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Ⅳ. 학문과 종교
  • 7. 불교계의 동향
  • 2) 산승의 법통

2) 산승의 법통

 연산군 말경부터 시작된 산중승단의 불교는 명종대에 한 차례의 흥불기간을 거쳐, 다시 산간으로 물러나 자활의 길을 모색해야 했다. 이런 시대의 산승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법통수호와 법맥계승의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오랜 억불정책으로 敎의 맥과 禪家의 법통은 희미해진 지 이미 오래이다. 더구나 無宗의 산중승단이라고 하지만 교보다는 선가가 주류를 이루던 현실에서, 법통의 상실은 더욱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럴 즈음에, 임란을 전후하여 불교계를 영도해간 淸虛休靜에 의해 새롭게 山僧家統이 수립된다. 이 후 그 법통이 문하와 法孫들에게 이어짐으로써 조선 중·후기 산중승단은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법통과 법맥계승의 활동에는 다소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우선 휴정이 세운 선대의 법통이 다시 그 문하들에 의해 재조직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법통의 큰 흐름이 휴정이 세운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法祖 문제에 있어서 상당한 改變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휴정 이후 그 문파에서 새롭게 내세우고 있는 이른바 太古法統說이 그것이다.0756)太古法統說은 휴정의 문하인 彦機가 인조 3년(1625)에 지은<逢萊山雲水庵鍾峰影堂記>(≪鞭羊堂集≫권 2, 記篇)에 최초로 나타나며, 이후 그 문하에서 계속 거의 같은 내용이 강조되고 있다. 이런 사정을 좀더 깊게 파악하기 위해 휴정이 밝혀 놓은 선대의 법통부터 검토해 본다.

 휴정은 그가 지은 碧松堂行蹟·芙蓉堂行蹟·敬聖堂行蹟의 跋文에서 다음과 같이 선대의 법맥을 명시하고 있다.

법으로 系派(법통)를 논한다면, 碧松은 할아버지요. 芙蓉은 아버지며, 敬聖은 숙부이다(休靜,≪三老行蹟≫休靜謹跋;≪韓國佛敎全書≫7, 東國大 出版部, 1987, 757쪽).

 짧지만 이는 휴정 스스로 밝힌 自家의 계보로서는 유일한 文證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벽송 이상의 선대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다행히 이 문제는 휴정이 지은 그의 법조 碧松行蹟을 통해 보완해 볼 수 있다. 행적은 먼저, 벽송이 祖證大師에게서 삭발하고 衍熙敎師를 찾아가 圓頓敎義를 問學한 다음, 正心禪師를 만나서는 “祖師西來의 密旨를 擊發하여 玄妙를 俱振하고 깨달음에 이익이 많았다”0757)休 靜,≪三老行蹟≫碧松堂行蹟(≪韓國佛敎全書≫7), 752쪽.고 적고 있다. 이러한 사실뿐이라면 벽송은 正心의 법을 이은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어지는 기록은 또 다른 사실을 전하고 있다.

正德 무진(중종 3년;1508) 가을에 금강산 妙吉祥庵으로 들어가 大慧語錄을 보다가 狗子無佛性話에 疑着하여 오래지 않아 漆桶을 깨뜨렸으며, 또 高峰語錄을 보다가 颺在他方이라는 말에 이르러 前解를 頓落시켰다. 그러므로, 스승이 평생 발휘한 바는 高峰과 大慧의 宗風이었다. 대혜화상은 六祖의 17대 嫡孫이며, 고봉화상은 臨濟의 18대 적손이다. 스승께서는 해외의 사람이면서도 5백년 전의 종파를 은밀히 이었다. 마치 程子와 朱子가 孔子·孟子의 천년 뒤에 태어났지만 그 학통을 遠承한 것과 같으니, 儒學이나 釋敎가 도를 이어 전함에는 곧 한가지이다(休靜,≪三老行蹟≫碧松堂行蹟;≪韓國佛敎全書≫7, 752쪽).

