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Ⅳ. 학문과 종교
  • 3. 서양문물의 전래와 반응
  • 1) 서양문물 도입의 주역
  • (2) 접촉과 재래의 주역 연행사행원들

(2) 접촉과 재래의 주역 연행사행원들

 조선인과 서양인·서양문물과의 의미있는 만남은 북경에서의 일이었고, 국내로 서양문물을 끌어들이는 齎來의 담당자는 ‘事大外交’ 관계로 조선이 해마다 명·청의 수도이던 北京(燕京)에 파견하던 燕行使行員들이었다.

 漢陽과 北京으로 이어지는 ‘燕行使行路’는 전통문화사회인 조선으로 대륙의 선진문명이 계속 흘러드는 ‘文化導管’과 같은 통로였다. 이 통로를 이용하여 조선전통사회에 역사적 變成을 촉구하게 되는 이질문화 자양분이 계속 흘러들었다. 선진의 중국문명뿐만이 아니라, 17세기로부터 전통적 유·불문화체계와 다른 서양적인 이질문화가치를 담은 서양문물이 조선사회로 흘러들게 되는 것이다.

 正使·副使·書狀官과 譯官·軍官 등 30여 명의 使行正員과 그들을 시종하는 300여 명의 수행원으로 구성되는 연행사는 사대외교 관계로 중국에 파송되던 사신 일행이었다. 冬至使·元旦使·聖節使와 같은 정기 사행과 외교적 필요에 따라 수시로 파송하는 근 20종에 이르는 부정기 사행 등, 북경을 드나드는 사행이 해마다 수차에 걸쳐 파송되었다. 이에 따라 상당수의 연행사원들이 당시의 문화적 선진 도시 북경을 방문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들은 북경의 지정 숙소에 체류하면서 사대외교의 절차를 수행하였으며, 허가된 북경 체류 기간에 각처를 드나들며 貿書·貿販과 觀光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은 북경 시내의 다양한 文物市場인 북경 琉璃廠을 자주 드나들었고, 중국의 碩學, 名儒를 만나 학문교류활동을 폈다. 그들 사행원이 찾은 관광명소로는 천주신앙 전교활동에 종사하던 耶蘇會西洋神父들의 거점이던 天主堂과 황실 천문역산기관인 欽天監이 있었다. 이 두 장소에서 조선 연행사원과 서양인 선교사들의 의미 있는 만남이 자주 벌어지게 되었고, 그 만남을 통해 서로 주고받는 예물의 형식으로 서양 선교사로부터 연행사행원에게 서양문물이 건네졌고, 그 서양문물이 귀국하는 연행사원들의 손에 의해 조선사회로 재래되었던 것이다.

 조선사행원들 가운데 단순한 호기심에서 또는 이질문화에 대한 강한 탐구욕을 가지고 서양 선교사들의 거처인 천주당과 흠천감을 찾아가 서양 선교사와 교분을 나누었고, 때로는 교시를 구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들은 친분을 갖게 된 정표로 서로간에 예물을 나누기도 했다. 이럴 때 예수회 소속의 선교사들은 서양과 서양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서양문물을 증여했으며, 때에 따라서는 혹시나 하는 傳敎 의욕에서 천주교 관계의 聖物이나 漢譯敎理書를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연행사행원들은 이들 물건을 신기하고 귀한 선물로 여겨 그것을 고이 간직하고 고국으로 재래했던 것이다.0598)李元淳,<赴京使行의 文化史的意義>(위의 책), 24∼48쪽 참조.

 조선왕조의 중국에 대한 ‘사대지례’는 원래 명나라와 유지되어 왔던 것이나, 병자호란에 의한 三田渡에서의 後金(淸)에 대한 降盟之約이 맺어진 후로 청나라에 대한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조선사행원과 연경에 거주하는 서양인과의 만남은 중국에 진출한 耶蘇會宣敎師(예수회 소속의 선교사)와의 교류로 시작되는 것이며, 이런 교류는 1601년 마테오 릿치(Matteo Ricci;利瑪竇) 신부의 북경 거주가 허락된 후부터 있었던 것이다.0599)마테오 릿치(1552∼1610)의 생애에 대하여는 羅 光,≪利瑪竇傳≫(台灣學生書院, 1955)과 平川祐弘,≪マテオ·リツチ傳Ⅰ≫(日本, 平凡社, 1969) 참조.

