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3. 유교문화와 농민사회
  • 3) 의례변화의 제양상
  • (2) 상제례의 변화

(2) 상제례의 변화

 관혼상제 의례 가운데 복잡하여 지키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지던 것이 상제례였다.≪경국대전≫ 禮典에는 奉祀·喪葬 조항을 두고 있는데 특히 관인들의 봉사뿐만 아니라 庶人의 봉제사에 대해서도 규정하였다. 刑典 推斷에서는 “상을 당하기 전에 범행한 徒刑·流刑 이하의 죄가 상중에 발각된 자는 10惡의 죄를 제외하고는 贖錢을 받으며 혹 체형을 받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백일 후에 처벌을 하도록” 하였다. 그만큼 상을 당하는 것은 범죄로 인한 처벌을 감하거나 유예할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이 상제례는 일반 풍속과 불교의례의 적지않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유교의 수용과 함께 의례의 충돌이 가장 심한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종전의 의례를 유교의 것으로 대체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쌍계적 가족제도, 同姓결혼, 異姓收侍養, 男歸女家婚, 자녀균분상속제, 子女輪回奉祀制 그리고 친족개념 등의 문제들을 유교 입장에서 정리하여야 하는 것이었다. 그 방향은 부계친족 중심의 가족제도, 동성불혼, 異姓不養, 친영례, 자녀차등상속제 및 長子奉祀制 등이었다. 물론 이러한 문제들은 상호 연관되는 것이어서 특히 남귀여가혼·자녀균분상속제·자녀윤회봉사와 같은 것이 서로 인과관계를 가지면서 점진적으로 해결되었다.0465)李樹健, 앞의 글, 113∼114쪽.

 상제례의 실행은 또한 종법제도의 이해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종법의 문제는 좁혀서 보면 의례문제는 아니었다.0466)종법제도의 수용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池斗煥,<朝鮮前期의 宗法制度 理解課程>(≪泰東古典硏究≫1, 1984).
박연호,<조선전기 士大夫禮의 변화양상「家禮」와 宗子法을 중심으로>(≪淸溪史學≫7, 1990).
그러나 종법의 문제는 주자성리학의 정통론을 온전히 수용하는가 아니하는가의 문제와 함께 종법결정과 관련한 제사권의 상속, 나아가서는 재산의 분재 등 여러 문제가 중첩되어 있는 것이었다. 종법수용의 문제는 성리학의 수용과 관련하여 변형되어 수용되었다. 의리·명분론에 입각한 성리학의 정통론을 수용하는가 아니면 혈연 또는 그 결정권을 父가 가진 것으로 보는가 하는 문제였다.

 종법수용과정은 일률적이지 않았다. 세종대에는 宗子만이 제사를 주관하는 원칙이 세워지고 입후자가 친자로서 承重·奉祀하는 원칙이 세워졌다. 이는 정통론에 입각한 종법제로 보이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兄亡弟及의 혈통론이 그와 같은 형식을 빌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의리·명분의 정통론이 쇠퇴한 세조대에는 제3자 승중이나 증손이 입후하여 승중·봉사하는 일까지 있었다. 성리학을 성리학으로 온전히 이해하게되는 퇴계와 율곡 단계에 이르러 입후 뒤에 친자가 태어나도 입후자가 승중·봉사하는 종법제로 이해하게 되었다.

 收·侍養子가 모두 입후를 목적으로 하는 것만은 아니지만 위와 같은 입후를 하는 길 가운데 하나가 수·시양이었다. 17세기에도 수·시양자의 재산상속을 둘러싼 적지 않은 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물론 양반층에 집중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收·侍養父의 신분이 대체로 중인 내지 양인이라는 점에서 보면 일반 농민의 문제이기도 하였다.0467)崔在錫,<朝鮮時代 養子制와 親族組織(하)>(≪歷史學報≫87, 1980), 76쪽. 아울러 그것은 종법제의 시행과 관련되는 것이고 동시에 그와 동일한 준거인 성리학의 의례를 준용하는 문제였다.

 연산군 12년(1506)에 “이제부터는 외조모·처부모의 忌祭를 지내지 말도록” 전교하였다는 것은0468)≪燕山君日記≫권 61, 연산군 12년 정월 경자. 유교문화가 세워지면서 상제례 역시 점차 종전의 예속을 조정하면서 점차≪주자가례≫의 시행으로 옮아가게 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었다. 제례는 그야말로 집집마다 다르다는 것이 속설로 알려질 정도였다.

