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Ⅳ. 학문과 종교
  • 8. 도교와 민간신앙
  • 1) 도교
  • (1) 과의도교

(1) 과의도교

 조선시대에 들어와 한양 천도 이후 昭格殿을 건립하고 거기에서 道流가 국가를 위해 禳災祈福하는 齋醮를 거행하였다. 이것은 국가에서 관장하는 科儀 즉 의식 중심의 도교이다. 세조 12년(1466) 정월 15일의 官署改稱 때 소격전은 昭格署로 개칭되었고, 그 직제는 정5품의 署令 하나를 두어 그 규모가 축소되었다. 道流取才(도교의식을 집행하는 도사를 국가고시를 통해 선발함)는 존속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慈壽宮을 두어 女官(女流道士)을 거처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던 것이 조선 중기에 내려와 소격서를 혁파하자는 논의가 대두되어 정치문제로까지 파급되었다. 연산군 치하에서 한때 소격서가 혁파되었으나 곧 복구되었다. 중종 재위 중에 소격서 혁파문제를 둘러싸고 왕실과 유신들 사이에 극심한 대립이 빚어졌다.

 특히 중종 때 趙光祖를 선두로 한 당시의 新進士類들은 강력한 소격서 혁파 주장을 내세우고 왕실측과 대립하기에 이르러 간접적으로는 己卯士禍(1519)를 일으킨 불씨가 되기까지 하였다. 중종 13년(1518) 9월 3일에 국왕은 부득이 신진사류의 극성스럽고 핍박에 찬 요구에 굴복하여 소격서를 형식적으로나마 혁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는 동안 상소와 상계가 무수히 바쳐졌고 중종의 완강한 거부태도는 되풀이되었다. 같은해 6월 21일의 대간의 상계는 다음과 같다.

소격서는 이단 중에도 심한 것으로 마땅히 없애야 할 것입니다. 근자에 듣기로는 민간의 말에 따라 대신에게 물으시자 대신들은 다 없애야 한다고들 말했는데 임금께서 홀로 고집하시고 안된다고 하셔서 조정의 의론이 다 불편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黃老의 술에서 나온 것으로 처음에는 하늘에 빌어서 수명을 연장하려는 것이었습니다. 兩漢 이전에는 단지 祓禳하는 일이 있었을 뿐이고 본래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당대에 와서 醮祭가 시작되었습니다. 唐 玄宗이 그것을 매우 좋아했으나 마침내는 화란을 면치 못했습니다. 宋 徽宗이 그것을 숭상하고 독실하게 믿어 지극하게 존봉하였으나 앙화는 역시 극단에 달했습니다. 이런 일을 가지고 보더라도 (도교의 초제로는) 수명을 연장할 수 없었을 뿐더러 수명이 더욱 축소되었습니다. 三代 이전에는 본래 이단이 없었으나 연대가 오래되자 衰世의 임금이 먼저 안으로 자신의 덕을 닦지 않고서 밖으로 이단을 신봉하여 장수를 빌었습니다. 전혀 그렇게 될 까닭이 없으니 속히 혁파하시기 바랍니다(≪中宗實錄≫권 33, 중종 13년 6월 기축).

 같은해 7월 27일 李沆·金希壽가 올린 사헌부와 사간원의 合司上疏 중 도교를 비판하고 소격서 혁파를 주장한 대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대저 도교는 이단의 하나입니다. 荒怪妄誕하고 세상을 속이고 하늘을 더럽히고 도를 심히 해치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식견이 있으면 누가 그 근본을 단절하기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쇠미한 세상의 임금은 선한 일을 하는데 스스로 힘쓰지 못하고, 자기 고집을 세우려 하고, 화복을 겁내고, 길흉과 邪正 사이에서는 눈이 어지러워져 전도시키고, 옳지 않은 것에 집착하고, 한갓 玄虛를 일삼아서 쇠란과 위망의 화를 불러오는 데도 이른바 道力과 神功은 그것을 구해내지 못합니다. 송의 道君(徽宗) 같은 자가 鑑戒가 되기에 족합니다. 지금의 소격서 역시 고려의 폐단의 전철을 뒤따르고 없애지 못하고, 없애지 못할 뿐 아니라 또 그것에 따라 官守(관리로서의 직책)를 마련하고, 또 宰臣을 보내서 香幣를 드리고, 水旱과 災厄을 당할 때마다 으레 경건하게 고하고 祈禳하여 이른바 복리를 구하니 그것이 과연 이치에 닿습니까. 성종대왕께서는 우뚝하게 정도를 자임하시고 王者의 학문에 힘쓰셔서 이치를 밝히심이 이미 뚜렷하여 사악함을 없애기에 의심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祝壽齋를 없애시고 나서는 또 도교를 없애서 정학의 올바름을 크게 나타내고 사도의 뿌리를 크게 끊어서 일대의 正脈을 부식하려고 하셨으나, 당시의 대신 韓明澮는 재식이 명석하지 못해 그 아름다우신 뜻을 받들어 따르지 못해 그 의론이 드디어 가라앉아 버려 정도가 펴지지 못하게 만들고 사교가 다시 의지할 곳이 생기게 만들었습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식자는 통한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실 무렵 대간과 시종이 이 일을 누차 말씀드렸사온데 끝내 윤허를 받지 못했었습니다(≪中宗實錄≫권 34, 중종 13년 7월 갑자).

