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3. 유교문화와 농민사회
  • 2) 교육기구의 운용과 의례의 수용

2) 교육기구의 운용과 의례의 수용

 유교가치관을 가진 인간의 육성과 그에 입각한 사회질서의 수립을 한마디로 敎化라 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교육·교화는 곧 유교문화의 주체 및 담지자의 양성이었다. 유교문화는 이 교화과정을 통하여 확산되기도 하였다. 유교에서 가리키는 가장 바람직하고 전형적인 통치는 곧 교화였다. 조선의 儒者는 德治와 刑政이라는 통치의 두 가지 길, 예로서 이끌고(導之以禮) 형벌로서 다스리는(齊之以刑) 길 가운데 덕과 예로 다스리는 교화를 가장 원형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강상죄에 의하여 강제할 뿐만 아니라 교화라는 근원적인 방법을 동시에 사용하였다. 경제적 처지를 이유로 ‘先養民後敎化’를 내세워 향약시행 논의에서 향약시행을 일시 정지하도록 주장한 李珥에게도 교화는 최종의 목표였다. 백성을 가르쳐 유교적 질서의 사회를 만드는데 정치의 목표가 있었다.

 이러한 교화를 실현하는 것 역시 두 가지 길이 있었다. 교화의 본래의 뜻대로 교화의 전형을 세워 교화의 대상자가 그를 본받게 하는 것과 그 전형에서 벗어나는 것을 규제하는 것이었다. 권장과 강제규제이었다. 그 전형은 유교경전에서 제시되는 것이지만 현실적인 기준은 군주가 모범이 되는 것이었다. 수령의 임무인 政令의 준행과 교화의 시행 역시 중앙의 군주를 대신한 행위였다. 그 체계는 관찰사-수령에 이어지는 것이며 면리제가 그 통제의 하부조직을 이루었다. 아울러≪경국대전≫에 각종의 규제 조항을 세우고 유교의례의 준용까지 때로는 법령으로 강제하는 것이었다.≪경국대전≫에 혼례나 상례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을 규정하였을 뿐만 아니라<婚姻節目>과 같은 각종의 법령을 수시로 만들어 지키게 하였다.

 교화의 주체는 국가와 양반층이었으며 향촌사회에서는 수령과 재지사족이었다. 국가는 학교를 세워 유학교육을 하고, 유학적 질서를 강조하는 교유문을 발표하기도 하며,≪三綱行實圖≫·≪小學≫과 같은 각종의 유교서적을 인반하여 그 내용을 알렸다.0437)교화에서의 소학의 위치에 대해서는 金駿錫,<朝鮮前期의 社會思想>(≪東方學志≫29, 1981) 참조. 그것은 중앙의 기구에서만 한 것은 아니었고 관찰사 혹은 수령이 행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관찰사였던 金正國은≪警民編≫을 보급하였고 金安國은 향약을 관내에 시행하였다. 한편으로는 열녀·효자에게 旌閭를 하고 정문을 세운 것 같이 그 규범을 수행하는 것을 표창하여 장려하였다.

 물론 교화가 학교제도에 의하여서만 이루지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교화의 근원은 학교로 이해하고 있었기에 각종의 학교를 설립하여 교화의 기구로 삼았다. 조선시대의 관학은 알려진 대로 서울의 4부 혹은 5부학당 및 성균관 그리고 지방의 향교가 있었으며, 사립 교육기구로서는 家塾·書堂·書齋·精舍 그리고 書院이 있었다. 교육은 그 밖에 향약과 같은 사회조직체를 통하여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경국대전≫에는 부녀자와 어린이도 교화대상인 것으로 규정되었다.≪삼강행실도≫등을 한글로 번역하여 경외의 사족의 가장, 父老나 혹은 교수, 훈도 등으로 하여금 부녀자와 어린이를 가르치게 하는데 그 결과 大義를 통하고 조행이 뛰어난 자가 있으면 관찰사가 임금에게 보고하여 상을 주도록 규정하였다.0438)≪經國大典≫권 3, 禮典 獎勸. 유교문화의 원리 곧 유교가치관의 확산이었다.