 이이는≪학교모범≫에서 상제례를 강조하면서 그것이 어버이 섬김의 하나임을 말하였다. 그는≪擊蒙要訣≫에서 제사는 마땅히≪가례≫에 의하여 반드시 사당을 세워 선조의 신주를 모시고 祭田을 두고 祭器를 갖추어 宗子가 주관하도록 강조하고 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였음을 지적하였다. 이 시기 제사 가운데 묘제와 忌祭, 辰日祭祀 및 단오, 추석 등 속절의 제사는 내외손이 돌아가면서 지내고 있었다. 종자가 행하는 것은 시제만이었다. 그리고 기제의 경우에도 신주에 제사지내지 않고 지방을 붙이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윤회봉사는 자녀균분상속제가 그 배경이었다.0469)李樹健, 앞의 글, 87쪽.

 16·17세기에 각종 예서의 편찬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곧 예속의 수용이 진행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대부조차≪주자가례≫를 지키기 어려워 그를 집례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일반에 의한≪주자가례≫의 수용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하였다. 사대부조차 상제례를 업신여겨 상제례를 줄이고 피하는 각종의 속설이 많이 유행되었다. 종전의 관습이나 불교의례 또는 현실적인 경제적 처지 등은 이러한 가례의 수용을 더욱 어렵게하는 것이었다.

 ≪주자가례≫를 준용한 경우에도≪주자가례≫라는 큰 틀은 따르되 실제의 절차에서는 구래의 습속 등이 결합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3년상을 무덤 옆에서 지내는 廬墓制는 효행으로 인정되어 정표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본디≪주자가례≫를 따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주자가례≫가 보급되면서 이것 역시 문제로 되지 않을 수 없었다.≪주자가례≫를 따라 집에서 返魂의 예를 행하려면 여묘제는 자연 행할수 없는 것이었다.0470)高英津, 앞의 글(1991), 38쪽. 가례의 준용을 주장하는 양반층으로서는 일반인들이 반혼을 이유로 시묘살이를 피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을 방도는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이는 예법에 따라서 지킬 수 있으면 반혼을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시묘살이를 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이러한 것은 한편으로는≪주자가례≫의 수용에 따라서 구래의 예속이 변화하게 되는 사례이기도 하였다.

 ≪주자가례≫에 따르지 않는 경우에 대체로 그것을 胡風이라 여긴 것으로 보인다. 유교에서의 효가 강조되고 있었지만 촌민이 상시에는 어떻게 해야 養親을 하는 것인지 모르고, 돌아가신 후에는 매장·제사를 餘事로 안다는 지적은 이 시기의 양반층이 보는 농민의 한 모습이었다. 주육을 베풀고 마치 잔치처럼 치르는 것이었다. 따라서 향약의 부칙으로 정하여 일체 금하도록 조처하였다.0471)李 㙉,≪月澗集≫권 3, 書約 下.

 그러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의례의 교육이었다.≪주자가례≫를 그대로 주지시키는 것으로는 적절치 못하였던 것으로 판단되어 내용을 이해하기 쉽도록 줄이든지 한글로 바꾸어 보급하였다. 앞서의≪격몽요결≫과 같은 서적을 보급하였고≪주자가례≫를 주석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申湜의≪家禮諺解≫, 金長生의≪喪禮諺解≫, 安某의≪家禮喪葬三禮諺解≫와 같은 언해서들이 나오게 되었다.0472)고영진, 앞의 책, 195∼213쪽. 김장생은<喪禮諺解序>에서 禮 가운데 상례가 가장 번다한 것으로 지적하였다.0473)金長生,≪沙溪全書≫권 5 (≪石潭及門諸賢集≫1, 亞細亞文化社, 1982), 80쪽. 예를 안다고 하는 사람도 상을 당하여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궁벽한 향촌에 사는 사람이야 어찌 그 예절을 알겠는가 하여, 비록 婦人이 이를 갖고도 실행할 수 있도록 언해한다는 것이었다.

 상하가 같이 참여하는 향약에서도 상례를 점차 상세하게 규제하면서 사족만이 아닌 일반인을 그 대상 범주로 확대하였다. 임란 이후 古縣洞約 역시 상하가 함께 참여하는 향약으로 변환하였다.0474)고현동약의 약문은 朴翼煥,<泰仁地方의 古縣洞約考>(≪邊太燮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1985)에 의거하였다. 현재 전하는 최초의 약문에서는 다른 향약에서와 같이 喪葬에 모두 모여 돌보아주도록 되어 있는 정도였다. 2차 증보한 인조 22년(1644)의 규약에는 의례를 지키기 위한 구체적인 부조가 규정되어, 혼인과 父母妻子의 初喪에는 상하가 백미 7合씩을 내어 도와야 했다.

