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2. 종법제의 보급과 가족제도의 변화
  • 1) 종법제의 원리

1) 종법제의 원리

 宗法은 조선시대 가족제도의 근간이었으며, 가족 윤리를 기반으로 한 조선사회의 규범적 체제를 지탱시켜 준 중요한 원리의 하나였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개인이 개인으로 평가받기보다는 宗中이라고 하는 친족 집단의 일원으로서의 역할이 더욱 중요시 될 정도로 종법의 영향이 강하였다. 그러나 이제까지는 宗法制에 관한 연구가 미진했기 때문에 종법제의 시대적인 변화상이나 그것이 조선사회에 미친 실제적인 영향 정도 등이 아직도 충분히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다.

 그렇다면 과연 종법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떠한 필요에 의해서 발생한 것인가. 종법은 유학이 발생하기 이전부터 가족간의 질서를 규정하고 그 질서가 부계 중심으로 이루어지도록 제도화한 것이었다. 종법은 적어도 周나라 초기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長子를 중심으로 가계를 계승하며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고대 종법의 원형을 알게 해 주는 제한된 자료 가운데≪禮記≫大傳의 다음 구절은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別子가 祖가 되고, 별자를 계승하는 이가 宗(大宗)이 되며 아버지(禰)를 계승하는 이는 小宗이 된다. (따라서) 百世토록 옮기지 않는 종(대종)이 있고 五世가 되면 옮기는 종(소종)이 있다. 백세토록 옮기지 않는 종은 별자의 후손으로 별자의 출계한 자를 계승하여 종으로 삼아 백세토록 옮기지 않는 것이며, 高祖를 계승하여 종으로 삼는 경우는 5세가 되면 옮기는 것이다(≪禮記≫권 16, 大傳 16).

 이 내용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 諸侯의 아들 중에 嫡長子를 제외한 아들을 별자라고 한다. ② 적장자는 제후의 뒤를 잇고 별자들은 각각 하나의 대종의 시조가 된다. ③ 그리고 그 시조의 적장자들은 시조를 잇는 자로서 대종이 되며, 이 경우에는 백세가 지나도록 그 廟를 옮기지 않게 되는 것이다. ④ 소종은 별자의 衆子로서 아버지를 잇는 宗이다. 아버지를 잇는다는 것은 직접 자기의 아버지를 시조로 한다는 뜻이다. ⑤ 즉 별자의 적장자는 별자를 계승하여 대종으로 되지만, 별자의 衆子는 대종에서 갈라져 나와 새로 하나의 종의 시조로 되고 그 적장자가 시조를 계승하여 소종을 이루는 것이다. ⑥ 소종은 아버지를 계승하는 자의 총칭이고, 반드시 별자의 중자의 자손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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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종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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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宗은 제후의 별자를 시조로 하여 백세토록 옮기지 않는 종을 말하며, 小宗은 아버지를 계승하여 5세까지 제사하고 그 사이에 친족 관계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周의 天子는 周王이면서 同姓 諸侯의 대종이었고, 제후는 제후국의 군주이면서도 주왕에 대해서는 소종이었고, 동족의 경대부에 대해서는 대종이었다. 그리고 경대부는 제후의 소종이었다. 조선시대로 말하면 大君 혹은 君들이 대종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대종이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시조를 잇는 아들을 가리키는 경우가 있으며, 혹은 이러한 百世不遷의 친족 집단 전체를 뜻하기도 하는 반면, 소종은 본인을 포함하여 5세까지의 친족 집단을 말할 뿐이다. 이와 같이 설명을 해도 대종ㆍ소종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만 파악될 뿐 보다 구체적인 종법의 실체는 규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제약 속에서도 종법을 정의한다면 그것은 강력한 長子相續의 친족체계라는 뜻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禮記≫喪服小記의 “庶子는 아버지 제사를 지낼 수 없으니 그 종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것이다”0371)≪禮記≫권 16, 大傳 16.라는 규정은 종법의 嫡長子相續主義를 뒷받침해 주는 대표적인 근거가 된다. 서자는 사당을 지을 수가 없으며 비록 관직이 높아졌다고 해도 좋은 제물을 마련할 수는 있지만 제사를 주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0372)위와 같음. 이는 종법이 장자 위주로 실시되었음을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다. 그러므로 고대 종법의 특성을 정의한다면 바로 ‘장자 위주의 家系繼承과 그를 바탕으로 한 祭祀儀禮’라고 할 수 있다.

 종법 관련 사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종법이라고 하는 것이 누구에 의해 가계가 계승이 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렇게 계승된 가계는 어느 대까지 제사라는 형식을 통하여 유지·보존되어야 하는가를 거듭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대종ㆍ소종은 제사를 받아야 할 대상의 대수를 정한 것이며 종자는 그러한 제사를 주관할 자이다. ‘百世不遷’, ‘五世則遷’이라고 하는 것도 백세가 지나도록 제사를 계속한다는 것, 혹은 5대가 지나면 더 이상 제사하지 않는다는 제사의 범위를 규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종법의 골자는 가계계승 원리와 그를 유지하기 위한 제사의례에 불과한 것이나, 그 주관자에 대한 명분을 세우는 과정에서 세분화되고 보다 복잡해지게 된다.

