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2. 종법제의 보급과 가족제도의 변화
  • 2) 종법과 가족제

2) 종법과 가족제

 고대 중국 왕실의 가족제도에서부터 발전한 종법은 조선의 士大夫家에서 가통을 유지하는 원리로 수용되어 적장자를 그 집안의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부계적인 가족질서를 정립해 나아가게 되었다. 조선사회에서 종법이 그처럼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된 것은 당시의 위정자들이 사회의 禮俗化를 이상으로 삼았으며, 그 예속화는 가문의 종통을 중시하는 가족윤리의 공고화와 그러한 윤리의식의 사회적 확산을 통해 실행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같은 연유에서 조선의 사대부가에 파급되기 시작한 종법은 婚禮ㆍ祭禮ㆍ喪禮 등 예제의 모든 부문에서 적장자 위주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전의 양계적인 친족제도의 전통은 점차 소멸되어 갔으며 자연히 母族ㆍ妻族 등의 친족내에서의 위상이 격하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조선 초기부터 종법제도가 조선의 가족질서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친 것은 아니다. 사회관습이나 예속은 국가정책 혹은 법률과는 달리 변화에 대한 저항이 강하고 따라서 그 변화의 속도가 매우 완만하기 때문이다. 가족질서는 대표적인 사회관습으로서 정책적으로 제시되는 이상적인 제도와 현실 사이에는 괴리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초기부터 종법에 의한 부계적인 가족질서를 이상으로 하였지만 실제 새로운 가족질서가 정착되는 것은 조선 중기인 17세기를 지나서야 비로소 가능하였다. 즉 조선에서 16세기 이후 사람파가 등장하여 성리학적인 윤리관을 몸소 실천하고 널리 일반화시킴로써 그에 상응하는 성리학적인, 더 구체적으로 종법적인 가족질서가 정착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중기는 조선의 가족제도의 변화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전래의 가족제도가 서서히 변화하고 조선 초기부터 국가적으로 권장하던 종법적인 가족제도 혹은 예제들이 시행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변화과정은 가묘의 보급를 통한 가부장권의 강화, 男歸女家婚의 쇠퇴, 양자제(입후)의 보편화 등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종법의 확산을 위한 방편으로 가묘의 보급에 적극성을 띠게 된다. 조선에서 종법에 대한 직접적인 논의가 일어난 것은 태종대 이후지만, 종법에 기초한 家廟를 보급하는 노력은 태조의 즉위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태조 즉위년(1392) 裴克廉ㆍ趙浚 등이 올린 시무에 관한 상소를 보면 “가묘를 세워서 先代를 제사하라”는 항목이 있다.0380)≪太祖實錄≫권 2, 태조 즉위년 9월 임인. 가묘라고 하는 것은 바로 祠堂을 말하는데 그 기능은 존조ㆍ경종을 목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종법의 핵심되는 내용이 가계계승과 제사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가묘를 설립하려는 것은 곧 종법을 실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태종이 즉위한 후 대사헌 李至 등이 몇 가지 시무책을 올렸는데, 家廟法은 그 중에 가장 먼저 언급되었다.0381)≪太宗實錄≫권 2, 태종 원년 12월 기미. 이 때의 가묘 설립 권장책은 태조 때보다 구체적이었다. 우선 가묘법은 엄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그것은 효를 다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고, 그런데 그것이 실행되지 못하는 것은 바로 불교에 심취한 당시인의 의식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대부 집안에서 먼저 행하도록 하면 그 밖의 사람들도 곧 따라 행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만일 도성 안에서 집이 좁아 가묘를 설치하기 어려우면 궤짝을 마련하여 神主를 보관하고 깨끗한 방에 모셔두며, 지방에서는 관아의 동쪽에 임시로 사당을 설치하여, 수령된 자가 嫡長이면 신주를 받들어 임지로 가고 적장이 아니면 현의 사당에 紙牌를 사용하여 예를 행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울이든 지방이든 사당 제사를 주관하는 자는 새벽마다 분향 재배하고 출입시 보고하는 등 모든 祭儀를 일체≪朱子家禮≫에 따라 하도록 권장하고 있다.0382)위와 같음. 그러나 태종 6년(1406)까지도 당시 가묘를 세운 사람은 백에 하나 둘도 안된다고 할 만큼 가묘의 보급은 용이하지 않았다.0383)≪太宗實錄≫권 11, 태종 6년 6월 정묘.

