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3. 유교문화와 농민사회
  • 3) 의례변화의 제양상
  • (1) 관혼례의 변화

(1) 관혼례의 변화

 유교의례는≪주자가례≫가 보급되면서 점차 형성되었다. 그것은 물론 사족의 경우가 우선 대상이 되는 것이었다. 관례는 양반층 안에서도 잘 시행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0457)고영진, 앞의 책, 114쪽.≪주자가례≫에 실려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식이 없어서 10세만 지나면 加冠을 하기도 하고 20세가 되어도 가관하지 않는다”0458)≪中宗實錄≫권 34, 중종 13년 7월 경술. 朝講에서의 司諫 金希壽의 언급.는 언급이 나올 정도로 이해 내지 보급되어 있지 않았다. 吳道一은<訓士節目>에서 교육 대상을 童蒙과 冠者로 나누었지만 18세기 중엽의≪大東小學≫에서도 관례가 잘 지켜지지 않음과 그에 따라 관례를 간략히 지킬 것을 권하였다.

 혼례에서는 신랑이 신부를 맞아오는 친영례가 중심 문제였다. 우리의 경우 친영례라는 용어보다는 ‘率壻婚’ 또는 ‘壻留婦家婚’이라 부르며 당시에는 ‘男歸女家婚’이라 부른 것이었다. 이것은 단지 혼례의 3일간의 행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장가간 뒤 처가에서 처부모와 같이 살거나 처가가 그 처에게 나누어준 집에서 생활하는 것과 같이 처가에 정착하는 것을 뜻하였다. 이 습속은 17세기 후반 자녀차등상속제와 장자봉사제가 실시되면서 그 기간이 단축되어 1년 또는 반년이 되었다.0459)李樹健,<朝鮮前期의 社會變動과 相續制度>(≪한국친족제도연구≫, 역사학회, 1992), 85쪽.

 연산군 8년(1502)에 제정한<혼인절목>까지 있었지만 친영례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0460)≪燕山君日記≫권 44, 연산군 8년 5월 기해.
≪中宗實錄≫권 97, 중종 36년 12월 경진. 이 혼인절목은 혼례 전반을 규정한 것이 아니라 혼인 때의 사치를 금하는 것이 주 내용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 혼례에 관해서는 장병인,≪조선전기 혼인제와 성차별≫(일지사, 1997) 참조.
혼례 때에 모두 전해오는 속례를 따르고 있었던 터에 선조 3년(1570) 정월에 趙穆이 가례절목을 준용하여 딸의 혼례를 치룬 것은 주목할만한 사건이었다.0461)趙 穆,≪月川先生文集≫月川先生年譜. 속례에서는 혼인날에 촛불을 밝혀놓고 신부를 들여보내고 그 다음 날 覽寢이라 하여 신랑의 친지들이 그 처가를 방문하여 酒食을 대접받고 3일째에 부부가 비로소 상견례를 하는 것이었다. 가례에 의하면 혼인날에 친영례를 행하는 것인바 여러 밤을 지내고 상견례를 하는 것을 유자들은 외설적이며 무례하다고 비판하였다.0462)李濟信,≪淸江先生鯸鯖語≫.≪주자가례≫의 수용으로 점차 남침이 없어지고 친영례를 행하게 되기는 하였으나 앞서 지적하였듯이 16세기 중엽에 유교의례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지는 않았다. 조목이 행한 친영례를 원근에서 서로 본받고자 한 사람들은 사족들이었을 것이다. 그 직후인 선조 7년에도 諫院에서 혼례가 정식이 없음을 말하며≪주자가례≫를 시행할 것을 요청하고 있고, 이에 선조는 혼례는 고장마다 다른 것이 전례이고 새로운 예를 만들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0463)≪宣祖實錄≫권 8, 선조 7년 9월 기묘. 군주마저 일률적인≪주자가례≫적용을 거부하고 있을 정도였다.

 동몽교육에서나 향약에서 혼례의 구체적인 절차를 직접 가르치고 규정한 것은 아니었다.≪계몽편≫에서 부부관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인간관계의 출발로서의 의미이지 혼례를 직접 가르치는 것은 아니었다. 향약에 혼례가 수록된다 하여도 구체적인 의례를 시행키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노동력의 상호부조적인 성격이 짙었다. 그러나 그 부조의 내용을 보면 향약원들의 혼례가≪주자가례≫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 3년(1611)에 朴絪은 陜川에서 三里鄕約을 만들면서 婚姻相助條를 두었다.0464)朴 絪,≪无悶堂集≫권 3, 雜著, 三里鄕約立議. 이 향약은 향촌민 전체를 상·중·하 셋으로 나누었다. 3리의 인물을 모두 명부에 기록하고 士夫를 一類로 하여 동서로 나누고, 평인·서얼·서민·僕隷를 각 1류로 나누었다. 이 가운데 사부가 상이고 평인이 중이며 서얼 이하를 하로 하였다. 혼가행차 때에 해당 마을의 상유사가 마을 장정을 가려 뽑아 上行은 40명, 中行은 20명, 下行은 10명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친영례의 경우에 신부가 속한 마을 사람이 雉鷄 가운데 각 1수를 돕는데, 士夫는 사부가 돕고 평인 이하는 그 마을 중에서 서로 돕도록 하였다. 혼가에는 해당 리의 里統이 마을 장정을 이끌고 鋪陳이나 횃불, 馬草와 같은 일을 돕도록 하였다. 신분에 따른 노동력의 제공 정도만 규정하고 친영례의 구체적인 내용을 싣고 있지는 않지만 모두가 따라야 할 친영례로 자연스레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이 향약에서 공동노동력을 동원하여 지켜야 할 의례의 기준은 향촌사회의 상층부인 재지사족들의 의례인 것이었다. 물론 金榦의 동계에서도 敦風俗條에서 혼인이 별도로 처리되고 강조되었지만 그것은 경제적인 상호부조에 그치는 것이고≪주자가례≫로 표현되지는 않았다. 喪禮도 마찬가지이듯이 노동력의 제공 혹은 경제적인 부조가 곧 의례를 규제하는 것은 아니었다. 부물을 내는 혼인의 예식이≪주자가례≫이었는지 아닌지는 직접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6세기 양반조차 잘 지키지 않던 친영례가 17세기 향약조문에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친영례 시행을 말해줌과 동시에 향약을 통한 의례의 보급을 함께 말하는 것이다. 향약에 의하여 통제되는 향촌민이 그를 주도하는 사족들의 의례를 따르지 않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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