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2. 종법제의 보급과 가족제도의 변화
  • 3) 제사와 상속

3) 제사와 상속

 조선 중기 이후 나타난 조선 제사상의 가장 큰 특징은 四代奉祀가 일반화되고 外孫奉祀나 輪廻奉祀가 점차 사라지게 된다는 점이다.≪경국대전≫에는 “문무관 6품 이상은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의 삼대를 제사하고 7품 이하는 2대를 제사하며 서인은 단지 죽은 부모만을 제사한다”0413)≪經國大典≫권 3, 禮典 奉祀.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의 제사관행은 이 규정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조선 초기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세종 10년(1428) 당시 품계에 따라 봉사대수를 제한하자는 의견과 4대까지는 모두 제사할 수 있게 하자는 의견이 대립하였다.0414)≪世宗實錄≫권 41, 세종 10년 9월 계해. 제사를 제한하자는 쪽은 조선의 元典을 따르려는 것이고 4대봉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중국의 제도, 그 중에서도≪朱子家禮≫의 예법을 따르고자 한 것이었다. 제한론자들은 태조·태종 때에 이미 봉사대수가 제한되어 원전에 실렸으므로 이를 중시하자는 것이었다. 또한 예라고 하는 것은 본래 차등이 있는 것이며 만일 서인들에게 사대를 봉사하게 한다고 할 때 그들이 과연 그것을 실행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4대봉사를 원하는 쪽에서는≪주자가례≫의 ‘四龕’을 근거로 하고 또 부자간의 품계의 차이나 제사 주체의 품계 변화 등에 의해 봉사해야 할 대수에 혼동이 올 수도 있으므로 일률적으로 4대까지는 봉사할 수 있도록 하자고 한 것이다.

 이 때≪주자가례≫에 따라 4대봉사를 하자는 주장은 여러 사람의 의견에 의해 거부되었고 결국 봉사대수를 품계에 따라 제한하는 것으로 되어≪경국대전≫의 봉사조에 실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과정을 거쳐 품계에 따라 봉사대수를 제한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는 시대가 지날수록 점차 4대까지 봉사를 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김장생은 이러한 경향에 대해 정자와 주자가 高祖까지는 有服親이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 없다고 했으므로 점차 조선의 사대부들도 4대까지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하였다.0415)≪增補文獻備考≫권 86, 禮考 33, 私祭禮. 그리고 무엇보다도≪주자가례≫에서 4대봉사하도록 정하였기 때문에 예를 좋아하는 집안에서는 이를 따라 4대봉사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0416)≪沙溪·愼獨齋全書≫上(光山金氏文元公念修會編, 1978), 426∼427쪽.

