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1. 예학의 발달
  • 3) 예학의 경향과 전례 논쟁
  • (5) 원종(정원군) 추숭의 전례 논쟁

(5) 원종(정원군) 추숭의 전례 논쟁

 인조의 생부였던 정원군에 대한 추숭 논의는 인조 원년(1623) 5월 임금이 정원군의 사당에 제사할 때 축문의 頭辭에 쓸 칭호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朴知誡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잠잠해지다가 인조 4년 왕의 생모였던 啓運宮 具氏의 상이 나자 복제 문제와 결부되어 크게 고조되었다. 그리고 인조 6년 계운궁의 탈상과 부묘 때부터 공식적인 정치 현안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왕실과 신료들, 그리고 공신계와 비공신계의 사대부들 사이에서 치열한 논쟁과 갈등이 야기되었고, 인조 8년 7월부터는 왕, 대신, 공신, 三司, 기타 관료들은 물론 재야 학자들과 성균관의 학생들 및 지방의 유생들까지 참여하는 대대적인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결국 3년여를 다툰 끝에, 인조 10년 5월 정원군과 계운궁을 각기 元宗大王과 仁獻王后로 추존하여 별도의 사당인 崇恩殿에 신주를 안치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는 문제를 두고 또 다시 3년간 격론을 거쳐 인조 13년 3월에 종묘 부묘가 확정됨으로써 오랜 전례 논쟁이 끝나게 되었다.

 이 논쟁의 핵심은 선조와 인조의 종통체계에서 광해군을 배제할 경우 야기되는 ‘祖統直承’이라는 부자연스러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원종추숭이 이루어짐으로써 인조의 종통은 당초 왕과 박지계 등이 구상한 선조→원종→인조의 직선체계로 정리되었다. 정원군은 이전까지 왕실의 한 소종 지파로 간주되었으나, 추숭 후에는 대통의 한가운데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분분했던 인조왕통의 종통체계는 일단 정리되었다. 그러나 당시 사림의 공론은 이를 예의 원리에 어긋난 부당한 전례라고 비판하게 되었다.0365)李迎春, 앞의 글(1990).

 이 논쟁의 발단은 반정 직후 인조가 생부 정원군의 사당에 告由하는 축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축문의 머리에 쓸 왕과 정원군의 칭호를 각기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로 되었던 것이다. 이 칭호 문제는 바로 인조와 정원군의 친속관계를 확정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며, 그에 따라 인조의 종통체계가 결정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훗날의 추숭예론도 바로 이 칭호 문제에 초점이 맞춰지게 되었다. 이 칭호 논의에는 대체로 3가지 관점이 제기되었다. 첫째는 정원군과 인조의 칭호는 계승 관계를 그대로 인정하여 ‘皇考’와 ‘孝子’로 호칭함이 타당하다는 박지계 등의 ‘皇考孝子論’과, 인조가 대통에 入承한 까닭으로 정원군이 私親이 된 이상 ‘伯叔父’와 조카로 호칭해야 한다는 ‘伯叔父論’, 그리고 계승 관계는 인정할 수 없지만 친속의 호칭은 버릴 수 없으므로 ‘皇’자와 ‘孝’자를 쓸 수 없다는 鄭經世·李廷龜 등 일반 관료들의 ‘稱考稱子論’이 그것이다. 많은 논란 끝에 절충적인 성격을 가진 ‘稱考稱子論’이 채택되었다.

 비록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이 논쟁의 핵심은 박지계와 김장생의 주장에 있었다. 박지계는 정원군과 인조 사이에 보편적인 부자의 친속관계를 부인할 수 없으며 선조와 인조의 종통에 정원군을 추존하여 입계시켜야 祖-父-子의 계승 관계가 자연스럽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장생은 정원군은 이미 대통에서 분리되어 나간 소종지파에 불과하고, 인조는 그 소종을 떠나 선조의 대통에 입적하였으므로 정원군이 대종에 개입할 여지가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선조와 인조는 의제적인 부자관계에 있으므로 정원군을 아버지로 부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장생의 논리는 당시 대부분의 관료·학자들에게 수용되어 추숭반대론의 논리적 기반이 되었다.

 인조 4년(1626) 정월에 인조의 생모였던 계운궁이 죽자, 그 상례와 장례를 행하는 과정에서 다시 왕의 종통문제가 일어나 격론을 벌이게 되었다.0366)徐仁漢,<仁祖初 服制論議에 대한 小考-啓運宮具氏의 喪葬을 中心으로->(國民大 碩士學位論文, 1982). 신하들은 계운궁의 상례를 대원군부인의 지위에 맞추어 禮葬으로 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왕은 모든 예를 國葬에 준하여 시행할 것을 명하였다.0367)≪仁祖實錄≫권 11, 인조 4년 정월 기미. 이 때문에 왕과 신하들은 사사건건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이후 인조는 모든 儀物과 전례 절차에 신하들의 간쟁을 무시하고 왕후의 예를 적용하여 시행하였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문제가 服制·主喪·反魂·虞祭 등의 전례에서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이 복제와 주상 문제였는데, 실상 다른 모든 전례가 여기에 결부되어 있었다. 계운궁의 상에서 인조가 입어야 할 상복은 기본적으로는 인조와 정원군 사이의 친족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며, 또 그 상복의 결정에따라 그들의 종통문제가 귀결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친족관계가 칭호 논의 때 확정되지 못하고 애매하게 남겨졌던 까닭에 이 때 이르러 대논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처음 복제를 의논할 때 조정의 대다수 중론은 왕이 이미 대통을 이었으므로 마땅히 降服하여 齋衰 不杖朞로 정할 것에 합의하였다. 그런데 인조는 자신이 정원군으로부터 出系한 일이 없고, 또 부모란 칭호를 그대로 쓰고 있으므로 재최 삼년복을 행하고자 하였다.0368)≪仁祖實錄≫권 11, 인조 4년 정월 무오. 이러한 왕의 주장에는 崔鳴吉과 李貴 등 일부 공신들이 가세하였고, 박지계가 뒤에서 이론적으로 후원하고 있었다. 이 두 설에 대해 일종의 절충론으로 제기된 것이 張維의 杖朞說이었다. 이는 인조가 원칙적으로 3년복을 입을 처지이기는 하나 종통에 눌려 한 등급 강등한다는 것이었다. 오랜 논쟁 끝에 결국 절충적인 장유의 장기설이 채택되었다.

