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Ⅳ. 학문과 종교
  • 3. 서양문물의 전래와 반응
  • 5) 17세기 서양문물 전래의 역사성

5) 17세기 서양문물 전래의 역사성

 17세기 전반기는 호란과 그에 뒤이은 청의 압력하에서 北伐意識이 조선의 정치적 향방에 크게 영향을 미치던 시대였다. 한편 17세기 후반기라 할 현종·숙종대 40년 동안은 청에 대한 사대관계를 실천하여 국제적 안정을 도모하면서 유교적 지배체제의 부흥을 꾀하는 시대였으며 내적으로는 사림붕당간의 대립이 계속되던 때였다.

 문화교섭사적 차원에서 17세기 조선과 서양과의 관계를 본다면 17세기 초부터 주목할 만한 서양문물 재래활동이 이루어졌다. 한역서학문명의 형태로 취한 ‘飜案文化的 西洋文物’의 조선재래는 18세기로 이어지는 ‘西文東漸’의 역사였다. 간헐적 재래현상으로의 서양문물 도입과 이에 대한 초단계적 반응이 17세기 전반에 소수인에 의한 寸論的 반응으로 나타났다. 그 후 차차로 서양문물의 실용성을 알게된 천문·역산 관료들에 의한 실용·취용의 활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세계지도의 모작, 자명종의 창의적 실용과 시헌역법의 탐구와 채용으로 현실화되었다.

 17세기 서양문물과의 만남과 그에 대한 대응·수용의 역사전개는 중국이나 일본의 그것과 매우 다르게 전개되었다.

 첫째, 동북아 3개국에서 서양과의 의미있는 만남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가장 늦은 것이었다.

 둘째, 서양인에 의한 직접적인 전달이나 전수가 아니라, 전통사회인의 재래에 의한 만남과 도입이었다. 만남과 도입의 주역이 조선왕조의 외교적 필요에서 중국에 파견되던 연행사신들이었다.

 셋째, 의미있는 만남과 도입의 장소는 중국 땅 북경이었으며, 그것도 예수회선교사들의 거처이던 天主堂과 欽天監이었다. 그 만남이 일본과 같이 종교적이거나, 중국과 같이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이고 개인적으로 진전되었다.

 넷째, 조선의 서양문물과의 만남과 도입은 ‘漢譯西學’이라는 한자와 한문으로 飜案되고, 전교의 필요에서 중국에 이식된 크리스트교적 가치체계의 소산물로서 서양문물이었다. 즉 서양문명의 직접 도입이 아니었다. 예수회선교사들의 현지적응, 문화주의, 補儒論적 전교의식에서 선택되고 번안된 서양문명(北京에서 번안되고 번역된 서양·서양문명), 즉 중국의 한역서학의 재래요, 도입이었다.

 다섯째, 재래·도입된 서양문물이 서양문명 전체에 걸쳤던 것은 아니었고, 한정된 분야에 걸친 것이었으나 재래된 후 조선사회 지식인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검토되는 반응이 빠르게 나타났다.

 여섯째, 제한된 지식인과 기술관료사이에서 세계관·천문관·역산관의 변화를 촉구할 정도의 강한 문화자극을 공여했다.

 일곱째, 17세기에 있어서의 의미있는 연구와 실용은 농업국가의 제왕지학으로의 역산과 역법 수용으로의 시헌력 채용 이외에는 구체적 동태가 자라지는 못하였다.

 17세기 중국으로부터 조선사행원들에 의해 조선사회로 재래 도입된 서양문물은 이상과 같이 전면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주의적 정교방침에 의해 예수회선교사라는 특수 신분층에 의해 이식·번안된 서양문물의 일부였다. 그러나 그 자체로도 개화·개명으로 이어질 역사변성의 새로운 가능성의 등장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정주학적 가치 일변도의 집권세력이나 유교학인들이 이를 적극 수용할 만한 사상적·사회적 기반이 역사적으로 준비되지 못한 상황에서의 부분적 도입이었다. 그러기에 그것은 일부 지식인들의 세계관과 우주관의 확대를 이끌어낼 계기로 작용되었고, 기술관료에 의한 서양역법의 실용활동으로 시헌력의 채용이 구체화되었을 뿐, 그 이상의 역사적 역량을 살리지 못한 점에서 17세기 서양문물 접촉사의 역사적 한계성을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李元淳>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