 말하자면 조선에서 사대봉사가 일반화된 것은 조선의 성리학이 보다 보편화되면서 예제를 실행할 때≪주자가례≫를 절대적으로 신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종법이 조선사회에 정착되어 갔다는 것도 중요한 배경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결과적으로 조선 중기 이후에는 대부분의 사대부가에서 4대봉사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외손봉사나 윤회봉사의 비율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제사를 4대까지 지내고자 하고 또 그것이 부계의 가계계승과 일치해야 한다는 종법의식과 외손봉사나 윤회봉사는 서로 상치되기 때문이다. 16세기 중반 光山 金氏 가문에서는 어머니가 자신과 남편의 제사를 둘째 딸에게 부탁하면서 봉사조 재산을 상속하고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0417)문숙자,<재산상속>(≪조선시대 생활사≫, 한국고문서학회, 1996), 97쪽. 맏사위는 자신의 집에서 장자로서 자신의 집 제사를 맡아야 했기 때문에 둘째 딸에게 재산을 물려주면서 제사를 당부하고 있다. 대개 4대까지 제사를 지내고 대수가 다하면 그 자손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라고 하고 있다. 이는 아들이 없을 경우의 전형적인 외손봉사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17세기 후반 부안 김씨 가문에서는 “사위나 외손자는 제사에 빠지는 자가 많고 비록 제사를 지내더라도 준비가 정결하지 못하고 정성과 공경이 부족하니 이는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만 못하다”는 인식 아래 사위나 외손에게 제사를 맡기지 않는 것을 전통으로 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0418)문숙자, 위의 글, 96쪽. 사위나 외손자는 제사에 대한 책임의식이 없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실제 사위나 외손이 그렇게 정성과 공경이 부족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부계 중심의 가계계승의식이 강해지면 처가나 외가에 대한 책임의식이 약화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을 것이다. 이처럼 조선 중기에는 여전히 외손봉사를 유지하는 집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양자를 들이는 형태로 변화되어 외손봉사는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윤회봉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17세기 중반 서울의 전형적인 양반가인 南以雄 집안도 제사를 돌아가면서 준비하고 있다. 大忌 즉 부모에 대한 제사는 윤회를 하지 않지만 그외의 조부모나 외조부모의 제사인 경우에는 돌아가며 제사를 준비하고 있다.0419)≪丙子日記≫기묘년(1639) 12월 27일. 그리고 부모의 제사라 하더라도 부득이한 상황이 되면 이미 다른 집으로 양자를 갔음에도 불구하고 남이웅 자신이 제사를 지내는 경우도 없지 않다.0420)이순구, 앞의 글(1998), 123쪽. 또한 남이웅의 부인 조씨가 자신의 어머니 제사를 지내는 경우도 윤회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0421)≪丙子日記≫경진년(1640) 정월 18일. 가계계승의식이 확고하지 않을 때에는 이와 같이 제사를 분담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부안 김씨 가문에서는 “우리 집은 다른 집과 다르니 출가한 딸에게는 제사를 맡기지 말라. 재산도 또한 선대부터 하던 대로 3분의 1만 주도록 하라”라고 하여 딸을 제사에서 제외시키고 있다.0422)문숙자, 앞의 글, 94∼95쪽. 이는 윤회봉사가 축소되어 가는 과정중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우선은 딸이 제외되고 그 후에는 아들간의 윤회가 없어지며 결국 장자만에 의해 제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역시 종법에 바탕을 둔 부계적인 가족제도의 확립과 모두 연결되어 있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관념이 먼저 정착을 하고 그것이 반드시 아들에 의해 이루어야 하다는 가계계승의식이 뒤이어 자리잡음으로써 외손봉사 혹은 딸은 포함한 윤회봉사는 더 이상 유지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제사상속의 변화와 더불어 재산상속의 원칙이 달라지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제사를 지내는 데에는 현실적으로 재산이라는 반대급부가 반드시 필요하였다. 전반적으로 생산력이 낮은 조선사회에서 제사에 드는 비용을 제사담당자가 따로 마련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사상속과 재산상속은 불가분의 관계이고 제사상속에서 제외되면 재산상속에 있어서도 그 권한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16, 17세기의 조선 중기라고 하면 재산상속에서 딸에 대한 상속에 변화가 나타나는 시기라고 한다. 위의 제사상속에서 보았듯이 외손봉사나 사위를 포함하는 윤회봉사가 줄어들게 됨으로써 더 이상 딸에게 재산을 똑같이 나누어주어야 할 명분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딸에 대한 차등과 아들에 대한 평분의 상속형태가 나타나게 된다.

 17세기 후반 재령 이씨 집안 분재기 서문에는 “여식은 다른 고장에 살아 선대의 제사를 윤회하기가 어려우므로 노비는 전과 같이 분급하나 전답은 수를 감해서 분급하니 너희들이 각별히 내 뜻을 영원히 따를 일이다”0423)李樹健編,<李楷妻鄭氏許與文記>(≪慶北地方古文書集成≫, 嶺南大 出版部, 1981), 247∼249쪽.라고 분재원칙을 밝히고 있다. 이 당시는 조선 초기와 달리 남귀여가혼이 쇠퇴하여 딸의 거주지역이 媤家 중심이 됨으로써 더 이상 친정 근처에 살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선대의 제사를 나누어 담당하는 윤회봉사의 의무를 다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제사에 대한 의무를 다할 수 없는 만큼 재산상속에서도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라는 뜻이 드러나 있다. 결국 여기에서는 딸에 대한 차등 그리고 아들에 대해서는 균분인 전형적인 차등상속 형태를 볼 수 있다.

 조선 중기는 제사에서 딸이나 외손이 점차 소외되어 가고 그에 따라 재산상속에 있어서도 딸의 상속분이 감소되어 가는 현상을 나타내게 된다. 이는 제사가 선조에 대한 애도의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가계을 잇는 중요한 행위의 하나라는 종법의식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처족이나 외친의 의미가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였다.

 그리고 이에서 더 나아가 조선 후기가 되면 딸이나 외손에 대한 차별뿐만 아니라 장자를 제외한 아들에 대해서도 제사나 재산상에 있어서 차등이 있게 된다. 이는 모든 제사가 장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장자에게 상속분을 더 많이 주게 되는 당시의 상황에 기인한다. 즉 대부분의 상속분은 곧 봉사조가 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