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Ⅳ. 학문과 종교
  • 3. 서양문물의 전래와 반응
  • 4) 서양문물의 실용적 채용

4) 서양문물의 실용적 채용

 연경에서 서양선교사와 奉敎士人들에 의해 생산된 한역서양문물은 17세기 초부터 조선사회로 도입되고 소개되었으며, 소수 선각적 지식인과 일부 천문·역산관계 기술관료들의 주목을 받게되었다. 그런 가운데 실용을 위한 노력도 생겨나게 되었다.

 宋以穎에 의해 제작된 渾天時計에 서양 자명종의 원리가 활용되었음을 앞서 살펴 본 바 있다.

 조선지식인들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던 한역서학세계지도나 천문도를 模作하려는 활동도 생겨난다. 시기적으로는 18세기 초두의 일이기는 하나 숙종 34년(1708) 書雲監에서 국왕에게 진상된 乾象圖屛子와 坤輿圖는 조선인이 제작한 한역서학세계지도의 모작품이었다. 즉 전자는 아담 샬이 제작한 천문도인 星圖八幅의 모작이었고, 후자는 마테오 릿치 제작의<坤輿萬國全圖>의 모작이었음이 연구자들에 의해 파악되고 있다.0631)崔錫鼎,<西洋國乾象坤輿二屛總序>.
李龍範,<法住寺所藏의 新法天文圖說에 관하여>(≪歷史學報≫31, 1966).
이 모작품이 진상된 때는 1708년의 일이었으나, 그것은 17세기 후반에 천문역산기관을 중심으로 이들 한역세계지도와 천문도에 계속 관심이 집중됨으로써 마침내 모작케 되었던 것이다.

 이상의 혼천시계나 모작된 건상도와 곤여도는 왕실에 수장되어 일반사회에 그 영향이 미쳤던 것은 아니다.

 17세기 조선에 도입된 서양문물 가운데 계속적으로 관계 자료의 도입활동과 수용 노력이 경주되어 마침내 국가정책으로 채용되어 국민생활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된 것은 서양역법의 도입이었고 시헌력의 채용이었다.0632)時憲曆의 조선 도입과 채용에 관한 연구물로 주목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李殷晟,<大理石製 新平日咎와 昭顯世子>(≪東方學志≫46·47·48, 延世大, 1985).
鄭誠嬉,<朝鮮後期 時憲曆導入과 그 影響>(≪韓國學大學院論文集≫10,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5).

 인조 9년(1631) 정두원에 의해 재래된≪치력연기≫를 통해 청국에서의 서양역법 연구와 채용의 개략적 이해를 가질 수 있었을 것으로 파악된다.≪치력연기≫는 방대한 양의 한역천문역산서가 휘집되어 있는 서양역법집성총간물인≪숭정역서≫(1644년 11월에 아담 샬이 新法曆書로 개명)에 포함되어 있는 서양역법서였다. 아담 샬은 1645년(淸 順治 2년) 8월에 여섯 장의 한역지도와 儀器 3종 및 그 의기의 조종법에 관한 서책을 황제에 진상하는 한편 서양신법에 의한 역서도 진상했다. 이 역서가 淸 聖祖(順治帝)에 의해 ‘時憲曆’으로 이름지어져 중국에 반포되는 한편 ‘朝鮮曆行’0633)曆行은 명·청에 중국역서를 請受하기 위해 파견하는 使行이다. 역서와 연호의 사용은 사대외교의 의무였다(≪同文彙改≫原編, 권 42, 曆書;≪通文館志≫권 3, 賚咨行).을 통해 조선사회로 도입되었다.

 인조 23년 3월에 앞서 귀국한 소현세자에 뒤이어 鳳林大君이 조선으로 귀국할 때 아담 샬은 봉림대군 護行宰臣인 韓興一에게 서양역산서인≪改界圖≫와≪七政曆比例≫를 기증하였다. 한흥일은 귀국한 후 이것들을 국왕에게 헌납하였다.

曆象授時는 제왕이 가장 힘써야 할 일입니다. 원나라 때 郭守敬이 고쳐쓴 曆書가 거의 400여 년이나 되어 지금 마땅이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湯若望이 이룬 역서를 보건데 가장 잘 修改되어 있습니다. 감히 改界圖와 七政曆比例 각 1 권을 올려 바치는 바입니다. 청컨대 관계관으로 하여금 이것들을 자세히 살펴 판정함으로써 역법을 밝히시기 바랍니다(≪仁祖實錄≫권 46, 인조 23년 6월 갑인).

 청국의 아담 샬 등이 이룬 시헌력을 연구하도록 건의한 것이다. 이 건의가 조선에서 시헌력을 연구, 채용하도록 정식으로 발의된 최초의 일이었다.