 가묘의 법이 어느 정도 보급되는 것은 세조∼성종년간에 이르러서이다. 성종 4년(1473) 정월 사헌부에서는 護軍 金季孫 등 40인이 가묘를 세우지 않았다고 하여 죄를 줄 것을 청하고 있다.0384)≪成宗實錄≫권 26, 성종 4년 정월 갑진. 이 때의 경우 호군이라고 하면 정 4품이기는 하지만 무관직으로 그 지위가 높은 편은 아닌데도, 이들에게 가묘 설립을 적극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가묘 설립이 정착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가묘의 보급이 보다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는 것은 역시 조선 중기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중종 13년(1518)까지도 사대부가는 제사를 지내기는 하지만 집집마다 예가 달라서 통일된 禮書가 필요할 만큼 가묘의 보급이 쉽지는 않았던 것이다.0385)≪增補文獻備考≫권 86, 禮考 33, 私祭禮. 이에 대해 李濟臣은 정몽주 때부터 가묘를 세우기 시작하였지만 그 보급은 쉽지 않았으며, 후에 조광조 등이 세상의 도를 다시 바로 하고 나서야 비로소 가묘를 세우지 않은 사람이 없게 되었다고 말하였다.0386)위와 같음. 결국 가묘의 보급은 국가에 의해 건국 직후부터 끊임없이 장려되었지만 실제로 그것이 일반화되어 사대부 가정에서 제사를 규칙적으로 지내게 되는 것은 조선 중기에 이르러 가능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가묘가 곧 종법의 실현장소라고 할 때 종법이 일반화되는 것도 역시 조선 중기에 이르러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역시 16세기 이후 사림의 진출과 그에 따른 유교윤리의 보편화 과정과 무관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혼인제도의 변화에 있어서도 유사한 형태를 나타낸다. 조선 초기까지의 혼인제도는 남귀여가혼이었다.0387)孫晋泰,<朝鮮 婚姻의 주요형태인 率婿婚俗考>(≪朝鮮民族文化硏究≫, 乙酉文化社, 1948).
金一美,<朝鮮의 婚俗 변천과 그 사회적 성격>(≪梨花史學硏究≫4, 1969).
이순구,≪조선초기 종법의 수용과 여성지위의 변화≫(韓國精神文化硏究院 博士學位論文, 1995).
남귀여가혼이란 말 뜻 그대로 혼인 후에 남자가 여자 집으로 들어가 머물면서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0388)男歸女家婚은 학계에서 壻留婦家婚으로도 불린다. 그런데 이는 주로 후대의 학자들이 ‘사위가 처가에 머물러 산다’는 의미를 강조하여 만든 용어이다. 여기에서는 조선 초기 당시의 표현을 중시하여 남귀여가혼으로 통일하여 쓰고자 한다. 이는 부계 위주의 종법사상과는 처음부터 조화되기 어려운 제도였다. 그러므로 조선 초기에 이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장과 또한 현실 상황을 감안하여 조속히 변화시켜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서로 대립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물론 이 때에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바로 종법이었다. 조선 초기 한 관료는 “중국의 예의가 비롯되는 것은 바로 혼인의 예입니다. 陰이 陽을 좇아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가서 아들과 손자를 낳아 內家에서 자라게 하니 本宗의 중함을 알게 되고 아버지가 良人이면 모두 양인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 동방은 典章文物을 모두 중국을 본받으면서 오직 혼인례는 굳이 옛 습속을 따라 양이 음을 좇아 남자가 여자집으로 가서 아들과 손자를 낳고 外家에서 자라게 하니 사람들이 본종이 중한 줄을 알지 못하고 어머니가 천하면 모두 천해집니다”0389)≪太宗實錄≫권 27, 태종 14년 정월 기묘.라고 주장하면서 남귀여가혼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여기에서 ‘본종의 중요성을 안다’고 할 때 본종은 부계 위주의 가계를 의미하며 곧 종법사상에서 나온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본다면 남귀여가혼을 금지하는 근거가 바로 종법사상에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종법사상을 배경으로 남귀여가혼이 親迎制度로 바뀌어야 한다는 인식이 점차 강하게 대두되었다. 친영제도란 남자가 여자집으로 가서 여자를 맞이하여 자신의 집으로 와서 혼례를 올리고 생활하는 혼인제도를 말한다. 이는 음이 양을 좇는 부계 위주의 혼인으로 종법의식에 부합하는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혼속이 이러한 친영의 형태로 바뀌는 데는 오랜 기간이 소요되었다. 예속은 정치나 제도와는 달리 그 변화가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종 17년(1435) 왕실에서는 하나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坡原君 尹坪과 淑愼翁主와의 혼인을 친영의식으로 거행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에서의 친영의 시작이라고 한다.0390)≪世宗實錄≫권 67, 세종 17년 3월 병자. 그러나 이렇게 왕실에서 모범을 보이고 일반 사대부들에게 친영례의 실시를 적극 권장하였지만 친영례는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도 쉽게 일반화되지 못하였다.