 효종 4년(1653)의 조목에 증보한 내용은 주로 洞會가 소유하고 있는 什物의 사용에 관한 것이었다. 예속을 지켜나가고자 할 때의 장애 요인 가운데 하나는 경제적 여건이었다. 그것을 부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冠帶나 喪輿를 세를 주고 빌려주거나 파는 것이었다. 이는 곧 의례를 지키기 위한 보완적 조처였다. 이 물건들은 동약원들에게 대여해주는 것이었지만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도 세를 받고 빌려주는 것이었다. 현종 7년(1666) 즈음의 증보에서는 다른 면에 살고 있는 동약원의 자식이나 조카들에게도 세를 받고 빌려주었다.

 박인의 삼리향약은 혼인에 관한 조목과 같이 상례를 상세히 규정하였다. 성빈·영빈·회장·조묘 등의 일을 맡아서 하였다. 향도조직을 대체할 정도의 짜임새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아, 향도를 이용함으로 따르게 될 전래의 예속 시행을 피하고 유교예속을 준용케 하려는 것이었다. 즉 유교예속의 실천을 실질적으로 가능하도록 노동력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상례는 사실 노동력의 확보가 어느 예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진주의 僧 法藏과 같이 士人의 자제이면서도 그 모친을 장례지내기 위하여 향도계에 드는 경우가 있는 것이었다.0475)≪晉陽誌≫권 3, 孝行(≪慶尙南道輿地集成≫, 慶尙南道誌編纂委員會, 1963). 예를 들어 앞서의 삼리향약의 경우에는 상상의 경우에는 삼리의 연정이 모두 동원되고 중상이면 50명 하상은 20명이 동원되었다. 상주 魯谷향약의 擔持軍도 30명이었고0476)<魯谷鄕約>(≪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4인, 1986), 251쪽. 鄕約題名錄序는 李萬敷(1664∼1732)가 1708년에 쓴 것이지만 座目의 부조수혜 내용을 보면 17세기 후반 시행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城山睦隣契에서는 30명을 喪軍의 기본 단위로 삼았다. 그에 비하여 폐농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농사를 짓기 위해 제공하는 장정의 수는 20명을 넘지 못하도록 정하였다.0477)≪城山睦隣契憲≫補入契令(嶺東地方 鄕土史硏究資料叢書(一), 關東大 嶺東文化硏究所, 1989). 물론 상은 일시적이고 농사는 그와 다르다는 것을 고려하여도 적지 아니한 인원이었다.

 이 성산목린계에서는 상계이든 중하계이든 초상으로부터 영장에 이르기까지 맡을 호상유사를 정하도록 되어 있었다. 물론 상하가 참여하는 향약이라 하여도 그 향약의 운영 형태에 따라서 의례의 시행은 정도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喪에 사족이 직접 주관하지 않는 것을 보면 의례의 준용에 한계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가령 하계에 속한 자가 상을 당하면 부물에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상유사나 도유사는 노를 보내어 弔禮를 할 뿐이었다.0478)金 榦,≪厚齋集≫권 38, 頒示各面洞契約. 그렇다고 하여도 향약 자체가 유교예속의 준행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그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유교의례의 준용을 현실적으로 강제하고 있다고 하겠다. 향약은 직접적으로 예속을 서로 지키도록 약문에 규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강제에 의하여 지켜지는 것이었다. 단순히 가마니를 낸다든가 아니면 노동력만을 제공하는 경우에도 의례의 준용을 전제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의례의 준용은 앞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지 종결된 문제가 아니었다. 종전과 마찬가지의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다. 3년상을 지내지 않는다든가, 거상 중에 결혼한다든가, 부모가 돌아가심에도 타향에서 빨리 돌아가지 아니하고(不奔喪), 장례와 제사를 지내지 않고, 喪葬이나 練祥(小祥)일에 혹 인리를 불러 술마시고 잔치를 한다든가 혹은 무격을 많이 베풀어 하루 종일 징이나 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에 심한 자는 告官토록 하였다. 이와 같이 향약에서 고관의 조항을 둔 것은 의례의 준용에서도 강제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었다. 婚姻喪祭의 경우에 이유없이 때를 놓치면 처벌되는 것이었다.0479)李崇逸,≪恒齋集≫권 4, 宜寧縣榜諭文·鄕約定規.
金 榦,≪厚齋集≫권 38, 通諭境內上下約.
향약문 역시 글자를 모르는 상한을 위하여 한글로 풀어 알리는 것 또한 병행하던 일이었다. 앞서의 고현동약에서는 諺書로 약조를 베껴 각 리에 나누어주어 잘하고 잘못하는 것을 적어 남녀가 하나 같이 다 알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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