묘에 안치하자마자 광해군은 갑자기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라고 명하였다. 이번에는 조정의 모든 신하들이 극력으로 반대하여 저지시키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왕과 신하들은 한 달 이상을 다투다가 마침 명나라 사신이 서울에 오게 되자 광해군은 자신의 주장을 잠시 철회하게 되었다.

 공빈의 종묘부묘는 3년 후에 鄭仁弘 등에 의해 다시 추진되었다. 정인홍은 이 일을 무난하게 처리하기 위해 명에 주청하여 공빈이 정식 왕후로 책봉받도록 건의하였다. 이에 광해군은 동왕 5년(1613) 명나라에 奏請使를 보내어 공성왕후(공빈)의 誥命과 冕服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명의 책명은 광해군 7년 8월에 내려왔고 그 해 9월에 공성왕후의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였다.0363)≪光海君日記≫권 95, 광해군 7년 9월 병술.

 공빈의 왕후 추숭은 의례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논리적인 측면으로 본다면 그것이 광해군의 종법적 정통성을 표방하는데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추숭의례는 대다수 조신들과 유학자들에게 정통과 명분을 문란시킨 참람한 전례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광해군의 생모에 대한 개인적 효심과 자신의 종통상의 지위 향상을 위해 무리하게 추진된 것이었으나, 그 결과는 유교적 명분을 크게 훼손함으로써 왕의 권위와 주동자들의 도덕성에 큰 흠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0364)李迎春,≪朝鮮後期 王位繼承의 正統性論爭 硏究≫(韓國精神文化硏究院 博士學位論文, 1994), 110∼114쪽. 광해군의 생모 추숭은 곧 이어 인조의 생부 추숭에 전례가 되었다. 비록 경우와 성격이 다른 면은 있었지만 모두 당시의 公論으로부터 非禮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 시기에는≪春秋≫의 大一統 의리가 특별히 강조되던 때였고, 예학의 수준도 고도로 발달되어 있었으므로 왕실의 정통성에 관련된 이러한 비상조치들이 결코 묵과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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