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Ⅳ. 학문과 종교
  • 3. 서양문물의 전래와 반응
  • 1) 서양문물 도입의 주역
  • (1) 내도 양인의 문화적 의의

(1) 내도 양인의 문화적 의의

 조선 중기 서양인의 조선래도는 두 가지 모습으로 이루어졌다. 그 하나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서의 의도적인 조선 입국이요, 다른 하나는 불가항력적인 상황 가운데서 생겨난 漂到의 경우이다. 전자는 16세기 말 임진·정유전란기에 침략 왜군과의 관계에서 조선에 상륙하였던 耶蘇會日本管區 소속의 ‘키리시땅빠델’인 가톨릭교회의 서양인 성직자들의 경우이고,0590)키리시땅은 漢字로 切利支丹, 切支丹으로 흔히 표현되고 있으며, 이것은 英語 Christian에 해당되는 포르투갈어 Christão의 음을 그대로 일본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16세기 중엽에서 17세기 중엽까지 약 1세간의 일본의 크리스트교의 역사를 ‘切支丹敎會’의 시대로 표현하고 있다. 후자는 17세기에 들어 일본으로의 항해 중 풍파로 조난당하고 조선에 표착, 또는 상륙하게 된 네덜란드인 표도선원들이었다.

 역사적으로 조선에 가장 먼저 나타난 서양인은 선조 15년(1582) 제주도에 표착한 네덜란드 선원 ‘馬里伊’ 등 3인이었다. 그들에 관한 기록이 매우 단편적이어서 조선에서의 행적이 명확치는 않다. 그들은 단지 당시 ‘南蠻人’이라고 불리던 이방인으로서의 서양인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조선인에게 보여주었을 뿐, 문화교섭사와는 특기할 만한 의의를 지닌 인물들이 아니었다.0591)≪宣祖修正實錄≫권 16, 선조 15년 정월 경신.

 그 후 왜란 당시 조선침략의 선봉장이며 ‘切支丹大名’(키리시땅다이묘오)이던 小西行長이 야소회일본관구장 고메즈(Gomez) 신부에게 요청하여 선조 25년(1592) 말 그의 조선 陣中에 맞이해 들였던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신부나, 정유재란 때인 선조 27년 역시 切支丹大名이며 조선에 출전했던 有馬晴信의 특청으로 조선에 건너왔던 라구나(Francisco de Laguna) 신부 등이 전쟁 중 한반도의 왜군진지를 방문한 바 있었다. 전자는 1년 2개월이나, 후자는 1∼2개월 간 전란 중의 조선에 머물렀었다. 그러나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에서 띄운 4통의 편지와 일본예수회 관계 성직자들의 통신문을 읽어보면 그들이 문화적으로 조선사회에 기여했거나, 서양문물을 전해준 사실이 없었음이 밝혀져 있다. 다만 이들은 조선침략의 왜군진에 머물다가 다시 일본으로 귀환했을 뿐이며 서양문물의 조선 전래와는 무관한 서양인들이었다.0592)Cespedes 神父에 대한 연구물로는 朴 哲,≪예수회 신부 세스페데스≫(서강대 출판부, 1987)가 있다. Laguna 신부의 朝鮮陣 방문의 사실은 羅馬 예수회역사연구소 J. G. Ruiz de Medina 신부의 연구로 밝혀졌다(Medina著, 朴 哲 譯,≪한국천주교회전래의 기원(1566∼1784)≫, 서강대 출판부, 1989, 33∼37쪽).