 조선의 연행사행원과 서양인 예수회선교사와의 만남과 교류는 곧 유교적 교양인과 그리스도교적 종교인과의 만남이었다. 그것은 동시에, 조선 전통지식인과 조선의 전통적인 것과는 다른 이질문화인과의 만남이며 이질문명과의 접촉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의미 있는 만남은 당시 중국전도의 필요에서 ‘補儒論的 文化主義 傳道方針’0600)‘補儒論的文化主義傳敎方針’은 인도에서 일본에 걸친 耶蘇會 Goa 管區의 전교책임을 맡은 예수회 東洋巡察使(Visitador Padre)였던 A. Valignano(中國名 范禮安, 1536∼1606)이 유교문화권에 속하는 중국·한국·일본 등 각지의 유교활동으로 敎示한 전교방침으로, 그는 現地適應主義·文化迎合主義적 전교활동을 펴도록 중국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에게 시달하였었다.에 따라 서방 신부들이 중국에 옮겨놓은 크리스트신앙과 르네상스 과학을 담은 서양문명(역사적으로 ‘西學’로 표현되고 있는 크리스트교적 서양문명가치체계)과의 만남이었다. 즉 명, 청대 북경에 자라났던 ‘漢譯西歐文明’(淸歐文明으로 표현되기도 한다)과의 대면이었다.0601)‘漢譯西歐文明’이라는 말은 명·청에 移植開化된 서양문명은 전교의 필요에서 서양 성직자들에 의해 선별된 서양문물이나, 중국사회에 영합되도록 한문에 의해 飜案되고 번역된 서학서의 형태로 중국사회에 전달된 서양문명이라는 한계적 의미를 가진 역사용어이다. 그 대면을 통해 서학적 서양문명이 꾸준히 조선으로 도입되었던 것이다. 물론 조선사행원들은 서학만이 아니라, 북경의 琉璃廠書肆를 찾아 중국의 귀한 정통 학문서적을 구입하는 한편, 연경에서 중국인 명유, 석학과 의미 있는 학문교류활동을 펴 동양사회의 전통문화의 정수를 조선으로 도입하는 노력도 꾸준히 폈던 것이다. 중국 땅 연경에서의 조선사행원과 서양·서양문물과의 만남과 조선으로의 재래 도입활동은 17세기 초부터 가냘프나마 조용하게, 그러면서 꾸준하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연행사행은 사대외교를 위해 해마다 파견되던 정치적 목적을 지닌 사행이었으나, 그것은 동시에 ‘朝貢’과 ‘回賜’의 형식을 취한 국가 유용물자의 교환이라는 경제적 의의를 지닌 사행이었다. 또한 부수적으로는 대륙 선진문화의 수용을 목적으로 한 사행이기도 했다. 연행사행원과 연경 거주 예수회선교사인 서양인과의 만남과 교류를 통해 이질적인 서양·서양문명과의 뜻 있는 접촉과 조선으로의 재래의 역사가 17세기 초부터 꾸준하였으며, 사행의 기회를 문화도관으로 이용하여 계속 도입되는 서양문물이 전통적 유교사회에 작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서양, 서양문물 도입에 있어 부연사행이 아닌 주역으로는 昭顯世子가 유명하다.0602)崔韶子,<淸朝에서의 昭顯世子>(≪全海宗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一潮閣, 1972).
金龍德,<昭顯世子硏究>(≪朝鮮後期思想史硏究≫, 乙酉文化社, 1977).
山口正之,<昭顯世子と湯若望>(≪靑丘學叢≫5, 靑丘學會, 1931).
그러나 그의 일은 예외적인 사례이고, 단 한 차례에 그친 일이었다. 꾸준한 도입과 조선사회에 의미있는 문화 도입의 주역자는 해마다 파견되던 ‘赴燕使行員’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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