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Ⅳ. 학문과 종교
  • 3. 서양문물의 전래와 반응
  • 3) 조선사회의 서양문물에 대한 반응
  • (1) 곤여만국전도와≪직방외기≫

(1) 곤여만국전도와≪직방외기≫

 17세기 초를 전후한 때로부터 연행사신들이나 소현세자를 통해 조선으로 재래된 서양문물 가운데 유교적 지식인의 관심을 끈 것은 한역서학지도와 지리서였으며, 서양문명을 소개하는 한역서학서였다. 한편 이들 지식인과 더불어 서양문물 가운데 기의 측면인 천문·역산에 관한 기기와 한역서양천문역학에 강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접근한 것은 농업사회의 기술관료들이었다. 그들은 帝王之學인 ‘授時推步’의 정확성에 주목하여, 그것을 뒷받침한 서양 천문·역산학과 그것을 가능케 한 정확한 천문관측기술에 놀라움을 가지고 접근하게 되었다. 그것을 학습하고 실용하여야 할 것이라는 강한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마침내는 서양의 천문역산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데에 나서게 되었다.

 마테오 릿치 제작의 한역서양지도인<坤輿萬國全圖>를 보고 가장 먼저 촌평을 적어놓은 사람은 이수광이었다. 그는 李光庭이 재래한 이 지도를 弘文館에서 보고 다음과 같이 평했다.

매우 정교하며 특히 西域이 상세하다. 중국 지역과 우리 나라 8도와 일본의 60여 도로 그려져 있는바, 지리적 원근과 대소가 매우 섬세하며 빠짐이 없다. 歐羅巴國은 서역에서 가장 먼 곳이며 중국에서의 거리가 8만 리나 된다. 옛부터 중국에 통함이 없었으나 명나라 때부터 다시 入貢하게 되었다. … 구라파 地界는 남은 地中海이며, 북은 氷河에 이르고, 동은 大乃河(도나우江), 서는 大西洋에 닿는다. 지중해는 천지 중간에 놓여져 있어서 그 이름이 붙었다(李睟光,≪芝峰類說≫권 2, 諸國部外國).

 마테오 릿치가 이 지도를 제작한 것은 중국전교에 도움을 얻고자 작성된 것이어서, 중국을 中華의 위치에 놓고 세계지도를 만들고 한자로 간단한 설명을 붙였다. 그 지도는 天圓地方의 우주체계론에 터전한, 겨우 인도를 포함한 아시아권만을 나타내던 전통적 세계지도를 접해오던 유교적 전통지식인 사이에 놀라운 반응을 일으키게 되었다. 한역세계지도는 중국인의 세계관·우주관의 변혁을 촉구하게 된 지도였던 것이다. 이들 한역세계지도가 조선에도 재래됨으로써 이를 열람할 수 있었던 조선사회의 일부 집권지식층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게 되었다.

 첫째, 중국·여진·일본이나 서역 그리고 인도 일부만을 알고 있었던 지리인식세계가 일시에 세계화되는 결과를 자아내게 되었다. 이수광은 유럽을 알게 되었음을 적고 있으니 그의 지리인식세계가 유럽으로 확대된 것이다.

 둘째, 세계에는 수 많은 국가가 있으며 중국이나 조선도 그것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점에서, 점차 중화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국제감각이 생겨나게 되었다. 18세기에 들어서는 마침내 ‘尊華卑夷’의 세계관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의식을 깨우쳐 준 지도였다.

 셋째로,<곤여만국전도>에 부쳐진 한문으로 된 간략한 설명문을 통해, 천원지방의 전통적 우주관이 지구설에 입각한 근대적 우주관으로 바뀌게 되는 첫단계적 인식을 심어주게 되었다.0612)李元淳,<朝鮮實學知識人의 漢譯西學地理書 理解>(≪한국의 전통지리사상≫, 民音社, 1991), 11∼43쪽.

 조선지식인들에게 대지는 球形이고 광대하며, 지구는 5대주·3대양을 가진 엄청난 것임을 실증시켜 준 다른 기기는 북경 재래의 ‘天球儀’였다.

 한편 17세기에 천원지방설을 명백히 부인하고 지구설을 확신하게 되는 조선지식인이 생겨나게 되었다. 金萬重(1637∼1692)의 지구설에 대한 믿음은 매우 확신에 찬 것임을 그의 글에서 느끼게 된다.

서양의 지구설은 오로지 天을 기준으로 삼고, 지구를 360도로 구획짓고 있다. 緯度는 남북극의 고하를 나타내며 經度는 일식 및 월식을 검증하고 있다. 그 道理는 확실하며 그 기술은 정확하다. 믿지 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믿지 못할 여지가 없다. 지금 學士나 大夫들이 만일 땅의 형상이 둥글다면 생물들이 둥근 고리(環)에 매달려 살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의심하나 그런 의심은 우물 속 개구리나 또는 여름날 벌레들이 지니는 것과 같은 생각인 것이다(金萬重,≪西浦漫筆≫下).

 김만중은 분명히 17세기 사람이었으나 이처럼 확신을 가지고 지구설을 받아들였던 선각자였다.

 17세기 선각자들의 세계지리에 대한 식견을 세계적인 것으로 확대시킴에는 마테오 릿치의 한역세계지도뿐만 아니라, 1623년 抗州에서 알레니 신부가 펴낸 세계지리서인≪직방외기≫의 영향을 저버릴 수 없다. 이 한역세계지리서에는 책머리에 ‘萬國全圖’라는 이름으로 한 장의 세계지도가 배설되었고, 1권에서 5권에 걸쳐 각 권 첫머리에 먼저 세계 5대주마다의 지도를 삽입해 놓고 있다. 그에 뒤이어 자연과 인문에 관한 총론과 주요 국가를 지리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다만 5권에 大洋洲에 해당되는 부분은 말지의 대륙인 墨瓦蠟尼加洲로 설명하고, 5권 끝에 南北半球 두 개의 지도와 四海總說이라는 제하에 해양지리적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직방외기≫는 페르비스트의≪坤輿圖說≫과 같이 한역지리학서의 二大 명저로 유명한 세계지리서이다. 중국사회에는 물론 조선사회의 유교지식인 사이에서 널리 읽혀져 세계관의 확대에 크게 이바지한 세계지리서였다.0613)李元淳,<職方外紀와 愼後聃의 西洋敎育論>(≪朝鮮西學史硏究≫, 一志社, 1986), 280∼311쪽.

 한역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와 한역세계지리서인≪직방외기≫는 그것들이 중국에서 간행된 후 얼마 안되어 조선사회로 재래되어 유교적 지식인들에 의해 관람되었다. 그 결과 이들 지도와 지리서는 그들의 중화적 세계관에 동요를 일으켰고 그들의 의식의 확대를 촉구하는데에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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