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3. 유교문화와 농민사회
  • 4) 농민사회의 예속 변화의 몇 문제

4) 농민사회의 예속 변화의 몇 문제

 유교문화의 확산은 의례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왕의 풍속을 변화시켰다. 관상감에서 주관하는 儺禮는 대궐에서도 행하던 역귀를 몰아내는 행사였다. 인조 원년(1623)에는 나례를 정지하고 숙종 18년(1692)에 오례에 의하여 설행하도록 하였다. 踏橋와 같은 것은 부녀자들의 것으로부터 남자들의 것으로 변하기도 하였다. 답교는 부녀자들이 열두 개의 다리를 밟으면 열두 달의 재앙이 없어진다 하여 보름날 저녁에 행하던 것이었다. 그런데 부녀자들의 뒤를 무뢰한들이 삼삼오오 따라다녀 추잡하다 하여 명종 때에 금하여 답교하는 풍속이 끊어졌다. 그러나 남자는 귀천을 막론하고 무리를 이루어 다리를 밟는 것이 풍속이라는 것이다.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하여 금지된 것이 변질된 모습이었다.0480)나례와 답교에 대해서는 李肯翊,≪燃藜室記述≫別集 권 12, 政敎典故 俗節 雜戱.

 16세기 차별적으로 준용되던 의례는 17세기에 들어 점차 일반농민에게까지 확산되었다. 의례는 상하의 질서로 유교예속의 보급은 보다 분명한 신분차별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러나 거꾸로, 차별없는 의례의 준용은 신분적 차이마저 부정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문화의 기본 원리를 확대해 나가는 과정에서 제기되는 문제 가운데 하나로 문화의 원리를 공유하고 문화를 공유함으로써 오는 동류의식(we-feeling)의 문제였다. 그것은 외형상으로는 사치한 풍속이 문제인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 사대부와 서인의 예가 차별 없는 것이 문제였다. 혼인이나 장례 모두 마찬가지였다.0481)≪中宗實錄≫권 44, 중종 17년 4월 무자·권 97, 중종 36년 12월 경진.
≪孝宗實錄≫권 4, 효종 원년 7월 무오.

 ≪禮記≫曲禮 上에서의 “예는 庶人에게까지 이르지 않는다”라는 것은 예의 차별적 준용을 적용하려는 입장의 근거 가운데 하나였다.0482)≪中宗實錄≫권 64, 중종 23년 12월 을유. 따라서 임란 이후 재지사족은 양반이나 서인이 ‘天命之性을 함께 받음을 내세워 같은 목적을 수행하는 것’으로 설명하게 되는 것이었다.0483)南夢賚,≪伊溪集≫권 4, 沙村里約重修序.

 이러한 조선 중기 이후 사회조직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간의 향촌교화의 여러 기구가 통합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향약·향음주례·약회·강회 등이 혈연적 기반 위에 서원 혹은 서당과 같은 구체적인 공간을 갖고 그리고 洞이라는 생활권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다. 유교문화는 이와 같이 통합된 조직을 통하여 농민층에게 더욱 확산되어 갔다.

<金武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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