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Ⅳ. 학문과 종교
  • 1. 성리학의 발달
  • 1) 학파의 분화

1) 학파의 분화

 성리학이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으로 채택되어 점차 보편화되고 그 이해의 심도를 더하여 완전히 정착하게 되는 것은 조선 중기의 명종, 선조대에 이르러서이다.0524)조선 전기 성리학의 이해과정에 관해서는 金恒洙,<16세기 士林의 性理學理解>(≪韓國史論≫7, 서울大, 1981). 이 시기에 이르면 성리학적 질서와 가치관이 민간에까지 보편화될 뿐 아니라 성리학에 밝은 많은 학자들이 등장하여 이론적으로도 확고한 틀을 갖추게 된다. 조선성리학의 확립기에 해당되는 이 시기의 이름난 유학자들을 보면 명종대의 晦齋 李彦迪과 花潭 徐敬德을 선구로 하여 영남에는 退溪 李滉, 南冥 曺植이 있었고 호남에는 一齋 李恒, 河西 金仁厚, 高峰 奇大升, 眉巖 柳希春 등이 있었으며 경기에는 蘇齋 盧守愼, 龜峰 宋翼弼, 栗谷 李珥, 牛溪 成渾 등이 있었다. 이들 유학자들의 지역적인 분포만 보아도 당시 성리학의 보편화 정도를 알 수 있다. 이들 유학자들은 각기 일가를 이루어 이후 조선 성리학의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그 중에서도 퇴계와 율곡의 영향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퇴계에 의해서 주자학 중심의 성리학으로 조선성리학이 정리되는 과정에서 이미 양명학을 비롯한 非程朱的 사상은 비판받기 시작했고 이 때 이미 조선성리학은 교조적인 배타성을 띠고 시작되었다 하겠다. 조선 중기 이후 성립되기 시작한 각 학파는 이러한 주자학의 배타성 위에서 각기 자기학파가 주자학의 정통임을 내세우면서 분파를 형성해갔다. 그리고 각 학파간에는 주자학에 대한 태도나 해석의 차이로 말미암아 학문적으로 대립하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정치적인 당파와 결합됨으로써 학문적 대립은 정치적인 대립으로 바뀌어 상대방의 학설에 대해 무조건적인 비판으로 일관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주자학의 해석이 한층 치밀해지고 조선 전기의 주자학 해석이 지녔던 논리적 난점이 재검토되면서 새로운 성리학 조류를 형성해 나가게 된다.

 조선 중기에 들어서면서 학파라고 부를 수 있는 학자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하는데 학문적 특색이 뚜렷하고 학문집단으로서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학파로는 화담학파, 남명학파, 퇴계학파, 율곡학파를 들 수 있다. 이 중 시기적으로 가장 먼저 성립한 학파는 화담학파이다. 일찍이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화담에 은거하여 독창적인 기일원론에 입각한 성리설을 전개하고 강학에 종사한 서경덕과 그의 문인인 蓮坊 李球, 草堂 許曄, 思庵 朴淳, 瑟僩 朴民獻, 杏村 閔純, 耻齋 洪仁祐, 土亭 李之菡 등이 화담학파에 속하는 학자들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이구, 허엽, 박순 등이 화담의 학설을 잇고 또 퇴계와 율곡의 화담 비판에 대해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학파로서의 성격을 유지했으나 학문적으로는 화담의 학설이 지닌 주정적인 성격과 도덕성을 형이상학적 차원에까지 끌어올리지 못한 기일원론의 한계 때문에 또 정치적으로는 허엽 등은 동인에, 박순 등은 서인에 가담함으로써 단일학파로서의 성격을 계속 지니지 못하고 퇴계학파와 율곡학파에 흡수되었다.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성리설의 탐구와 의리의 실천을 강조하며 평생을 보낸 남명의 문인 省庵 金孝元, 德溪 吳健, 東岡 金宇顒, 萊菴 鄭仁弘, 守愚 崔永慶, 忘憂堂 郭再祐 등으로 이루어진 남명학파는 한때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하면서 조선성리학의 일익을 담당했으나 인조반정으로 북인세력이 몰락하면서 퇴계학파에 흡수되었다. 그렇지만 실천궁행을 강조하는 남명의 학풍은 임란 때의 의병운동에 적극 가담하는 등 조선 후기까지 면면히 이어졌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는 조선 중기 성리학의 성과를 집대성한 두 거봉으로 이들의 주자학 해석에 대한 미묘한 차이는 이후 조선성리학의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들의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후기에까지 학맥을 이어가면 조선성리학의 중심축을 이룬 학파가 퇴계학파와 율곡학파이다. 퇴계학파와 율곡학파는 처음에는 퇴계의 문인과 율곡의 문인으로 이루어진 학문적 집단으로 출발했으나 이들 학파의 중심이 되는 학자들이 남인과 서인이라는 당파의 주축 인물이 됨에 따라 정치적으로 지역적으로 가까운 학자들이 각 학파에 가세하게 되어 마침내는 조선의 성리학자 대부분이 퇴계학파나 율곡학파 가운데 어느 한쪽에 속하게 되었다.