 이상의 일은 17세기에 앞서 생겨났던 일이었다. 17세기에 조선에 나타난 서양인은 인조 5년(1627) 영일만에서 체포된 벨테브레(Weltevree) 등 3인과 효종 4년(1653)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Hamel) 등 36인의 네덜란드 난파선의 선원들이었다. 벨테브레는 朴淵(朴燕·朴延이라고도 사료에 나온다)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訓鍊都監에 편속되어 명나라에서 전래된 紅夷砲의 제조법과 조종술을 조선군에게 가르쳤다고 전해지고 있다.0593)李德懋,≪硏經齋全集≫권 56.
丁若銓,≪雅亭遺稿≫권 5.
한편 하멜의 조선 표착과 극적인 조선 탈출과 본국 귀환의 사실은 그의 수기인≪하멜표류기≫와≪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해 상세히 연구되고 있다.0594)헨드릭 하멜 著, 李丙燾 譯註,≪하멜 漂流記-附朝鮮國記≫(一潮閣, 1954). 하멜 일행은 “朝鮮西學史의 관점에서 볼 때 실로 귀중한 기술자집단이었다”고 규정한 연구자도 있으나, 하멜 등은 星曆을 아는 자 1명, 鳥銃을 잘 쏘는 자 1명, 砲術에 능한 자 10여 명 수준의 일행이었다 한다. 그들은 항해자료의 실용기술을 터득하고 있을 뿐, 거의가 교양이 없는 선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문화사적 의의를 찾아볼 정도의 기술 전수를 기대하기 어려웠던 표착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하멜 일행의 조선 표착은 이질문화 전수의 한 가능성을 내포한 일이기는 하였으나, 그 이상의 문화사적 의의를 찾을 수 없는 서양인들의 집단 표착이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에 걸쳐 조선에 출입한 서양인들은 문화 전래의 의미로운 존재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들과는 별도로 청·일에서 크리스트신앙(西敎) 전교를 위해 활동하던 耶蘇會 선교사들에 의한 조선 입국 노력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주목적은 크리스트신앙을 이교도의 나라 조선에 전교하는데 두어졌던 것이나, 모두 계획에 그치거나 또는 실패했다. 서양·서양문물과 크리스트신앙의 조선 유입은 밖으로부터 전교활동을 펴려던 이들 예수회 성직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해마다 북경에 파견되던 조선의 外交使行員들에 의해 17세기 초부터 조용하게 진행되었던 것이다.0595)명·청에 파견되던 조선의 외교사행원을≪同文彙考≫등에는 赴京使行員으로 표기되고 있으나 흔히 事大使行員, 燕行使行員 등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이들과 北京(淸代는 燕京) 주재 耶蘇會 大主敎神父와의 만남을 1601년 Matteo Ricci 神父의 北京入住 후부터 시작되었다.

 결국 17세기 이전이나, 17세기에 진전되는 서양문물의 조선 전래 주역은 표착 서양인이나, 또는 조선 땅에 발을 들여놓았던 서양인들이 아니었다.

 하멜 일행을 ‘귀중한 서양의 기술자집단’으로 보고, 그들을 대우하여 그들로부터 네덜란드어를 배우고 서양을 연구했다면 일본의 ‘蘭學’의 경우와 같이 서양 수용의 결정적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는 아쉬움에서, 서학을 수용할 기회로 이용하지 못했음을 17세기 “당시의 위정자와 유학자들이 입으로는 그처럼 강경하게 北伐論을 주장하면서도, 그들을 위해 필요불가결한 서학의 수용을 위한 사상적 관용성과 정치적 경륜을 가지지 못한데 있다”고 이들 표착 양인이 지녔던 서학의 가능성을 살리지 못한 어리석음을 비판하는 논설이 있다.0596)姜在彦,≪朝鮮の西學史≫(東京, 明石書店, 1996), 99∼100쪽.

 그러나 일본의 난학은 그에 앞서 1543년 서양선박의 種子島 표착 이후 일본 항해가 잦았으며, 한편 당시 전란에 휩싸였던 戰國時代 쟁란 가운데 서양의 鐵砲와 醫術을 일찍부터 수용, 실용해 온 약 반세기에 걸친 前史가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급작스럽게 표착한, 앞서 소개한 2건의 표착 서양인을 두고 그들을 서학 수용의 기회로 활용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할 수만은 없는 역사적 상황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들 표착 선원들은 서양의 實在를 확실하게 인식시켜 주는데 지나지 않은 일과성 사실로 17세기 조선사회에 그 이름을 남겨 놓는데 불과했던 것이다.0597)洋學史的 관심에서 日本蘭學과 朝鮮西學을 비교사적으로 입론한 연구인 李元淳,<朝鮮西學과 日本蘭學-對西洋學門的對應의 比較史的 接近>(≪朝鮮西學史硏究≫, 一志社, 1986), 386∼427쪽 참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