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4. 순국·순절자의 포정
  • 1) 사림의 정표운동

1) 사림의 정표운동

 旌表란 선행을 칭찬하여 이를 여러 사람에게 알리는 것을 뜻하며, 旌閭는 孝子·忠臣·烈女들을 표창하여 임금이 그 집이나 마을 앞에 세우도록 한 붉은 門이다. 다른 명칭으로는 旌門·홍살문[紅箭門]·綽楔·棹楔·紅門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신라 때부터 발생하여 고려에 들어와서 적지 않게 건립되었으며,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조선왕조에서는 전국적으로 상당수 세워졌다. 즉 조선왕조는 유교적인 지배윤리를 위한 도덕규범을 장려하기 위해 효자·충신·열녀들에게 정문·정려·復戶(徭役의 부담을 감면하는 일)·賞職·賞物 등으로 포상하였던 것이다.0484)朴 珠,≪朝鮮時代의 旌表政策≫(一潮閣, 1990) 참조. 따라서 사림들은 정표운동을 통하여 국가로부터 포상을 받고자 적극 추진하였다. 특히 사림의 정표운동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전란 이후에 더욱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자기 가문의 명예를 빛낼 뿐만 아니라 가문의 권위를 유지 발전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亂時死節人 등에 대한 포상은 정표대상자의 수가 매우 많아 진위가 서로 섞이고 허실을 분별하기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전란 이후에 포상되지 못한 경우 그 후손들이 적극적으로 정표를 받고자 하였다. 예컨대 충신의 경우에 있어서 그 후손들이 上言하여 정표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故知事 朴蘭英의 경우 효종대에 그 자손을 錄用하도록 명하였으나 정표의 은전을 시행하지 않게 되자, 숙종대에 이르러 그 자손인 朴慶祉가 상언하여 청하고, 예조에서 허락할 만하다고 말하니 정표를 명하였다.0485)≪肅宗實錄≫권 4, 숙종 원년 9월 임자. 고 부사 全尙毅는 정묘호란에 龜城을 지키다가 平安兵使 南以興, 安州牧使 金浚과 함께 전사하였는데 전상의는 자손이 쇠잔하여 정려하는 은전을 미처 청하지 못하였다. 숙종대에 이르러 그 후손의 呼訴로 특별히 정려하고 金浚의 祠廟에 배향하도록 하였다.0486)≪肅宗實錄≫권 15하, 숙종 10년 8월 무술. 군수 李惇五와 학생 李崇仁은 각각 병자호란, 임진왜란 때에 순절함으로써 추증되었는데, 숙종대에 와서 그 아들의 청으로 함께 정려를 명하였다.0487)≪肅宗實錄≫권 15하, 숙종 10년 10월 임인. 昌原府吏 黃是憲은 병자호란 때에 전사하였는데 숙종대에 이르러 아들 黃羽龍이 조정에 상언하여 정려를 명하였다.0488)≪肅宗實錄≫권 21, 숙종 15년 5월 경신. 盧挺弼은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순절함으로써 조정에서 이미 贈官으로 포상하였는데, 숙종대에 와서 그 아들이 상언하여 父의 충열을 陳達하고 정려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단지 자손을 錄用하라고 명하였다.0489)≪肅宗實錄≫권 19, 숙종 14년 3월 병자. 고 현령 李有吉(故判書 李後白의 후손)은 深河役(後金이 遙東을 침범했을 때에 명나라의 요청으로 姜弘立을 都元帥로 하여 군사 1만 3천 명을 보냈다가 패전한 사실을 말한다)에 永柔縣令으로서 종군하였다가 金應河와 함께 사절하였으나 당시 광해군대에는 포상이 없었다. 이에 숙종대에 이르러 그의 손자 李碩耈가 상언하여 恤典을 청하였으나 예조에서 오래된 일이라 하여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정언 李彦綱이 상소하여 그 일을 말하면서 李廷龜가 지은 제문을 증거로 삼았는데, 이에 숙종은 정표하고 추증하게 하였다.0490)≪肅宗實錄≫권 10, 숙종 6년 12월 임진. 故武臣 張繼先과 吳稷은 심하역에 종군하여 전사함으로써 효종대에 증직하였다. 숙종대에 와서 그 후손들이 상언하여 정려를 청하자 예조에서는 이미 贈典을 받았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는데 숙종이 특명으로 아울러 정려하였다.0491)≪肅宗實錄≫권 12, 숙종 7년 10월 을유. 折衝將軍 金夏鼎은 상언하여 그의 조부 金雲이 심하역에서 사절한 일을 진달하니 추후하여 정려하도록 명하였다.0492)≪肅宗實錄≫권 24, 숙종 18년 10월 갑진. 故出身 金宗立은 병자호란에 순절하였으나 褒獎의 典이 미치지 않았는데, 숙종대에 와서 그 손자인 출신 文商이 억울함을 말하여 특별히 정려를 명하였다.0493)≪肅宗實錄≫권 40, 숙종 30년 8월 갑오.

 이와 같이 臨亂殉節人으로서 많은 인물들이 이전에 포상되었는데, 숙종대에 와서 그 후손들의 상언으로 인해 정려를 더하고 있다.

 숙종대에는 가문 위주의 정표도 적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사절한 高從厚(高敬命의 아들)에게 증직을 명하고 그 형 高因厚에게는 賜謚하였다.0494)≪肅宗實錄≫권 19, 숙종 14년 3월 경진. 그리고 高敬兄(高敬命의 庶弟)에게도 증직을 명하였다. 金時若(晉州牧使 金時敏의 庶弟)은 임진왜란 때에 晉州城에서 공을 세워 昌城府使가 되었으나 호란 때에 두 아들과 함께 순절하여 참판으로 증직되었다.0495)≪肅宗實錄≫권 21, 숙종 15년 10월 계유. 童子 金壽全(文忠公 金尙容의 孫)은 나이 13세에 江都에서 조부를 따라 垣 潗死하여 정문을 명하였다.0496)≪肅宗實錄≫권 39, 숙종 30년 3월 갑인. 李莞(李舜臣의 姪)은 정묘호란 때에 순절함으로써 인조대에 贈兵判하였으나 정표의 典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숙종대에 와서 정려하였다.0497)≪肅宗實錄≫권 39, 숙종 30년 7월 계해.

 이와 같이 17세기에는 사림들이 정표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정표가 더욱 쉽게 주어졌다. 17세기 사회는 문벌이 중시되는 사회로 후손들이 선조 가운데 忠節·孝烈者들을 가졌다는 사실은 자기 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높여주는 것이었고 따라서 가문을 빛낸 顯祖를 밝히고자 사림들은 정표를 청하는 상언을 하였던 것이다. 특히 숙종대에 오면 후손들이 정표를 청하는 사례가 많이 있었으며, 구체적 행적의 기록없이 수십 명, 수백 명씩 포상되는 경우도 있어 포상이 이전보다 쉽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숙종대에는 정문·정려가 증설되었으며, 정표된 충신·열사의 대부분이 書院이나 祠宇에서도 제향되고 있는 인물들이라는 점이 주목된다.0498)≪典故大方≫書院 鄕祠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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