 중종 11년(1516) 2월 領事 金應箕는 친영례가 지극히 아름다운 것은 인정하지만 세종대에 왕실에서 모범을 보여 아래에서 따르도록 해도 효용이 없었고, 성종대에서도 시행되지 못하였으니 이는 인정이나 토속에 맞지 않아서 그런 것이므로 시행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0391)≪中宗實錄≫권 24, 중종 11년 2월 정사. 이에 중종은 친영례를 행하기 위해서는 사법기관으로 하여금 규찰하게 하는 의견까지 제시하였다.0392)≪中宗實錄≫권 24, 중종 11년 2월 신미. 그리고 2년 후 유학인 金致雲이 사서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친영례의 모범을 보였다.0393)≪增補文獻備考≫권 89, 禮考 36, 私婚禮. 그러나 아직도 친영은 국가적으로 주도되는 하나의 예식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고 실제 행해지는 혼례가 되지는 못하였다.

 친영제도가 정착되기 시작한 것은 명종대에 이르러서인데, 그것은 半親迎이라는 절충적인 성격의 혼례방식이었다. 반친영이란 혼례는 여전히 여자집에서 치르지만 혼례 후 곧 남자집으로 가 시부모를 뵙는 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이 때에 시부모에 대한 인사를 마치고 나서 다시 여자집으로 돌아가 생활하는 것인지 아니면 남자집에서 곧바로 생활하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0394)장병인,<조선전기 혼인의례와 혼인에 대한 규제>(≪조선전기 혼인제와 성차별≫, 일지사, 1997), 145∼146쪽. 이와 같이 반친영이라는 다소 궁색한 방법이 모색되기도 하였지만 명종대를 지나 17세기 경에 이르면 친영제가 어느 정도 보급되게 된다.

 17세기 이후에는 국가적으로 남귀여가혼을 문제삼는 경우는 거의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물론 아직도 남귀여가혼의 잔영이 남아 있어 사위가 처가에 머물거나 혹은 자손이 외가에서 성장하는 사례를 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친영이라는 문제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권장하고자 거론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혼인과 관련하여서는 시집살이의 어려움을 언급한 기록이 보편적으로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그만큼 혼인에 있어서 친영제가 상당히 일반화되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혼인제도의 변천과정이 가부장 중심의 가족질서를 확립하여, 그 토대 위에서 국가기강을 확고히 하고자 하는 종법의식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종법이 가족제도에 미친 영향을 확인할 수 있는 또다른 기제는 立後(養子)의 문제이다. 조선의 건국공신이었던 裵克廉의 경우 그가 죽었을 때 아들이 없어서 누이의 외손이 그 상례를 주관하였다고 할 정도로0395)≪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12월 무신. 조선 초기에는 양자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관념이 희박하였다. 비록 봉사할 아들이 없더라도 女孫이 있으면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자식을 후사로 삼지 않는 것이0396)≪世宗實錄≫권 97, 세종 24년 8월 신축. 조선 초기 당시의 관습이었다.

 종법이 일반화되기 전에는 제사는 지내되, 그것이 반드시 가계계승과 일치해야 한다는 의식이 없었다. 아들이 없으면 딸이나 외손에 의해 제사지내는 것이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다. 이는 종법의 핵심인 제사는 수용하였지만 그에 따른 가계계승이 반드시 부계적으로, 즉 아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식이 확고하지 않은 데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던 것이 종법이 어느 정도 보급되는 16, 17세기에 이르면 제사는 반드시 아들에 의해 받들어져야 한다는 의식이 일반화되게 되었다. 말하자면 제사와 그를 위한 가계계승이 하나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행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제사와 가계계승을 온전히 하기 위해서는 아들이 없을 경우 입후를 하는 것이 당연한 사실로 인식되어졌다.

