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2. 종법제의 보급과 가족제도의 변화
  • 4) 족보의 보급과 동성마을의 형성

4) 족보의 보급과 동성마을의 형성

 족보는 가계의 계통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종법은 본래 부계를 중심으로 하는 제사와 가계계승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으므로 이 족보와의 상관관계는 긴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종법적인 가계계승의식이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족보상에 부계쪽 가계만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즉 부계만의 족보가 아니라 딸과 외손, 외손의 외손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형태의 족보가 존재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종법이 비록 수용되었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정책적으로 권장되는 차원이었기 때문에 일반에게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종법의 핵심 내용 중에서 제사는 비교적 일찍 받아들여져 지내기 시작했지만 부계적인 가계계승의식은 제사를 행하는 것과는 별개로 쉽게 정착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제사는 지내되 그것이 반드시 적장자에 의해 이루어지고 또 그 다음의 적장자로 이어져야 한다는 가계계승 의식은 희박했던 것이다. 외손봉사나 윤회봉사는 이러한 제사와 가계계승의식의 분리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제사와 가계계승의식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족보의 기록이 부계 중심으로만 이루어질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조선 초기의 족보는 가계의 계통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내외손을 모두 기록하는 형태를 띠었던 것이다. 文化 柳氏나 安東 權氏의 초기 족보가 내외 8촌의 가계를 모두 기록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0424)崔在錫,<朝鮮時代의 族譜와 同族組織>(≪歷史學報≫81, 1979), 48∼49쪽.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로 종법이 가족질서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게 되고 제사와 가계계승의식이 일치하게 되자 족보 기록상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제사가 적장자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식이 확립되어 간다는 것은 우선 딸이나 외손에 의한 제사가 줄어드는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계는 아들에서 아들에게로 이어져야 하는 만큼 딸이나 외손에게 제사를 맡기는 것은 곧 가계계승을 제대로 행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제 외손봉사를 하기보다는 양자를 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따라서 족보의 기록도 부계를 중심으로 하는 가계계승만이 의미있게 되었다. 족보 기록상에서 외손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외손을 기록하되 그 대수를 줄이는 것으로 변화가 시작되었다. 가령 淸州 李氏·眞城 李氏·潘南 朴氏 등은 17세기 초까지는 외손의 범위를 3대까지는 기록하였다.0425)崔在錫, 위의 글, 55쪽. 그러나 시대가 지날수록 그 범위가 줄어들어 조선 후기가 되면 단지 사위를 기록하는데 그치게 된다. 물론 조선 후기까지도 외손을 기록하는 집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추세는 외손을 제외한 부계만의 자손을 기록하는 것으로 족보의 형태가 굳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자녀에 대한 기록의 순위에 변화가 나타난다는 것도 조선 중기 이후 족보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족보가 처음 만들어질 당시에는 대개 자녀의 구별없이 출생순위로만 기재하였다. 가령 딸이 먼저 태어나면 딸을 먼저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17세기 중엽 이전까지는 대체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가 되면 출생순위대로만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先男後女의 방식을 함께 취하게 된다. 딸이 먼저 태어난 경우라도 늦게 태어난 아들을 족보상에 먼저 기록하게 되는 것이다. 17세기까지는 출생순위대로 하는 것과 선남후녀 방식이 동시에 행해졌지만, 18세기 이후 즉 조선 후기가 되면 선남후녀로 기록하는 것이 더 보편적인 방식이 되었다. 이는 가계계승을 부계 중심으로 하면서 아들이 우선시 되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는 현상인 것이다.

 종법적인 가족질서의 확립은 단일 가족의 형태에만 변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촌락의 구성 자체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남귀여가혼이 쇠퇴하고 입후가 일반화되며 특히 상속제도가 자녀균분에서 장자 우대의 형태로 변화되어 가자, 장자가 부모의 터전을 계승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특정 마을에서 점차 동성동본의 친족집단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동성마을이란 대체로 하나의 지배적인 동성동본 집단이 특정 마을의 주도권을 가지고 계속적으로 거주하는 마을을 말한다. 이는 연구 초기에는 대개 동족부락이라고 불리었으나 최근에는 동족마을, 동성마을 혹은 집성마을 등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다.0426)李海濬,<조선후기 촌락구조변화의 배경>(≪韓國文化≫14, 서울大, 1993), 272쪽.

 동성마을이 일반화된 것은 18세기 이후이지만,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대개 조선 중기로 볼 수 있다. 그 사례는 안동 하회마을의 동성마을 성립과정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하회마을은 현재 풍산 유씨의 동성마을로 알려져 있는데, 그러한 동성마을로 형성되기까지에는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었다. 15세기 초 柳從惠와 裵尙恭이 이주하여 살기 시작했지만 이 당시에는 이들의 사위와 외손이 이주해오고 또 이들의 아들들이 처향이나 외향으로 이거함으로써 특정 동성마을로 형성되지는 않았다.0427)鄭震英,<조선후기 동성마을의 형성과 사회적 기능-영남지역의 한두 班村을 중심으로->(≪韓國史論≫21, 國史編纂委員會, 1991), 32쪽.