 명종 원년(1546) 6월에 제정한<京外學校節目>은0439)≪明宗實錄≫권 3, 명종 원년 6월 신축. 조선의 인적·물적 기초로서의 농민층을 교육대상에 포함하는 학규였다. 16세기 중엽 이후 이<경외학교절목>에 근거하여 面訓長制가 실시되었다. 面學徒는 면훈장에게 직접 교육을 받든가 아니면 각자 배운 공부를 한달에 한번 확인하는 제도였다.0440)金武鎭,<朝鮮後期 敎化體制의 整備와 面訓長制의 性格>(≪歷史敎育≫58, 1995), 66쪽. 면훈장제는 조선 중기 이후 향촌사회의 성장과 함께 군현통치에 면리제의 운용이 일반화되면서 더욱 확산되었다.

 이러한 면훈장제 가운데 교육대상을 사족에 한정하지 않은 경우에는 향교나 서원에서 배제된 교육 수요층을 확충된 면 단위 교육기구에 포섭하는 셈이었다. 이와 같은 면훈장제의 운영은 왕성하게 확산되고 있는 서당의 기능을 현실적으로 인정하여 관학체계로 포섭하면서 교육의 내용을 통제하려 하였던 것이다. 문화 형성을 주도해 나간 국가와 양반층이 사회변동에 따른 문화원리의 변질을 차단하려는 의도였다.

 전술한 바대로 유교문화 원리의 보급은 국가권력에 의한 것만은 아니고 양반 개개인에 의해서도 취해지던 것이었다. 향촌사회에서의 교화의 주체인 재지사족은 유향소를 설치하여 향풍을 바로잡으려 하였으며 鄕射禮·鄕飮酒禮를 실시하고 서당 및 서원을 세워 교화의 근원으로 삼았다.≪朱子家禮≫의 준용과 같은 것은 향촌사회에서 교화의 전형을 보이는 것이었다. 주자학적 가치관은 국가 혹은 양반에 의하여 내용이 보급되고 강조되면서 일상생활의 규범으로 수용되었다.

 16세기의 서당의 경우, 동몽교육에 관한 공적인 논의나 규정에서는 庶人을 그 교육대상에 포함하고 있으나 실제 설립된 서당은 현실적으로는 사족을 대상으로 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교화와 교육의 일차적인 대상은 사족일 수밖에 없었다.

 17세기에는 향촌마다 서당이 설립되었다. 정부측이나 재지사족은 양란 이후 조선사회의 재건과 관련하여 그리고 더욱 요구되는 유교교화의 필요에서 서당을 교육·교화의 기구로 주목하였다. 서당교육은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양인농민층의 요구이기도 하였다.0441)丁淳佑,≪18世紀 書堂 硏究≫(韓國精神文化硏究院 博士學位論文, 1985), 177쪽.
김무진,<조선후기 서당의 사회적 성격>(≪역사와 현실≫16, 1995), 237쪽.
따라서 李㙉의<通諭各面直月文>에서와 같이 이 시기 이러한 서당을 서원과 함께 풍교의 본원으로 인식하기까지 하였다.

 사회의 전체 계층 가운데 과연 어느 범주를 교화할만한 대상으로 삼는가하는 것은 문화 보급의 중요한 문제였다. 15, 16세기의 지배층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이 보편적임을 인정하면서 도덕적 능력의 차별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한 도덕적 능력의 차별성은 禮制의 차별로 나타났다. 예를 들면 서인이나 賤隷를≪주자가례≫에 입각한 의례의 실천자로 인정하는가 그렇지 아니하는가의 문제였다.0442)金勳植,<中宗代≪警民編≫보급의 고찰>(≪李載龒博士還歷紀念 韓國史學論叢≫, 1990), 448∼449쪽.≪경국대전≫에서는 사대부와 서인의 상례를 구별하여 각각 3년상과 백일상으로 규정하였다. 물론 軍士와 서인의 복상문제는 현실적으로는 부역문제와 직결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3년상을 행하기를 원하는 자는 허락한다고 되었지만 시행되지는 않았다.0443)≪中宗實錄≫권 22, 중종 10년 7월 신해.
3년상 시행 문제에 관해서는 高英津,<15·16세기 朱子家禮의 시행과 그 의의>(≪韓國史論≫21, 서울大, 1989) 참조.

