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Ⅳ. 학문과 종교
  • 2. 양명학의 전래와 연구
  • 1) 양명학의 전래와 초기 수용형태

1) 양명학의 전래와 초기 수용형태

 양명학이 전래된 시기는 종래에 異說이 있었으나, 그 동안 여러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그 대체적인 시기가 밝혀졌다. 전래 시기에 대하여 李能和(1869∼1945)는 명나라 嘉靖(1521) 이후로 추정하였으며,0559)李能和,≪朝鮮儒界之陽明學派≫(≪靑丘學叢≫25, 1937). 李丙燾는 조선시대 명종년간으로,0560)李丙燾,<陽明書之東來與退溪之辨斥>(≪白樂濬博士華甲記念 國學論叢≫, 思想界, 1955). 그리고 일본의 高橋亨은 명종 13년(1558)으로 보았다.0561)高橋亨,<朝鮮の陽明學派>(≪朝鮮學報≫4, 1953). 한편 金能根은 고교형의 명종 13년설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여 전래 시기를 그 이전으로 추정하였으며,0562)金能根,<陽明學의 傳來와 韓國儒家의 動向>(≪崇實大學論文集≫1, 1967). 이러한 반론에 대해 尹南漢은 구체적인 자료로 김능근의 추정을 입증하였다.0563)尹南漢,<李朝 陽明學의 傳來와 受容의 問題>(≪中央史論≫1, 中央大, 1972). 이 후 吳鍾逸은 중종 16년(1521)에 訥齋 朴祥(1474∼1519)과 十淸軒 金世弼(1473∼1553)이 양명의≪傳習錄≫을 詩로 화답하며 辨斥하였던 사실을 논증함으로써 양명학의 전래시기가 중국에 있어서≪전습록≫초간시기인 명 武宗 13년(1518)과 불과 3년의 차이밖에 나지 않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렇게 볼 때 양명학의 전래시기는 중국에서≪전습록≫이 간행된 시기와 거의 같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양명학에 대한 학계의 수용태도는 退溪가<心經後論>을 지어 陸王學을 변척한 명종 21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양명학의 전래시기를 중종 16년으로 보았을 때, 퇴계가 육왕학을 배척한 명종 22년까지는 45년이라는 기간이 있었고, 이 기간 동안 육왕학은 퇴계의 변척 이후와는 전혀 다른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그 학문적 내용이 논해지고 있었다.

 양명학은 象山 陸九淵(1139∼1192)의 학문과 더불어 육왕학이라고 일컬어지거니와 양명학에 대한 이해는 그의 사상적 先河를 이룬 象山學과 그 궤적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에는 왕양명의≪전습록≫보다≪象山集≫이 먼저 전래하였고, 상산의 심학적 학문태도가 학자들간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예로서 중종 12년(1517)에 韓效元이 元子를 교양하는 글에서 육상산의 말을 인용하고 있으며,0564)≪中宗實錄≫권 27, 중종 12년 정월 을미. 이듬해인 중종 13년에는 慕齋 金安國(1478∼1543)이 謝恩使로 명에 다녀올 때≪상산집≫을 가져와 이를 간행한 사실도 있다. 김안국은≪상산집≫을 간행하면서 “이 책은 송나라 육구연의 저술로서 선생은 朱子와 동시대인으로 尊德性에 전심하여 주자와 더불어 왕복 논변을 하였는데, 비록 주자와는 취지가 다르지만 心性之學은 오히려 講明할 바가 있으니 程朱之敎를 숭상하는 학자라도 이 책을 참고한다면 유익함이 없지 않을 것이다”0565)金安國,≪慕齋集≫권 9.라 하여 상산학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중종 16년 朴祥(1474∼1519)과 金世弼(1473∼553)이 양명의≪전습록≫을 시로 화답하였고,0566)吳鍾逸,<陽明 傳習錄 東來考>(≪哲學硏究≫5, 高麗大, 1978). 그 후 명종 13년(1558) 洪仁祐와 南彦經(1528∼1594)이 양명학에 대해 토론하고 있는데,0567)洪仁祐,≪恥齋遺稿≫권 2. 이러한 상황은 양명학에 대한 당시의 자유로운 수용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양명학 전래 초기의 자유스러운 수용태도는 퇴계가 이단의 학설이 세상에 성행하게 되어 程朱의 도통이 무너질 것을 걱정해서 이를 변척한0568)李 滉,≪退溪全書≫下,<年譜>권 2. 후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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