 가령 16세기 말까지도 유종혜의 손자 7남 중 沼, 湔 2명만이 하회에 거주하고 나머지 자손들은 안동 녹전과 영주·영양 등지로 이거하고 있다.0428)鄭震英, 위의 글, 34쪽. 당시 沼와 그 자손은 인근 가일(佳谷) 마을의 배·권·김씨 등과 통혼하여 하회와 인근 지역에 보다 많은 경제적인 기반을 확보함으로써 세거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그에 비하여 타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대개 처향이나 외향으로 이주한 것인데, 그것은 당시 하회마을 친가의 경제적 기반이 처가나 외가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이다. 즉 처가나 외가에 거주하는 것을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남귀여가혼적인 유습이 남아 있어서 아직은 동성마을이 형성될 여건이 미흡함을 알 수 있다.

 또한 16, 17세기 당시 하회마을의 洞案을 보면, 비록 유씨가 다른 성씨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았지만 아직은 유동적인 것으로 보이며 그 밖에 안씨나 권씨 등의 족세가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역시 동성마을의 출현과는 거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하회마을의 바로 인근인 가일의 경우도 이러한 과정은 유사하다. 가일마을에 처음 입향한 인물은 柳開였으나 그 후손은 다른 마을로 이거하고 이들의 사위로 들어온 안동 권씨가 마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안동 권씨의 경우도 일부가 이곳의 토지와 노비를 관리하면서 재지적 기반을 마련하기는 했지만 그 후손의 대부분은 다른 지역 즉 처향, 외향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리고 가일에 기반을 둔 권씨들 또한 연이은 士禍로 가계가 크게 위축되어 용궁으로 이거하였다가 가일마을에 재차 입거한 것은 17세기 초반 경이었다.0429)鄭震英, 위의 글, 36쪽.

 이처럼 흔히 대표적인 동성마을이라고 하는 곳도 15, 16세기는 물론 17세기까지도 女壻와 外孫이, 그리고 아들의 아들과 여서·외손의 출입이 거듭되어 異姓잡거 마을이 되기도 하였고, 심지어는 여서의 가문이 마을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였음을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동성마을은 17세기 중엽 이후 즉 조선 중기를 지나서야 비로소 그 모습을 제대로 갖추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동성마을이 형성된 것이 종법적인 가족질서의 보편화와 그에 따른 가문의 발달에 기반한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그러한 대 전제 외에 보다 구체적인 몇 가지 원인이 더 있을 수 있다.

 우선 중요한 것은 경제적인 기반이었다. 마을을 주도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하는 것은 경제적인 기반이 없이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앞의 하회마을 柳沼와 그 자손의 경우에도 하회마을의 주도적인 세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친가로부터의 재산과 바로 이웃한 처가의 경제력이 뒷받침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에 비하여 沼의 다른 형제들이 하회마을에서 세거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 지역에서의 경제적인 기반이 취약한 반면 상대적으로 처향이나 외향에서의 기반이 든든했던 데에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경제적인 기반의 문제는 농지의 확보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즉 단지 토지를 많이 확보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농지가 산지로부터 평지로 이동된 것이 동성마을의 주도세력이 출현할 수 있는 보다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16세기에 마을이 산곡간으로부터 평지나 낮은 구릉으로 이동하면서 농경지가 확대되고 또한 집약농법이 발달함으로써 그러한 변화를 주도한 세력이 결과적으로 그 촌락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게 되어 본격적으로 동성마을이 성립하게 되었다. 그러한 증거는 16∼17세기에 일반화된 사족 중심의 동계와 동약조직의 발달이라고 하였다.0430)이해준,<조선후기 문중활동의 사회적인 배경>(≪東洋學≫23, 檀國大, 1993), 199∼200쪽.

 이러한 경제적인 원인 외에 또 중요한 것은 특정 성씨의 사회적인 현달이었다. 특정 성씨의 顯祖 출현이 그 촌락에서 갖는 의미는 절대적이었다. 현조가 관직 혹은 학문상으로 두드러지게 되면 상대적으로 열등한 성씨에 대해 촌락의 사회적인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앞의 하회마을의 경우 유씨도 다른 성씨에 비하여 관직과 학문에서 현달하였기 때문에 여타의 성씨를 압도하고 동성마을을 형성할 수 있었다. 따라서 경제적·사회적 주도권을 장악한 동족의 후손은 점차 모여드는데 반해 “禮安 이씨나 眞城 이씨가 양동에 살면 상놈된다”0431)여중철,<동족집단의 제기능>(≪문화인류학≫6, 한국문화인류학회, 1974).는 말과 같이 非同姓은 양반이면서도 상대적으로 열등한 처지에 놓이게 되어 결국은 점차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즉 동성마을이 형성된 것은 종법적인 가족질서의 보편화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경제적인 기반과 사회적인 현달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족보 보급이 활발해지고 동성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중기에 이르러 종법에 의한 부계적인 가족제도가 어느 정도 정착했기 때문이다.

<李舜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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