 16세기 초의≪경민편≫의 보급이 소농의 성장에 따른 교화대상의 확대를 의미하지만 향약 이외의 본격적인 교화기구를 운영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점에서 17세기 이후 동몽교육 대상이 확대되었다는 것은 그에서 한걸음 나아간 교육기구를 통한 구체적 실천이었다. 17세기 상하동약이 향촌사회의 재건이라는 절박한 현실에서 농민층을 포함하는 기구로 변화하여간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제는 문화의 원리를 표방하고 선언하는데 그칠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것이었다. 특히 徐思遠의 河東里社契約에서 보이는 大同思想과 같은 것은 그러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0444)金武鎭,<조선중기 士族層의 동향과 鄕約의 성격>(≪韓國史硏究≫55, 1986), 39쪽. 교육대상의 확대가 있다하여 면리 단위 향촌에까지 상하지분을 내세운 예법과 성리학을 전파코자 한 서당의 설립목적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한편 이른바 士族多居 지역이면서 상호간에 혈연적 유대가 튼튼한 곳에서의 서당의 享祀는 祖先奉祀의 家廟的 성격이 강하였다. 그것은 종전에 소홀히 하거나 세우지도 않았던0445)≪明宗實錄≫권 19, 명종 10년 10월 무인·11월 임진. 가례의 중심적 공간인 가묘 설립 문제를 부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종전의 族契 혹은 族會 등을 통한 혈연유대가 서당이라는 구체적이고 사회적 유효성을 인정받는 기구를 매개로 하게 된 것을 의미하였다. 양반층은 서당에서 유교문화의 원리를 공부하고 그를 통하여 자신들의 사회적 위상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기회를 갖는 것과 동시에 문화 전파의 기지를 마련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문화 범주에 농민층이 포섭되는 것이었다.

 교화의 실현은 행위규범의 실천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곧 의례의 실천이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교육과 예속 변화의 관계를 말하자면 그것은 두 가지였다. 앞서 말한대로 예의 본질을 교육시켜 예실천의 당위를 깨닫게 하는 것과 구체적인 의례를 가르쳐 새로운 의례를 지키게 하거나 종전의 의례에 대체토록 하는 것이었다.≪가례≫를 직접 배우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겠으며, 교재의 곳곳에서 유교의례를 강조하고 있고 근본적으로 그러한 의례의 출발인 유교가치관을 배운다는 점에서는 동몽교육을 통한 의례의 준용을 말할 필요도 없겠다.

 孟子가 말한대로 학교를 만들어 가르치는 것은 인륜을 밝히고자 함이요, 주자의 해석처럼 倫은 곧 序이니 부자간이나 군신간·부부간·장유간 그리고 붕우간의 질서인 것이었다.0446)≪小學≫권 2, 明倫第二. 질서의 교육은 곧 의례의 준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어린아이라도 언제나 학당에서 머물며 공부하도록 할 경우에 이러한 居堂·居齋는≪소학≫의 실천이나≪주자가례≫의 준용을 확실하게 생활 속에서 교육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程子의 말대로 灑掃應對와 같은 것은 사람의 행함에 가장 가까이 있는 일상적인 것이어서 그것을 形而下라고 하지만 그를 행하는 가운데서 스스로 理에 가까이 이를 수 있는 것이고 그것에 인을 실현함의 근본이 있는 것이었다.

 동몽교육에서의 교재는 직접적으로 의례를 이해시키고 실행방법을 가르치는 것도 있으나 대체로 그러한 의례의 본질인 가치관을 교육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동몽선습≫은 오륜의 철학적 배경, 五常의 행동규범, 그리고 오륜·오상의 모범적인 역사 사례를 하나씩 설명한 뒤에 성현의 대표적인 言句를 하나씩 붙인 순서로 구성한 것이었다.0447)韓永愚,<朴世茂의≪童蒙先習≫>(≪朝鮮前期史學史硏究≫, 서울大 韓國文化硏究所, 1981), 253쪽. 李珥의≪擊蒙要訣≫은 상제와 제례를 별도로 강조하고 있어서 宋時烈은 그를≪家禮≫에 따르는 제사 때에 참고로 삼도록 권장할 정도였다. 鄭經世의≪養正篇≫에서도 지켜야 할 의례를 강조하고 정리하였다.