 퇴계학파는 퇴계의 직전 제자인 月川 趙穆(1524∼1605), 西厓 柳成龍(1542∼1607), 鶴峯 金誠一(1538∼1553)과 퇴계·남명 양문을 출입한 寒岡 鄭逑(1543∼1620) 및 북인의 몰락으로 퇴계학파에 흡수된 남명계의 유학자들로 이루어지는데, 이 가운데 학봉·서애·한강은 퇴계문하의 삼걸로 일컬어지며 이들로부터 퇴계학파 내의 여러 분파가 생겨났다. 학봉의 문인들과 서애의 문인들은 서원배향의 위계문제 때문에 일찍이 호파와 병파로 나누어졌고 후에 한강-미수로 이어지는 기호 퇴계학파와 한강-여헌으로 이어지는 학파가 형성됨으로 해서 퇴계학파는 네 분파로 나누어져 발전하게 되었다.0525)李丙燾는 여헌이 한강을 따라 종유했고 서애와 가까웠으므로 여헌과 그 문인을 퇴계학파의 사소문파 중의 하나로 간주했으나(李丙燾,≪韓國儒學史略≫, 亞細亞文化社, 1986, 283쪽), 劉明鍾은 여헌학의 독창성을 강조하여 퇴계학파에 넣지 않았다(劉明鍾,≪韓國思想史≫, 以文社, 1981, 408쪽).

 이들 학파의 사상적 특색을 살펴보기 전에 우선 이들 학파를 이루었던 유학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퇴계학파의 중심을 형성한 학파는 근래까지도 그 학맥을 이어온 학봉의 문파인데 학봉의 퇴계존숭은 敬堂 張興孝를 거쳐 存齋 李徽逸(경당의 외손), 葛庵 李玄逸, 密庵 李裁(갈암의 아들), 大山 李象靖(밀암의 외손)으로 이어졌고, 다시 立齋 鄭宗魯, 定齋 柳致明, 西山 金興洛(학봉의 후손), 深齋 曺競燮, 損齋 南漢朝를 지나 凝窩 李源祚, 寒州 李震相, 俛宇 郭鍾錫 등의 한말 理學者에까지 연결된다. 서애계의 학맥은 愚伏 鄭經世, 修巖 柳袗(서애의 계자), 拙齋 柳元之(수암의 조카), 活齋 李, 息山 李萬敷, 淸臺 權相一로 이어진다. 한강의 문인도 일파를 형설할 정도로 많았는데 畏齋 李厚慶, 樂齋 徐思遠, 朽淺 黃宗海, 眉叟 許穆 등이 대표적인 한강의 제자였다. 이 중 미수 허목에 의하여 기호의 퇴계학파가 성립되었는데 星湖 李瀷, 順庵 安鼎福, 下廬 黃德吉, 性齋 許傳으로 학맥을 잇는다. 한강을 종유한 여헌의 문인으로는 鶴沙 金應相, 雙峰 鄭克後, 修巖 柳袗을 들 수 있다.

 이들 퇴계학파의 네 분파 중 학봉계와 서애계는 퇴계의 학설을 부연설명하여 퇴계의 理氣互發說을 중심으로 하는 성리설을 그대로 잇고 있으나 미수계와 여헌계는 퇴계학파에 속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사상은 퇴계의 학설과 꼭 부합하지는 않는다. 여헌과 미수가 모두 탈주자학적인 경학을 전개한 白湖 尹鑴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도 畿湖南人(기호의 퇴계학파)의 성격과 더불어 흥미있는 점이라 하겠다.

 율곡학파는 율곡의 문인과 율곡의 교우인 우계 성혼과 구봉 송익필의 문인들 그리고 화담계의 유학자 일부가 합쳐져서 형성되는데 당파로는 서인과 연결되며 지역적으로는 기호와 연결된다.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서인에 속했던 沈義謙·朴淳·金繼輝·鄭澈·尹斗壽·尹根壽 등은 율곡과 우계의 교우였고 趙洽·具宬 등은 우계의 문인이었으며, 趙憲·李貴·黃愼·安邦俊·鄭曄 등은 율곡·우계 양문에 모두 출입했던 학자들이다. 율곡의 학통은 본래 구봉의 문인이었던 沙溪 金長生(1548∼1631)으로 이어지고 그의 아들인 愼獨齋 金集(1574∼1656), 尤菴 宋時烈(1607∼1689), 同春堂 宋浚吉(1606∼1672)을 거쳐 遂菴 權尙夏(1641∼1721), 農巖 金昌協(1651∼1708)으로 이어진다. 송시열대에 와서 율곡학파는 조선성리학의 정통임을 자부하게 되는데 이 무렵 율곡학파는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 원로와 尹拯을 중심으로 한 서인 소장학자간의 정치적 갈등으로 말미암아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게 되고 南溪 朴世采(1631∼1695), 拙修齋 趙聖期(1638∼1689), 滄溪 林泳(1649∼1696), 三淵 金昌翕(1653∼1722), 西溪 朴世堂(1629∼1703), 霞谷 鄭齊斗(1649∼1736) 등은 송시열 계통의 고식적 주자학 해석에서 벗어난 새로운 조류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기본적으로는 율곡의 성리학에 동조하면서도 약간 퇴계와 율곡의 절충적인 경향을 띠거나, 한학 혹은 양명학을 수용하여 주자학에서 이탈하게 되는데 그 근원은 퇴계와 율곡 사이에서 유연한 입장을 유지했던 우계 성혼의 학문적 태도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한편 율곡학파의 적통에 해당되는 수암의 문인인 南塘 韓元震(1682∼1751)과 巍巖 李柬(1677∼1727) 사이에 벌어진 人物性同異論爭으로 말미암아 율곡학파는 다시 학문적으로 湖學과 洛學으로 나뉘게 되는데 이 호락논쟁의 여파로 율곡학파의 맥을 잇는 기호의 성리학자들은 다양한 경향을 띠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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