 따라서 조선 중기에 이르면 입후 자체보다는 입후와 관련한 제반 사항이 문제가 될 만큼 입후가 보편화되었다. 가령 첩자가 있어도 입후를 할 것인가 혹은 장자가 아들없이 죽었을 때 그 동생이 승중하는 문제(이른바 兄亡弟及) 또 입후한 후에 새로 아들을 낳았을 때 입후를 파할 것인가 하는 등의 여러 가지 문제가 더 실제적인 과제들로 대두되었다.

 古禮에서는 입후가 大宗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며 그것도 본래 嫡子나 庶子가 모두 없을 때에만 同宗之子를 입후하도록 되어 있다.≪經國大典≫에서도 嫡長子나 衆子에게 아들이 없으면 妾子가 봉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0397)≪經國大典≫권 3, 禮典 奉祀. 그러나 조선 초기 종법이 도입되는 시기부터 妾子奉祀를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나 일반 小宗의 경우에도 입후를 하는 경향이 점차 강해졌다. 태종대 이후 有妻娶妻를 금지하고 그에 따라≪경국대전≫에 서얼이 과거에 나갈 수 없는 법이 정착되자0398)≪經國大典≫권 3, 禮典 諸科. 누구든지 서자가 있더라도 입후를 하려고 하였다.

 조선 초기 조정에서는 無後의 조건이 적자와 첩자 모두가 없는 경우를 가리키는 것이냐 아니면 적자만 없는 것을 의미하느냐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는데,0399)≪成宗實錄≫권 35, 성종 4년 10월 기미. 결국 적서차별을 강조하는 쪽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첩자만 둔 적장자로서 그 아들에게 제사를 받고 싶으면 첩자와 함께 따로 떨어져 나와 一支를 이루도록 하였다.0400)≪經國大典≫권 3, 禮典 奉祀. 이는 종법의 원칙에서 근거를 찾기 어려우며 중국의 법제에 비해서도 지나친 것이었지만, 조선에서는 보편적인 원리로 자리잡아 갔다.0401)박연호, 앞의 글, 189쪽.

 병자호란 직후 서울의 대표적인 양반가인 南以雄 집안의 경우를 보면 서자가 집안 내에서 아들로서의 역할은 충실히 하지만 가계계승은 결국 동종지자에 의한 입후로 하고 있는 실례를 볼 수 있다. 당시 이 집안에서는 적자와 며느리가 모두 죽고 없는 상황이었는데, 남이웅은 조카인 斗正(둘째형 以俊의 아들)의 아들 重召를 자신의 아들의 양자로 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0402)이순구,<조선후기 양반가 여성의 일상생활 일례 I>(≪朝鮮時代의 社會와 思想≫, 朝鮮社會硏究會, 1998). 아마도 이것이 조선 중기 이후 양반가의 보편적인 가계계승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첩자로 봉사하는 것은 가문의 지위를 떨어뜨리는 것이라는 의식이 일반화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 후기까지도 입후보다는 첩자봉사가 더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宋時烈은≪경국대전≫입후조에 적·첩 모두에게 아들이 없는 경우에만 입후를 허용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이에 근거하여 첩자가 봉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였다.0403)≪家禮增解≫권 1, 通禮 祠堂 ‘爲四龕以奉先世神主’의 註, ‘非嫡長子則不敢祭其父’에 관한 해석. 그러나 현실에서는 성리학적인 명분론의 고착화와 함께 입후를 선호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어서 첩자봉사를 행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엄격한 적서차별관념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반드시 종법의 원칙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었으나 당시의 각 가문에는 그것이 종법적인 원칙에 더 부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입후와 관련하여 또하나 주목되는 것은 兄亡弟及의 문제이다. 형망제급이란 적장자가 아들없이 죽었을 때 입후하지 않고 그 동생이 승중하는 것을 말한다.≪경국대전≫에는 “만약 적장자가 자손이 없으면 중자가, 중자도 자손이 없으면 妾子가 제사를 받든다”0404)≪經國大典≫권 3, 禮典 奉祀.라는 규정이 있으므로 형이 죽고 없을 때 동생이 승중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金長生이 장자가 아들없이 죽자 차자인 金集으로 하여금 숭중하게 하고 김집은 후에 또 아들이 없자 동생 金槃에게 가계를 계승하도록 한 것은 대표적인 형망제급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0405)≪增補文獻備考≫권 86, 禮考 33, 立後.