 위에서 말한 교화의 실현, 유교가치관의 수용은 의례의 준용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의례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절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관에 따른 행위규범인 것이기 때문이었다. 성리학의 기본 틀인 이기론의 사회적 실현이 예라고 이해할 때에0448)高英津,<16세기 후반 喪祭禮書의 發展과 그 意義>(≪奎章閣≫14, 1991), 34쪽. 예를 준용하여 그 가치관에 입각한 사회질서를 세우고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유교의례의 수용은 단순히 각종의 의례를 유교적으로 정리하는 것만이 아닌, 유교적 질서의 사회 그리고 유교 가치관에 입각한 인간의 완성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교화의 현실적인 결과는 의례의 준용 여부를 통하여 검증되기도 하는 것이었다.≪주자가례≫의 수용은 곧 주자학적 질서의 성취 정도를 알려주는 것이었다.0449)黃元九,<朱子家禮의 形成過程>(≪人文科學≫45, 延世大, 1981)에서 지적한대로≪주자가례≫를 주자가 온전하게 작성한 것인가 아닌가 보다는 현실적으로 그것을 주자의 가례로 인식하여 준용한 것이 문제였다.

 따라서 의례가 그러한 가치관의 실천규범인 동시에 그 실천을 통하여 그러한 가치관을 지닌 인간의 형성에 그 목표가 있다고 하면, 의례의 보급은 그러한 의례의 출발인 가치관의 보급을 병행하게 되어 있었다. 예컨대 혼례건 상례건 그 절차를 강조하기에 앞서 인간관계를 말하는 효와 충을 바로 세워야 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상제례는 효로부터 출발하여 그 의례가 나오는 것이었다. 흔히 향약에서도 그 때문에 덕업이 제대로 되어야 예속이 바로 세워짐을 말하였다. 金幹은 동계의 4대 항목을 正倫理·敦風俗·救患難·規過失로 나누면서 윤리가 바르게 되어야 풍속이 바로 세워짐을 말하였다.

 그와 같기에 의례의 수행은 비록≪주자가례≫를 준범으로 하고 있지만 그 정신인 효를 수행할 수 있으면 조선적인 변형이 가능한 것이고 향촌사회의 사정에 따라서 의례가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러한 변용의 기준이었다. 이것은 양반층에게도 마찬가지여서 문자 그대로의 준용에는 항상 현실적인 괴리가 고민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더욱이 일반 농민에게 있어서는 그를 준용할 만한 경제적 처지가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경제적 조건을 무시한 비현실적인 의례가 표창되는 것이 또한 현실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보면 가례서의 보급을 두 측면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가치관을 실현키 위해 지향해야 할 의례를 제시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 지향점과 현실이 결합된 것이었다.≪주자가례≫가 지향해야 할 의례를 싣고 있다고 하면 조선시대에 재구성된 가례서는 후자라 하겠다.

 이러한 의례의 보급 및 확산은 일차적으로≪주자가례≫와 같은 의례집에 의하여 이루어질 것이지만 직접적인 또 다른 방법에 의하여 전파·보급되는 것이었다. 예컨대 유교의례는 특히 향약과 같은 조직체를 통하여 광범하게 보급되었다. 향약과 같은 조직체에 참여하여 의례를 준용하는 것이었다. 사족만이 참여한 향약은 논외로 하더라도 임진왜란 이후 동약 등을 통하여 상하가 함께하는 향약이 늘어나면서 향약에서 강조하는 유교규범은 물론 농민의 예속에도 영향을 미쳤다.

 향약은 모일 때에 서원행례나 향례가 뒤따르는 경우가 있어서 유교의례가 향음주례와 같은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일반인에게까지 교육범위를 확대한 서당의 경우에도 일정하게 그러한 유교의례의 확산에 기여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임란 이후의 모든 향약이 유교의례를 강조하지는 않았다. 몇 지역의 동약에서는 지나친 유교의례의 강조가 오히려 민심을 거칠게 할 것을 염려하여 소략하게 다루는 경우도 있었다.0450)金武鎭, 앞의 글(1986), 29쪽·41쪽.
鄭四震,≪守庵集≫권 2, 愚巷洞契約文.
宋 亮,≪愚谷集≫권 1, 附社中條約.