 세종대에 鄭麟趾·鄭招·李純之·金淡 등이 왕명을 받들고 授時曆과 大統曆을 조선에 알맞도록 개편하여<七政算內篇>을 편찬하였고, 다시 回回曆을 참고하여<七政算外篇>을 간행한 바 있었다. 이 일은 농업국가의 군주인 세종이 愛民君主로 제왕의 책임을 다하려는 정치적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동시에 조선 초기의 발달된 朝鮮曆算學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후 이 사업을 계승, 발전시킬만한 정치적 경륜을 지닌 군주가 없었고, 한편 曆行을 통하여 명에서 받아오는 大明曆 관용에 순치되어 기본적으로 중국역서에 매달려 있는 형편이었다.

 명나라 말기에 명황실의 특별한 관심 속에 중국의 전통 역산학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서양역법은 천문관측기기와 더불어 천문역산관계서의 한역본의 형태로 조선사행원들에 의해, 또는 소현세자나 봉림대군 귀국의 기회에 조선사회로 재래되어 조선의 역산기관인 관상감 관계자들의 강한 흥미를 유발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서양역법에 터전하여 역법 수정을 요구하는 건의가 제기되었던 것이다. 앞서 본 한흥일의 건의는 조선의 시헌역법의 도입 연구와 시헌력을 결국 채용하는 계기가 되는 여론환기였던 것이다.

 한흥일의 건의는 주목은 받았으나 아직 그 당시 조선으로 재래된 한역서양역법서만을 가지고서 시헌력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자료에 한계가 있었다. 또한 서양역산법을 자료로만 터득하기에는 역법이 난삽하여 독학이나 독습으로 터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더 많은 자료를 조선으로 도입하는 한편, 직접 북경에 들어가 서양역법 관계자로부터 역산법을 교수받을 필요가 있었다. 이런 문제를 지각하고 해결에 직접 나서게 된 사람이 관상감 제조로 당시 조선의 천문역산의 책임을 지고 있었던 金堉(1580∼1658)이었다. 전통사회의 선비이면서도 실학사상 선구자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김육은 365년 동안이나 중국사회에서 사용되어 온 郭守敬·許衡 등이 이루어 놓은 授時曆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커지는 오차를 감안하여 修曆할 것을 건의하였다.

천체운행은 대단히 확실하나 授時曆算은 해가 거듭될수록 오차가 커져가니 … 마땅히 역법은 바꾸어야 합니다. 이럴 즈음에 서양역법이 등장하였기에 改曆을 추진하기에 마침 좋은 기회를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만 韓興一이 재래한 서책에는 의론은 있었으나 立成(數表)이 없었습니다. … 중국에서는 丙子年(1636)에서 丁丑年(1637) 사이에 이미 역법을 개정하여 내년에는 新曆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신력은 반드시 우리 나라의 曆과 큰 차이가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신력 가운데 절묘한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당연히 舊曆을 버리고 신력을 취하여야 할 것입니다. 중국은 다른 나라가 冊曆을 만드는 것을 금하고 있으니 사람을 보내어 정식으로 그 역법을 배우기를 청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번 중국에 사행하는 사신에게 日官 1, 2명을 대동케 하고 역관으로 하여금 欽天監을 탐사시켜 새로운 책력을 만든 자료를 단편적으로나마 입수하여 그 법을 推考토록 하고 알기 어려운 일들을 차차 會得하도록 하여 귀국시키는 일은 좋을 것입니다(≪仁祖實錄≫권 46, 인조 23년 12월 병신).

 연행사 일행에 역산담당기술관인 日官들을 반드시 대동시켜 시헌역법을 연구케 하자고 건의하였던 것이다.

 김육은 인조 24년(1646) 謝恩兼陳奏副使로 그 자신이 연경에 사행케 되었을 때, 2명의 일관을 대동하고 연경에서 아담 샬로부터 新曆에 관해 배우도록 조치하였다. 그러나 欽天監 출입이 엄하게 규제되어 있는지라 직접적인 학습의 기회를 얻지 못했고 신력에 관한 역서 수종을 구입하여 金尙范에 연구하도록 조치할 수밖에 없었다.0634)≪大明律直解≫禮律 儀制 收藏禁書及私習天文·刑律 僞造印信曆書에 의하면 曆書私習은 금지사항임을 알 수 있다.

 조선의 관계 관료들 사이에서는 신법력에 관한 한역서학역산서를 밀무역으로라도 도입할 공작이 추진되었었다. 즉 인조 24년 10월에 연행한 謝恩使 李景奭은 일관 李應林의 아들이면서 호란 때에 포로가 되어 청국에 붙잡혀가 그 곳에서 살고 있던 李奇英에게 상당한 금전을 주어 아담 샬에게서 여러 가지 역법서를 사 보내도록 공작했던 것이다.0635)≪仁祖實錄≫권 47, 인조 24년 6월 무인. 인조 26년에 일관 宋仁龍을 연행토록 하였다. 그는 아담 샬과 한 차례 접촉할 수 있었으나 筆談으로 日躔行度法에 관해 문답을 교환하였기에 제대로 학습할 수가 없었다. 이 때 송인용은≪縷子草≫15권과<星圖>10장을 얻어가지고 귀국하였다.0636)≪仁祖實錄≫권 50, 인조 27년 2월 갑오.

