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3. 유교문화와 농민사회
  • 1) 유교문화 원리의 보급

1) 유교문화 원리의 보급

 조선사회를 유교사회라 하지만 유교가 일상생활 전반에까지 일시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유교문화의 원리가 되는 성리학은 사상면에서 두 가지의 과제를 해결하면서 전사회의 운영원리로 되었다. 하나는 이전의 사상체계를 처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적극적으로 성리학을 이해하고 보급하는 것이었다.

 조선 이전 사회의 기층에는 불교 및 도교 그리고 풍수·도참·무속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의 원리가 내재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조선 전 기간에 걸쳐 부정되고 통제되기도 하였지만 유교문화와 함께 조선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유교문화는 그와 같이 다양한 문화의 원리들을 유교 입장에서 정리하고 일부는 포섭하면서 형성되었다.

 조선왕조는 불교를 억제하거나 유교윤리와 명분에 어긋나는 祀神行爲를 통제하였다.0432)韓㳓劤,<朝鮮王朝初期에 있어서의 儒敎理念의 實踐과 信仰·宗敎>(≪韓國史論≫3, 서울大, 1976). 五岳致祭와 같은 國祀체제를 정비하였으며 성황신앙을 지방관이 주재케하였다. 곧 모든 사신행위를 없애지는 않았으며 淫祀로 규정되는 것 가운데 일부를 규범화하여 정리하였던 것이다. 祈佛단체인 동시에 향촌의 공동체적 성격을 지녔던 香徒 역시 음사로 규정하여 里社制로 대체코자 하였다. 도교의 제천의식인 醮祭는 天災를 막거나 질병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종교행사였는데 유가의 입장에서는 무격신앙과 마찬가지로 음사였다. 사림파는 불교의 忌晨齋와 도교의 昭格署를 혁파하였다.

 유교 가운데 특히 주자학이 조선사회의 통치이념이 되어 기본적인 가치규범으로 수용되었는데, 그것이 온전히 이해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려야 했다. 15세기경 성리학이 관학교육의 기본 내용으로 확립되면서 정치체제의 정비와 관련된 經世的 측면이 강조되었으며 조선사회의 보다 잘 짜여진 관료제의 관료는 유학 수업자였다. 전시기보다 확대된 예비관료층이 형성됨에 따라 유학에 대한 수요는 대폭 늘어갔으며 성리학의 중심 개념인 理氣論은 지식인 계층의 보편적인 인식 준거로 자리잡아 갔다. 그후 16세기 후반 성리학에 대한 이론적인 탐구가 본격적으로 나타나 五常과 四端七情로 포괄되는 인간의 性情을 이기론으로 해명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되었다. 우리 나라의 성리학은 心性論, 특히 사단칠정의 문제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이론이 더욱 정치해졌고 조선적 성리학의 특징적인 이론체계를 확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성리학은 단순히 잘 짜여진 논리적인 사유체계로서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사고와 행위를 규제하고 이끄는 구실을 하였다. 이기론은 유교적 윤리도덕과 명분론적 사회질서가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것임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면서 그러한 사회질서를 지키고 그에 맞는 인간 형성을 궁극적인 관심으로 삼았다.

 유교문화는 의식주를 포함하는 전 생활 및 관습이나 법, 사회조직 그리고 사회의 모든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이었다. 유교문화를 담지한 자들의 가정에서 뿐만 아니라 생활공간인 관료제에서 그리고 향촌사회에서 나타난다 하겠다. 그러한 유교문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인간 상호관계에 대한 규정이었다. 三綱五倫에서 제시하고 있는 군주와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연장자와 연소자, 친구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정처와 첩, 적자와 서얼, 士族과 常人, 지주와 전호 관계 등 사회의 모든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었다. 각 관계에는 질서가 있으며 그의 구체적인 표현이 禮였다.

 그것은 또한 제도나 의례와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구체적인 건조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서원이나 향교 따위는 유교문화를 유지하는 중요한 기구일 뿐만 아니라 祭享하는 공간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선사회에서의 유교문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가치관의 확산과 그 행위규범의 실천에만 의존하여 생활과 풍속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법에 의해 강제되고 형률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양반층은 향촌사회에서 성리학적 질서를 유지하면서 유교문화를 누리고 퍼져나가게 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계급적 이해가 반영된 국가권력에 의존해 그 문화의 유지와 보급을 하였던 것이다. 개인적 차원에서의 도덕규범이나 사회규범을 때로는 법으로 명확하게 규정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상한과 사족의 구분이 엄하다는 것도 교령으로 정하였고0433)≪受敎輯錄≫嘉靖 갑인 33년(명종 9) 4월 4일. 이 교령은 종실, 권신 혹은 내수사 노비가 위세를 빌어 사족을 능욕하고 있는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明宗實錄≫권 16, 명종 9년 4월 갑술). 개인관계의 질서도 법으로 정하였다.≪經國大典≫刑典의 告尊長에는 자손·처첩·노비가 부모나 가장의 비행을 陳告하면 모반이나 역반 사건 이외에는 진고한 자를 교수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개인 차원에서의 도덕규범이 전사회의 법규범이 된 것이었다.0434)이재룡,≪조선, 예의 사상에서 법의 통치까지≫(예문서원, 1995), 37쪽.

 어느 사회구성원보다 먼저 유교문화를 담지하게 된 양반들은 留鄕所, 士族鄕約, 職場契, 金蘭契, 詩會와 같은 조직체들을 통하여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형성·유지시키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가치관을 전사회에 확대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문화를 다른 계층에게 확산시키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시회와 같은 것들은 양반층 안에서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중인층 혹은 서얼들에게까지 확산되었고, 재지사족은 향촌사회에서 자신들만의 사족향약 경험을 토대로 상하동약을 시행하였다.

 유교가치관을 바탕으로 하는 문화의 형성은 당연히 그 가치관에 입각한 행위규범으로 표출되는 것이었다. 곧 유교의례의 준용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유교문화를 먼저 수용하고 담지하고 있는 양반층만의 의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농민 일반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농민은 이른바 士農工商의 四民 가운데 儒者가 업으로 삼을 수 있는 존재였다.0435)韓永愚,≪朝鮮前期의 社會思想≫(한국일보사, 1976), 124∼139쪽. 李珥는 程子의 말을 빌어 신분적 질서를 지키듯이 農工商賈가 정해진대로 행하여야 한다면서 사민의 분업화된 질서를 말하였는데,0436)李 珥,≪栗谷全書≫권 25,<聖學輯要>爲政 9, 明敎章. 대부분의 유자는 단순히 利를 좇는 공상보다 농업을 우위에 두고 있었다. 자연의 질서 속에서의 제관계를 설정한 것이 유학이라면 자연 속에서 자연의 순리를 좇아 생산을 하는 농업은 유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산업이었다. 더군다나 현실에서의 농민은 가장 중요한 생산층이자 각종 부세의 부담자였다.

 향촌사회의 재지사족은 농민과 지주전호관계를 직접 맺고 있거나 혹은 여러 조직을 통하여 농민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런데 16·17세기의 농민은 선초 이래 높아진 생산력 수준이나 오랜 동안에 농민지배의 한 방법으로 행사되었던 收租權에 입각한 지배의 철훼에 힘입어 안정적인 상태이어야 하나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였다. 더군다나 임진왜란과 같은 전란 등의 피해는 막심한 것이어서 농촌에서 유리하게 되는 농민들에 대한 사회경제적인 안정책은 절실한 것이었으며 그에 못지않게 그들을 성리학적 질서로 이끄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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