 예를 지키려면 여러 조건이 충족되어야 할 것이었다. 특히 임란과 같은 대혼란기에서조차 그러한 것을 강조하기는 어려웠다. 사망자가 대량 발생한 전쟁 중에 모두가 상복을 입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군주인 선조의 생각이고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0451)≪宣祖實錄≫권 48, 선조 27년 2월 계해. 이는 임란뿐만 아니라 호란 직후에도 민풍이 크게 무너지고 예속이 전혀 없어졌다고 지적되었다(≪仁祖實錄≫권 44, 인조 21년 11월 병오). 그러한 유교의례의 준용을 가로막는 현실은 다양하였다. 음양·풍수, 불교, 무속뿐만 아니라 기존의 조직이라든가 역의 부담, 경제적 상황, 역질,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구래의 습속이 영향을 미쳤다.0452)≪明宗實錄≫권 17, 명종 9년 9월 계묘.

 常漢이 향약에 들지 아니하고 사사로이 香徒를 만드는 자는 관에 알려 그를 깨도록 하였다.0453)李崇逸,≪恒齋集≫권 4, 宜寧縣榜諭文·鄕約定規. 비록 향촌사회에서 장례에 이용되는 향도마저 금하고 향약조직으로 대체하려는 것이었다. 의례를 지키게 하려고 예를 지키지 아니한 자를 처벌하든지 아니면 예를 행하는 것을 표창하고 장려하였다. 상중에 지켜야 할 일을 지키지 아니한 관리들을 처벌한다든가 상중에 과거에 응시한 자에 대해 처벌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상을 지내도록 관리에게 급료를 미리 지급한다든가 정표를 강화한다든가 하는 것이었다.

 물론 정려에서 효자·열녀·충신으로 표창되는 것 자체가 직접적인 예속의 변화사례는 아니었다. 예컨대 효행을 표창하는 경우에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는 예속일 수 있으나 때로는 그 근본인 효라는 가치관만이 나타난 것이기도 하였다. 3년간 여막을 지켰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의례라 볼 수 있지만 斷指와 같은 것은 의례는 아니었다. 그러나 앞서 말하였듯이 예속의 변화는 근본적인 가치관 변화의 한 표현이기 때문에 그러한 정표정책은 예속의 변화를 가능케하는 조처였다.

 조선 중기 몇 차례의 예송에서 볼 수 있듯이 예학에 대한 관심은 높았다. 예학은 16세기 후반 이기심성론, 정통론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는 것과 동시에 발달하였다. 예서의 전개도 祭禮 중심의 가례서에서 喪祭禮書로, 거기에서 다시 四禮書로 발전하였다.0454)禮學과 禮書의 전개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鄭玉子,<17세기 전반 禮書의 성립과정:金長生을 중심으로>(≪韓國文化≫11, 서울大, 1990).
고영진,≪조선중기 예학사상사≫(한길사, 1995).
이는 물론 앞선 시기의 성리학의 수용 정도와 관련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16세기 성리학의 실천과 관련되는 것이었다.≪소학≫의 실천 그리고 향약의 시행과 같은 것으로 표출되었던 것으로 현실사회에서 성리학적 질서를 어떻게 실천해 나가는가 하는 문제였다. 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족관계뿐만 아니라 향촌사회에서의 인간관계를 어떻게 유지하여야 하는가라는 문제였다.0455)李泰鎭,<士林과 書院>(≪朝鮮儒敎社會史論≫, 지식산업사, 1989), 198쪽.

 이는 향촌사회의 구성에 따라서, 예를 들면 혈연적 유대가 튼튼한 지역과 그렇지 못한 지역의 차이가 있기는 하여도, 전 조선사회의 사회질서라는 차원에서 지배층에 의하여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문제였다. 전술한대로 예는 단순한 행위규범을 넘어 유교가치관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문제가 담겨있는 것이었다. 현종대의 두 차례의 예송이나 예학의 발전은 義의 실현인가 아닌가의 문제이면서 유교문화의 원리와 그 행위규범에 대한 체계화가 심화된 것이었다. 농민층의 예의 실천 여부는 농민층을 유교문화의 공유자로 만들면서 조선 전사회를 성리학적 사회로 유지할 것인가 아닌가의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로 직결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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