 인조 4년의 복제논쟁은 원종추숭의 당부에 대한 피차의 이론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어 인조 6년 계운궁의 부묘를 앞두고 본격적인 논쟁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왕과 신하들, 공신계와 비공신계 관원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과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인조 8년부터 조신들은 물론 성균관과 사학의 학생, 지방유생들까지 참여하는 대대적인 예론으로 발전하여, 3년 이상을 다툰 끝에 결국 추존이 결정되었다. 인조 10년 2월에 追崇都監을 설치하고 3월 9일에는 南別殿을 崇恩殿으로 개칭하여 정원군을 위한 別廟(禰廟)로 삼았다. 그리고 3월 11일에는 정원군의 존호를 ‘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으로, 계운궁의 존호를 ‘敬懿貞靖仁獻王后’라고 의정하고 정원군의 묘소인 興慶園을 章陵으로 개칭하였다. 또 4월에는 추숭 주청사를 명에 파견하고 5월에는 정원군에게 元宗이라는 廟號를 올리고, 27일에는 崇恩殿에 원종과 인헌왕후의 새 신주를 봉안하였다. 다음 해 4월에는 명나라 황제로부터 원종의 추숭 주청이 인가되어 ‘恭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로써 원종추숭은 일단 성사되었다. 2년이 지난 후인 인조 12년 7월에는 최명길이 발의하여 종묘 부묘가 추진되었고, 조정의 관료들과 재야 사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반년이 지난 인조 13년 2월에 왕과 추숭론자들의 강행으로 원종 부부의 신주는 종묘에 부묘되었다.0369)≪仁祖實錄≫권 31, 인조 13년 2월 계유. 이로써 인조가 즉위한 직후에 추진하였던 원종추숭은 12년만에 완결되었다.

 선조를 추존하는 일은 효도를 장려하려는 취지의 전례라고 할 수 있다. 인조의 추숭 의지는 신하들에게 효심의 발로로 간주되었고, 중국으로부터도 그렇게 인정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것이 비록 생부를 높이려는 사심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효성이란 명분 때문에 신하들이 끝내 반대할 수가 없었다.

 이 논쟁에는 다양한 학문적 이론과 전거가 다 동원되었지만, 귀결의 과정은 결국 정치적으로 이루어졌다. 사림세력은 조야의 광범위한 공론을 무기로 저항하였고, 왕과 공신세력은 권력의 힘으로 그들을 누르고 추숭을 강행하였다. 이는 결국 왕실쪽의 승리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인조대가 사림의 공론이 지배하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왕실의 전례 문제와 같은 일부 사안에 있어서는 역시 왕권과 훈척 중심의 근왕집단들이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반정공신 세력은 그들의 정치적인 입지를 확립하기 위하여 사림세력의 거센 저항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방법으로 원종추숭을 관철하였던 것이다.0370)李成茂,<17世紀의 禮論과 黨爭>(≪朝鮮後期 黨爭의 綜合的 檢討≫,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1), 31∼32쪽.

 국가전례를 두고 일어난 예학적 논쟁은 곧잘 정치분쟁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예학논쟁에서 전통적인 제왕례의 특수성에 대한 인식은 점차 퇴색하고, 16세기 이후 조선 양반사회에 풍미하게 된≪가례≫의 보편성에 대한 강조가 왕실의 전례에도 점차 비중을 더하게 되었다. 박지계는 바로 이러한 예학 조류의 변동기에≪가례≫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경향을 촉진시킴으로써 조선 후기 예학사와 왕실의 전례에 대한 인식에 획기적인 계기를 만들어 놓았다고 하겠다. 원종추숭 논쟁은 당시 김장생과 박지계로 대표된 두 경향의 상이한 예학적 관점이 가장 큰 요인이었지만, 여기에는 또한 인조정권의 정통성 문제, 왕권과 신권, 공신계와 비공신계 사이의 정치적 갈등이 내재해 있기도 하였다. 또 이 전례의 논의 과정은 조선 중기 사림정치의 한 형태, 즉 예론이 정쟁으로 비화하면서 야기하는 온갖 정치적 양상과 전개 유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30여 년 후에 일어났던 복제예송의 한 선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李迎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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