 종법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고대의 종법에 관심을 가졌던 연구자들도 일치된 결론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종법관계 자료가 지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대의 종법관계를 구체적으로 나타내주는 자료는 두 세 가지에 불과한 실정이다. 따라서 종법의 기원에 관한 연구도 현재까지 周公創制說0373)徐復觀,≪周秦漢政治社會結構之硏究≫(香港, 新亞硏究所, 1972).을 비롯하여 周族固有貫習說,0374)李春植,<西周 宗法封建制度의 기원문제>(≪동양사학연구≫26, 동양사학회, 1987). 殷起源說0375)董作賓,<甲骨文斷代硏究例>(≪史語所集刊≫第一本 上冊, 1933).
胡厚宣,<殷代封建制度考>(≪甲骨學商史論≫初集 上, 1972).
등 몇 가지가 제기되어 있으며 아직 합의된 결론에 이르

 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성격에 대해서는 씨족사회 내부로부터 진행된 계층분화가 殷代 이래 왕후 귀족의 봉건적 家父長 家族의 성립을 촉진시키고, 한편으로 소종적 집단을 사회 단위로 일반화시켜 거기에서 촌락공동체의 새로운 기초가 형성되도록 한 제도적 장치라는 주장 등이 있다.0376)宇都木章,<宗族制と邑制>(≪古代史講座≫6, 1962).
박연호,<조선전기 士大夫禮의 변화양상-「家禮」와 宗子法을 중심으로->(≪淸溪史學≫7, 1990), 180쪽.

 이러한 논의들이 아직 정설로 확립된 것은 아니지만 그 여러 가지 설을 종합해 볼 때, 조상숭배와 제사, 그에 따른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발달이 곧 종법 출현의 배경이라는 사실만큼은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위에서 종법에 관한 기록을 통하여 종법의 특성을 추론해 본 것과도 일치한다. 즉 종법이 가계계승과 제사라는 문제에서부터 기원했고, 그것을 가장 중시했기 때문에 종법의 가부장적인 성격은 불가피하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종법은 고대인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을까. 당시인들은 종법의 필요성에 대해 親親, 尊祖라는 친족간의 화목과 위계질서 그리고 宗廟·社稷의 위엄을 들고 있다.

어버이를 친히 하면 祖上을 존중하게 되고, 조상을 존중하면 宗을 공경하게 되며, 종을 공경하게 되면 친족을 거둘 수 있으니(친족이 흩어지지 않으니) 친족이 거두어지면 종묘가 엄격해지고 종묘가 엄격해지면 사직이 중해지며 사직이 중하면 백성을 사랑하게 된다. 백성을 사랑하게 되면 형벌이 균형 있게 되고, 형벌이 균형 있게 되면 백성이 편안해지며, 백성이 편안해지면 재용이 충족되고, 재용이 충족되면 백가지 뜻이 이루어지고, 백가지 뜻이 이루어지면 禮俗이 이루어지게 되며, 예속이 이루어지면 즐거울 수 있는 것이다(≪禮記≫권 16, 大傳 16).

 이는 앞에서 인용한≪禮記≫宗法에 관한 규정 바로 다음에 나오는 기사로서 당시 종법의 효용성을 알게 해준다. 여기에 종법이라는 용어가 직접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尊祖’와 ‘敬宗’은 바로 종법을 떠받치는 기본 정신이므로 이는 곧 종법의 필요성과 효용성을 서술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예문에서는 어버이를 친히 하고 宗을 공경하는 종법을 잘 준용함으로써 집안과 국가, 나아가서는 천하가 예속에 이르게 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고대인들은 종법이란 사회의 유지·통합을 위해 없어서는 안될 예법이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종법은 한 집안의 가족질서이지만 이는 가족내의 위계질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종묘와 사직을 바로 하는 기반이 되며 아울러 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바탕이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고대사회에 있어서 종법은 그야말로 모든 사회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임을 알 수 있다. 종법이 발생할 당시 종법의 사회적 의미는 이와 같이 친족간의 화목과 질서에 의한 사회, 국가의 안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한정되어 있지만 종법관계 사료를 면밀히 고찰해보면 거듭 강조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庶子가 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것과 존조ㆍ경종의 의리를 중시하는 것이다. 서자가 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사실은 앞의≪禮記≫大傳의 기사를 통하여 확인한 바 있다. 그런데 이는 같은 책의 曲禮편에서도 강조되고 있다. “支子는 제사를 지낼 수 없으며 제사를 지내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 宗子에게 고하여야 한다”0377)≪禮記≫권 2, 曲禮 下 2.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대한 주자의 주에는 지자의 지위가 낮기 때문에 제사를 지낼 수 없으며, 만일 종자가 병이 나서 제사를 지낼 수 없는 경우 대신 행할 수는 있지만 반드시 종자에게 알리고 행해야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나아가 종자는 위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잇기 때문에 族人들이나 형제 등은 모두 그를 받들어야 한다고 하였다.0378)위와 같음.

 물론 이것은 주자나 송대의 다른 학자들의 해석이지만, 전적으로 새로운 해석이 아니며, 또한 古經에서 이미 강하게 의도되었던 장자 존중의 의식과 그 이유를 보다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종법은 곧 하나의 질서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 가장 핵심인 제사를 아무나 지낼 수 있게 한다면 종법질서 자체가 흔들리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종자와 지자의 지위를 구별하고 종자에게는 침범할 수 없는 권위를 부여하여 가족질서 나아가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종법은 부계적, 부권적인 성격을 강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0379)李迎春,≪朝鮮後期 王位繼承의 正統性論爭 硏究≫(韓國精神文化硏究院 博士學位論文, 1994). 모든 계승은 아들에 의해 이루어지며, 또 존조ㆍ경종한다는 것은 바로 부계의 질서를 수용하여 존중하는 것이며 부의 권위를 인정해 주는 것이므로 종법이 강력한 가부장적인 요소를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것이다. 중국의 경우에는 이와 같이 강력한 부계적인 혈연관계와 그에 의한 가부장권이 일찍이 형성되어 보급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중국 고대 종법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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