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Ⅳ. 학문과 종교
  • 3. 서양문물의 전래와 반응
  • 3) 조선사회의 서양문물에 대한 반응
  • (2)≪천주실의≫와≪교우론≫

(2)≪천주실의≫와≪교우론≫

 ≪天主實義≫는 마테오 릿치가 북경에 입성하기 전 南昌에서 저술한 한문저서이다. 그것은 북경에 입주하게 된 후 2년만인 1603년에 간행된 한역천주교서이다.≪천주실의≫의 서양책명 ‘De Deo Verax Disputatio’는 ‘神에 대한 참된 論議’라는 뜻으로,≪천주실의≫는 천주교 교리서 내지는 護敎書의 성격을 띠고 있는 한역서학서이다. 저자 마테오 릿치는 ‘東士’와 ‘西士’ 두 학자의 대화를 빌어 유불의 가치의식을 담은 동양의 사상·철학·종교와 스콜라(Schola) 철학과 크리스트교 가치를 담은 서양의 사상·철학·종교에 관한 의견 교환을 上下 2권, 通章 8장 174항에 걸쳐 토론시키는 형식으로, 매우 설득력 있게 꾸며 놓은 한역서로 유명하다. 이 책은 연경에서 간행된지 불과 10년 내에 동북아시아 한자문화권 여러 나라에 급속히 전파되어 큰 파문을 일으킨 서책으로 주목받아 왔다. 마테오 릿치가≪천주실의≫를 편술한 목적은 補儒論的 문화주의에 터전한 천주신앙의 전교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先秦古經의 유교논리에 터전하여 천주사상·철학·종교를 펴낸 것이기에 유교 한자문화권 여러 나라 학인들이 그것을 읽고 그 책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일부 서학적 지식인들이 마침내 천주교를 수용하게 되는 근거가 된 서적으로 작용한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시되고 있다.0614)李元淳,<天主實義>(≪韓國天主敎史硏究≫,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 33∼41쪽.

 이에 대한 이수광의 논평은 다음과 같다.

歐羅巴國은 또 다른 이름을 大西國이라고도 한다. 利瑪竇라는 사람이 있으며 항해 8년만에 8만리 바다 건너 東奧(廣東)에 거주하기 10여년이 되었는데 그의 저작물로 天主實義 두 권이 있다. 첫머리에서 天主가 비로소 천지를 창조하였다는 것과 主宰 安養의 도리로 논하였고, 다음에 人魂이 불멸하며 그것이 금수와 크게 다름을 논하고, 이어 輪廻六道의 잘못됨과 천당지옥 및 선악의 應報를 변론하고, 마지막으로 인성이 본래 선함과 天主를 공경 숭상하여야 함을 논하고 있다. 그들의 풍속에는 君을 敎化皇이라고 하고 있으며, 결혼하지 않으니 자리를 세습시킬 자손이 없어 현명한 사람을 선택하여 교화황으로 삼는다고 한다. 또 그들의 풍속에는 우의를 중히 여기고 私蓄은 하지 않는다 한다. 그는 重友論도 저술하고 있는바 焦竑이 말하는 바로는 서역의 이마두는 友人을 제2의 자기라고 하고 있으니 그 말이 매우 기특하다고≪續耳譚≫에 상세히 적어놓고 있다(李睟光,≪芝峰類說≫권 2, 諸國部外國).

 이처럼 이수광은≪천주실의≫에 관해 그 사실대로 논평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그와 같은 시대의 지식인인 柳寅夢(1559∼1623)은 마테오 릿치가 말하는 천주교는 ‘語多有理’하기는 하나 天堂地獄說과 성직자 ‘不事婚娶’로 ‘左道惑世之理’를 면할 수 없다고 유학자의 입장에서≪천주실의≫를 간단하게 논죄하였다.0615)李睟光,≪芝峰類說≫권 2, 諸國部外國.

 한편 청말명초에 아담 샬로부터 본국으로의 귀국에 앞서 각종 한역서학서와 天球儀·天主像 등의 선물을 받은 소현세자는 귀국길에 오르기에 앞서 천구의와 天主書에 관하여 기증자인 아담 샬에게 서한을 보내어 깊은 사의를 표하였다. 이 서한에서 소현세자는 귀국 후 궁중에서 사용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간행하여 지식인 사이에 보급시킬 것을 생각한다는 인사말을 전하면서 한편으로 동시에 받았던 천주상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천주교를 아는 사람이 없기에 제가 가장 걱정하는 일은 이단사교로 보여져 천주의 존엄을 상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일입니다. 이것이 천주상을 귀하에게 돌려드려 잘못됨이 없게 하려는 이유입니다(山口正之,<アダム·サルに 送られた世子昭顯の書翰>,≪朝鮮西敎史≫, 日本 雄山閣, 1967).

 이 서한을 통해 아담 샬과의 교유를 통하여 천주교에 관해 많은 것을 들었으면서도 유교국가의 세자로서 천주교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한 모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수광은≪지봉유설≫에서 마테오 릿치의 또다른 漢譯西敎書인≪交友論≫에 관해 기록을 남기고 있다.≪교우론≫은 마테오 릿치가 북경 입성에 앞서 남창에 있을 때 교제한 明王室의 일족인 建安王에게 서양사회의 교우지도를 설명한 글이다. 중국인이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나의 벗은 남이 아니라 즉 나의 半(分身)이니 곧 제2의 나이다. 그런 고로 마땅이 벗을 보기를 나를 보듯 하여야 하고, 벗에게 나를 주어야 하는 것이다. 비록 몸은 둘이나 그 마음은 하나일 뿐이다” 등의 내용이 유교지식인들에게 매우 신선한 감명을 준 것임을 焦竑의 기록을 들어 소개하고 있다.0616)焦 竑(1541∼1620)은 江蘇省人으로 徐光啓가 1597년 북경에서의 順天鄕試에서 장원급제할 때의 主考官의 1인이다. 서광계는 그를 일생 동안 스승으로 섬겼다.

 350∼500종으로 파악되고 있는 예수회선교사들의 손에 의해 저술된 한역서학서 가운데 17세기 전반에 조선사회로 도입된 서학교리서는 종류가 많았을 것이라 생각되나≪천주실의≫·≪교우론≫등 10여 종이 파악되고 있다. 이러한 천주교 관계 서적이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 읽혀졌으나 아직 신앙심을 키워낼 정도로 영향을 미칠 수준은 아니었다. 다만 객관적으로 그 내용을 소개하거나 전통유학의 입장에서 간단하게 논평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천주교에 관한 이해와 언급은≪천주실의≫나≪직방외기≫를 읽은 인사들의 글에도 보인다. 한역서학교리서를 읽고 천주신앙 신봉으로 치닫거나 또는 천주교리에 자극되어 생겨나는 反西敎論理의 글이 생겨나게 되는 것은 18세기 중엽에 들어서의 일이었다.0617)李元淳,<朝鮮後期 實學者의 西學意識>(≪朝鮮西學史硏究≫, 一志社, 1986), 184∼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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