 말하자면 형망제급은 종법의 제사원칙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었다. 程子는 “곁가지가 자라서 본줄기가 될 수도 있다”0406)≪家禮增解≫권 1, 通禮, 祠堂, ‘爲四龕以奉先世神主’의 註, ‘立宗子法’에 대한 해석.라고 하여 오히려 형망제급이 가능함을 시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는 중기 이후 형망제급의 사례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장자가 혼인하지 않은 채 아주 어려서 죽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장자에게 同宗之子를 입후하는 것이 관례화한 것이다. 이는 조선 종법의 매우 독특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혈통보다 종통계승을 중시하는 적계주의 정통론이 일반화되었기 때문이라거나,0407)池斗煥,≪朝鮮前期 儀禮硏究≫(서울大 出版部, 1994), 18쪽. 혹은 조선의 예제가 의리론적으로 변하여 명분을 중시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 견해가 있다.0408)박연호, 앞의 글, 191쪽. 그런데 그것과 더불어 입후의 강화에 대해서는 冢婦權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총부란 맏며느리를 말하는데, 중요한 것은 남편이 아들없이 죽었을 때 이 총부가 입후 문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이다. 가령 제사와 가계계승권이 차자에게로 옮겨간다면 총부는 종가로부터 소외되어 모든 권한을 상실하고 경제적으로도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러므로 총부는 자신의 입지를 위해서 당연히 입후를 원하였다. 이러한 총부의 의지는 국가로부터도 보장받는 측면이 있었다. 명종 9년(1554) 조정에서는 “우리 나라의 제사관습이 중국과 달라서 남편이 죽고 아들도 없는 며느리라도 종가에 들어가 살면서 그 선대를 제사하는 것이 유래가 오래 되었으니 총부의 제사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0409)≪明宗實錄≫권 17, 명종 9년 9월 을축.라는 논의가 있었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우리 나라에서 총부의 권한이 강하고 또 국가가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총부권을 바탕으로 총부는 스스로 제사를 담당하다가 어느 정도의 시점이 지나면 입후를 들이게 된다. 이 때에 총부의 의사가 절대적임은 물론이다. 대개 총부는 입후는 하되 자신의 권한을 보다 확고히 하기 위하여 입후될 아들을 가능하면 촌수가 먼 친척에서 구하려고 하였다.0410)이순구,<조선중기 총부권과 입후의 강화>(≪고문서연구≫9·10, 1996), 272쪽. 만약 남편 친동생의 아들로 입후를 한다면 비록 형망제급과 같지는 않더라도 동생의 권한이 은연중에 총부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입후가 강화된 것이 적계주의 정통론의 일반화 혹은 조선 예제의 의리론화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생활에서 자신의 경제적 생존권과 관련하여 입후를 가장 절실히 원했던 것은 총부였으므로, 결과적으로 총부권이 입후의 강화에 보다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총부권은 조선 중기 입후 강화의 단초를 열어주었지만, 조선 후기로 가면서 가문의 역할이 증대되자 그 권한이 많이 축소되게 된다. 말하자면 총부권은 종법의 확산 과정에서 과도기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입후와 관련하여 또하나 주목되는 점은 입후 후 아들이 생겼을 때의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입후를 하여 양자가 있더라도 후에 친자가 생겼다면 가계계승은 친자를 통하여 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실제 사회관습에서도 친자가 생기면 친자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 것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0411)≪增補文獻備考≫권 86, 禮考 33, 立後.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종법이 보다 강하게 영향을 미치게 되자 일단 입후를 한 경우에는 후에 친자가 생겼더라도 그대로 입후를 파하지 않고 승중하게 하는 것이 점차 일반화되었다. 그것은 입후를 하면 부자의 관계가 정해지고 곧 天倫의 질서가 생기는 것이므로 그 관계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0412)위와 같음. 조선 중기 이후 종법의식의 강화를 바탕으로 하여 이러한 입후관행은 하나의 법령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상과 같이 조선 중기 이후에는 가족제도가 종법의 영향으로 부계중심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다. 가묘 설립을 통해 제사의식이 확고해지고 또 친영제가 정착되기 시작했으며, 그와 함께 입후를 선호하는 경향이 보다 강해진 것이 그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즉 조선 중기는 조선의 가족제도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고유한 가족제도의 양계적인 특성이 종법의 부계적인 가족제도로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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