 이와 같이 휴정은 그의 法祖가 ‘평생을 발휘한 것이 고봉과 대해의 종풍이었으며, 그 5백년 전의 종파(법통)를 密嗣’했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기록대로라면, 벽송이 정심의 법맥을 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멀리 6조 慧能의 17대 적손이며 동시에 臨濟 12대손인 大慧宗杲(1089∼1163)와, 임제 18대 적손인 高峰原妙(1238∼1295)의 법을 계승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0758)金煐泰,<朝鮮禪家의 法統考>(≪佛敎學報≫22, 東國大 佛敎文化硏究院, 1985), 333쪽.

 언제부터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극심한 불법의 沙汰 속에서 선·교를 막론하고 승가는 어느새 그 가통과 종맥을 잃고 있있다. 벽송의 선대가 모호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에 휴정은 이미 법통이 사라져 버린 산중승단에, 대혜와 고봉을 遠祖로 삼아 벽송을 법조로 하는 임제가풍의 새 법통을 수립해 놓은 셈이다. 그러나 이런 법통은 휴정이 入寂한 뒤 그 문하들에 의해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앞서 언급한 太古法統說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즉, 휴정이 ① 石屋淸珙 → ② 太古普愚 → ③ 幻庵混修 → ④ 歸谷覺雲 → ⑤ 碧溪正心 → ⑥ 碧松智嚴 → ⑦ 芙蓉靈觀으로 전승된 법맥을 이은 것으로 되어 있다. 요컨데 휴정은 정심으로부터 법을 이은 것이며, 그 법통은 元에서 임제 18대인 석옥청공의 법을 받고 귀국한 태고로부터 시작된다는 주장이다.

 동일한 임제의 법맥임에 틀림없지만 휴정이 세운 법통에 이처럼 개변이 가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모호한 선대를 확정짓는다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는 조선 전기 불교계를 주도해온 懶翁系에 대응하려는 움직임으로 이해된다. 나옹계란, ① 平山處林(임제 18대) → ② 懶翁慧勤 → ③ 無學自超 → ④ 涵虛己和로 이어져온 법맥을 말한다. 조선 전기에는 이들 법맥이 주축이 되어 왔다.0759)高翊晋,<碧松智嚴의 新資料와 法統問題>(≪佛敎學報≫22, 1985), 211쪽. 그러나 임진왜란 중에 특히 의승군 활동을 통해 사회적 인식을 새롭게 부상시킨 ‘휴정-유정문파’들은 이제 조선 전기 나옹계의 ‘무학-함허 문파’에 못지 않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태고법통설은 휴정문파의 이같은 성장과 자부심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겠다.0760)위와 같음.

 이런 태고법통은 휴정의 스승 부용영관의 또 다른 문하인 浮休와 그로부터 이어지며 병자호란 때 크게 활약했던 碧巖문파까지도 함께 포섭하면서, 조선 중기 이후 더욱 확고한 법통으로 자리잡아 갔다. 조선 중기에는 이 밖에도 멀리 法眼宗系와 연결된 휴정의 법계나0761)許端甫,<淸虛堂集序>(≪韓國佛敎全書≫7), 659∼660쪽. 知訥 → 나옹으로 이어지는 법계0762)許 筠,<四溟松雲大師石藏碑銘幷序>(≪朝鮮金石總覽 下≫), 825쪽·827쪽.까지도 눈에 띈다. 전혀 신빙성이 없지만, 이런 법통설이 나오고 있는 사실 자체가 산중승단의 법통에 대한 높은 관심을 말해 준다. 어쨌든 휴정이 임제의 종풍을 세우고 이후 그 문하들이 법통의 相承계보를 확립해가는 가운데, 조선 중·후기의 산중승단은 새로운 자활의 힘을 응집시킬 수 있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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