 안타까운 조선정부는 효종 2년(1651) 김상범을 다시 연행시켰다. 그는 상당한 뇌물을 써 흠천감에 출입하며 신역법을 학습할 수 있었다.0637)≪增補文獻備考≫권 1, 象緯考 1, 孝宗 4년, 始行時憲曆法. 그 개략을 파악한 김상범은 귀국 후 그 나름대로의 시헌력을 제작할 수 있었다. 김상범이 작성한 ‘朝鮮版 時憲曆’을 효종 5년부터 사용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시헌력은 마침내 조선에서 채택되었던 것이다.0638)≪孝宗實錄≫권 8, 효종 3년 6월 임오·권 10, 효종 4년 정월 계유.

 관상감에서는 이 조선판 ‘시헌력’의 정확을 기하기 위해 김상범을 재차 연경에 파견했다. 그는 불행히도 연경에서 객사하였으니 실망이 컸다.0639)≪孝宗實錄≫권 14, 효종 6년 정월 신축. 효종 6년에도 謝恩陳奏使行에 일관을 동행시켜 日躔表, 月離表 등의 자료도 구입해왔다.

 한흥일, 김육, 김상범의 노력으로 조선에서 제작, 채용된 ‘조선판 시헌력’은 그 산법을 완전히 터득하고서 제작된 것은 아니었으나 그런대로 당시 사용되던 大統曆의 오차를 수정한 것이기에 조선에서 시헌력의 이름으로 제작하여 유포시킴으로서 민생에 크게 이바지하게 됐다. 그러나 18세기 초에 접어들어 이 조선판 시헌력이 淸國曆과 합치하지 않는 사태가 생겨나 문제가 생겼다. 이에 관상감에서는 일관 許遠을 동지사행에 따라 연경으로 보내 청나라의 흠천감 역관인 何君錫으로부터 서양역법을 세밀하게 검토할 수 있게 도움을 받는 한편 역법서를 도입토록 조치하였다. 허원은 그 후에도 숙종 34년과 37년 그리고 숙종 41년 등 세 차례나 계속 연경에 사행하여 서양역법 관계의 서적을 계속 들여왔으며 또한 연경 현지에서 청의 역관 하군석이나 그 아들 何國柱로부터 계속 역법을 학습하기에 힘썼다. 귀국 후에도 그 역서를 소화하기에 노력했다. 허원은 비록 18세기 초에 활약한 일관이기는 하나 인조 26년(1648) 일관 송인용의 시헌력 도입의 건의가 있은 후 수차례나 연경을 드나들며 시헌역법 연구에 종사하다가 연경에서 객사한 김상범과 더불어 우리 나라 시헌력 도입과 실용을 실현시킨 세 공로자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동시에 이들 일관들을 계속 연경사행 때마다 대동 입연하는 제도적 기회를 뒷받침하였으며, 그 자신도 연경에 연행하여 시헌력 학습과 도입에 노력한 관상감제조 김육의 공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효종 4년(1653)에 조선이 시헌력 실시를 결정한 후, 허원이 그 역산법을 소화하여 조선인 최초의 서양천문역법서인≪玄象新法細草類彙≫를 저술해 낼 때까지는 실로 60년 전후의 긴 세월과 막대한 경비 그리고 꾸준하고 정열적인 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0640)≪玄象新法細草類彙≫는 흔히≪細草類彙≫로 불리던 天文曆算書이다. 상권에 日·月蝕計算法, 하권에 日·月·五星의 運行, 24節季, 分朔弦望의 계산법이 수록되어 있다.

 이리하여 조선정부는 국초 이래 채용해 왔던 명의 구법인 대통력을 버리고, 정확성을 자랑하는 한역천문역산법에 의한 시헌력을 실용케 되었던 것이다.0641)이 때로부터 太陽曆이 채용될 때까지(1653∼1893) 時憲曆法에 따라 제작된 역서를 오랫동안 사용하였는데, 1653∼1895년간은 ‘時憲書’라는 이름의 역서가 사용되었다 하여 ‘時憲書時代’, 그 후 2년간(1896∼1897)은 ‘시헌력’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하여 ‘時憲曆時代’로 역서사를 시대구분을 하는 연구도 있다(李殷星,<近世韓國의 曆>,≪東方學志≫95, 1978). 이 시헌력의 채용이 17세기 서양문물 수용의 가장 돋보이는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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