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Ⅳ. 학문과 종교
  • 3. 서양문물의 전래와 반응
  • 3) 조선사회의 서양문물에 대한 반응
  • (3) 서양기기

(3) 서양기기

 17세기 전반 조선사회에 재래된 서양문물 가운데서 서양 문명기기 몇 점이 주목된다.

 마테오 릿치가 1601년에 북경으로 상경하여 神宗을 배알하고 북경거주를 허가받을 때 그는 萬國地圖·天主像·天主聖母像 등과 더불어 여러 가지 서양기기류를 진상하였다. 그 가운데서 신종의 호기심을 가장 자극한 것이 크고 작은 自鳴鐘과 洋琴이었다고 한다.0618)姜在彦, 앞의 책, 29쪽. 신종뿐만 아니라 북경인들을 놀라게 한 물건은 주야를 가리지 않고 시각마다 자동적으로 종을 울려 시간을 알려주는 자명종이었다. 낮에 해가 있을 때는 圭表(日時計)로, 해가 없는 밤에는 漏(水時計)로 시간을 알아오던 동양 전통사회에서 매 시각 틀림없이 정확하게 자동적으로 시간을 소리로 알려주는 자명종은 놀라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자명종이 고장났을 때 그것을 수리하기 위한 기술자로 마테오 릿치의 북경 거주를 허가하였고, 宣武門 내에 부지를 하사하여 교회를 짓고 그 곳에 그를 거주케 함으로써 중국전교의 거점이 마련되는 계기가 되는 귀한 물건 자명종이 조선사회로 도입된 것은 1631년 陳奏使 鄭斗源에 의해서였다.

 정두원은 자명종에 관하여 ‘한 시간마다 자명한다’고 간단히 언급하고 있으나 그보다 5년 후인 인조 14년(1636)에 북경에 사행한 觀象監官 金堉은 북경에서 자명종을 보고 그것이 기계적으로 돌고 스스로 시간을 알리는 것이 신묘하다고 감탄하고 자명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때마침 密陽의 巧匠 劉興發이 일본에서 자명종을 사들여 이의 운용을 연구하고 그 원리를 이용하여 시계를 만들었다. 시각마다 수가 다르게 종을 울려 시간을 알리고 外輪에 12시를 그려놓고, 日과 月이 그 한가운데서 돌아가도록 장치하였다. 盈虧遲疾이 조금도 차이나지 않아 매우 신기하다는 기록을 그의 저서에 남기고 있다.0619)金 堉,≪潛谷筆談≫.
李能和,≪朝鮮基督敎及外交史≫(朝鮮基督敎彰文社, 1929), 4쪽.
이 기사로 미루어 볼 때 조선에서도 일부에서 자명종을 크게 주목하였고, 이를 연구하여 특이한 천문시계로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서양식 자명종 원리를 활용한 渾天時計까지 제작되었다. 효종 4년(1653)에 時憲曆을 실용하는 報漏閣의 漏器(水時計)를 새 역법에 맞도록 개조하는 조치가 취해졌었다. 그 후로 혼천시계의 정확함을 기하기 위한 노력이 관상감을 중심으로 추진되어 효종 8년에는 崔攸之에 의해 ‘璿璣玉衡’이 제작 실용되었고, 다시 현종 10년(1669)에 天文敎授 李敏哲과 宋以穎에게 이것을 개조토록 조치하였던바 송이영이 서양식 자명종의 원리와 특징을 잘 살리되 동력을 물 대신 추로 돌게 개량하여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는 한편, 천체의 운행을 한 눈으로 알아볼 수 있는 조선 특유의 혼천시계를 제작하여 실용했던 것이다.0620)全相運,≪韓國科學技術史≫(正音社, 1976), 86∼87쪽.

 이처럼 정두원에 의해 조선으로 도입된 자명종은 단지 호기심의 대상인 신기한 기기로서가 아니라 조선사회에서 개량, 활용되고 마침내 실용되었던 것이다.

 김만중은 “서양인 利瑪竇는 萬曆 연간에 배를 이용하여 동방으로 건너왔는데 그가 들여온 자명종과 안경을 보고 모두가 보물과 같이 생각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는바,0621)金萬重,≪西浦漫筆≫下. 안경도 17세기 중엽 북경에서 조선사회로 소개된 유용한 서양기기의 하나였던 것이다.

 1631년 정두원이 로드리케즈(Rodoriquez;陸若漢) 신부0622)Rodoriqueiz(陸若漢) 신부는 일본, 중국 크리스트 敎史에서 특이한 존재였다. Jeronimo Rodoriquez(1561∼1633;포르투갈인)는 14세 때 일본에 입국하였으며 1580년 일본에서 耶蘇會에 입회하였다. 1596년에 신부가 된 후 다년간 일본에서 거주하였기에 일본어에 精通하고 일본사정과 일본문화에 밝았다. 최초로 日本文法書를 집필하고 日蘭辭典을 편찬하였고 통역으로 활약하여 ‘Rodoriquez 通事’로 불렸으며 豊臣秀吉, 德川家康과도 가까웠다. 島原의 神學校 敎授로 있다가 1610년 일본에서의 키리시땅 박해로 Macao로 추방되었다. 그 후 女眞族興起로 명이 위험에 빠지게 되자 徐光啓의 제자이며 천주교도이던 明 登萊巡撫 孫元化의 초청으로 북상하여 등래에 머물며 掌敎官으로 군사고문의 일을 볼 때 陳奏使 鄭斗源 일행을 만났다. 1633년에 중국에서 사망하였다.로부터 선물받은 여러 문물 가운데≪遠鏡說≫과≪千里鏡說≫등 두 권의 한역과학서가 들어 있었다. 이 두 책은 그가 조선으로 도입한 망원경에 대한 제조법과 사용법 및 효용가치를 해설한 서책이었다.≪천리경설≫은 아담 샬이 편술한 후 1626년 연경에서≪원경설≫이라는 이름으로 간행한 한역서학서였다. 여기에 언급된 망원경은 1609년 갈리레오(Galileo Galilei)가 천문관측에 처음으로 실용함으로써 근대 천문학 발달의 단서를 이끌어 낸 천문관측기기였다. 아담 샬이 중국으로 들여와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었으나 조선사회에 도입되었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천문관측에 실용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신기한 서양기기로 여겨졌었음은 정두원이 ‘천리경’ 일부를 관찰한 후 “천문은 자세히 관측할 수 있으며 또한 능히 100리 밖의 敵陣 중의 미세한 물체까지 자세히 볼 수 있다”고 적은 바를 통해 알 수 있다.

 정두원은 자신이 조선으로 받아들여 온 화포에 관하여도 서양식 대포가 전통적인 우리 나라의 대포인 碗口에 비하여 우수하다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火繩을 사용하지 않고 火石으로 격발한다. 우리 나라 鳥銃 두 방을 놓을 동안에 4, 5발이나 쏠 수 있을 정도로 빠르기가 귀신과 같다(≪國朝寶鑑≫권 35, 인조 9년 7월).

 이와 같이 화포의 효능을 높이 평가한 정두원은 그의 수행원이던 鄭孝吉에게 명하여 그 제조법과 조작법을 익히도록 조치하였다. 귀국 후에는 국왕 앞에서 발포를 실연하여 인조로부터 시의를 얻은 조치라고 칭찬을 받은바 있었다.0623)≪國朝寶鑑≫권 35, 인조 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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