 중종이 조종조에서부터 해오던 일을 폐지할 수 없다고 굳게 거부하자 대간들은 總解職하고서 항거하고 나섰다. 그러나 중종은 한번 폐지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이상 폐지하는 것을 허락하지 못하겠다고 완강하게 버텼다. 그 일로해서 국가의 고시를 시행하기 어렵게 되고 또 조광조 등이 밤중까지 물러나지 않고 집요하게 혁파를 요청하는 바람에 중종은 결국 굽히고 소격서의 혁파에 동의하기에 이르렀다. 조광조의 집요한 혁파요청의 상계와 기묘사화를 연계시켜 논하는 評說이 나오기도 하였다.≪燃藜室記述≫에는≪思齋摭言≫과≪東閣雜記≫의 기사를 요약한 다음과 같은 논평이 실려 있다.

正德 戊寅(중종 13년;1518)에 兩司, 玉堂 및 藝文館에서 번갈아 글을 올려 소격서를 없애기를 청했고, 대신들 역시 그 일을 상계했으나 여러 달을 두고 윤허하지 않았다. 부제학 조광조는 면담을 청해서 극론하였고, 그 이튿날 僚員을 거느리고 伏閣四啓했으나 윤허하지 않자 승지에게 ‘이 윤허를 받지 않으면 오늘은 물러갈 수 없다’ 라고 말했다. 날이 저물어 대간들이 다 물러가자, 조광조는 서글프게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날은 이미 저물었고 언관들은 다 물러가 버렸으니 우리들은 죄책을 받더라도 정성을 다해서 論列해야 한다’ 라고 말하고 밤새도록 물러가지 않고 왕의 마음을 돌릴 때까지 論啓를 계속하여 닭이 울어도 그치지 않았다. 왕이 이르기를, ‘이 일을 내가 어찌 윤허하지 않겠는가. 다만 그 유래가 오래 되었기 때문에 난감해 하는 것 뿐이다. 내일 대신들에게 물어 의논하여 혁파하겠다’라고 했다. 大內 엄밀한 곳에서 中使가 밤새 드나들며 번번히 알리고 그칠 줄을 모르니 임금인들 어찌 듣기 싫어하는 마음이 없었겠는가. 신하가 임금을 간하는 데는 간단하게 정상적인 경로를 밟아서 해야 한다. 임금을 이렇게까지 핍박하고서 무사할 수 있었던 자는 아직까지는 없었다(李肯翊,≪燃藜室記述≫권 7, 中宗朝記事本末 己卯禍源).

 이렇게 해서 소격서를 혁파하게 되자 승정원에서는 충청도에 있는 太一殿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고 결국 그것도 혁파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신진사류가 숙청된 후에 중종은 모후의 병중 간청이라 하여 소격서를 부활시키고 신료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초제와 기도를 행하게 하였다.

 소격서에서 도류에 의해 거행된 초제가 실제로 어떻하였는지는 지금으로서는 零星한 간접적인 자료를 통해 막연하게 알아보는 길 밖에 없다. 소격서의 초제에 직접 참례했던 成俔이 그 내용과 초제를 거행하는 광경을 적은 한 짧은 항목이≪慵齋叢話≫에 실려 있다.

대저 소격서는 다 중국 조정의 도교 행사를 따르고 있다. 太一殿에는 七星의 여러 별들에 제사하는데, 그 신의 형상은 다 머리를 늘어뜨린 여인의 모양을 하고 있다. 三淸殿에는 玉皇上帝, 太上老君, 普化天尊, 梓潼帝君 등 10여 위에 제사하는데 다 남자의 형상이다. 그 나머지의 안팎 여러 제단에는 四海龍王神將, 冥府十王, 水府諸神 등의 位版에 이름을 쓴 것을 늘어놓은 것이 무려 수백 종이다. 獻官과 署員은 다 흰옷과 烏巾 차림으로 齋를 하고 冠, 笏 및 예복의 차림으로 제사를 집행한다. 제사에는 여러 가지 과일과 곡식과 떡에 茶湯과 술을 차려 놓고 향을 피우고 백번이고 절을 한다. 도류는 머리에 逍遙冠을 쓰고 몸에는 무늬가 번쩍이는 검은 옷을 입고, 磬을 24번 울린 후에 두 사람이 道經을 읽고 또 푸른색 종이에 祝文을 써서 그것을 태운다(成 俔,≪慵齋叢話≫권 2).

 이 밖에 국가에서 관장하는 도교의 초제와 관계되는 것으로는 강화의 摩尼山 塹星壇에서의 祭天行事이다. 마니산에서의 제천행사는 우리의 고유신앙에서 출발된 것이었으나 오랜 세월을 거쳐오는 동안에 도교적인 신앙 내지 그 제례와 合糅하여 특이한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강화의 마니산과 전등산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하던 곳으로 본래 단군이 그의 세 아들을 시켜 제단을 구축했기 때문에 그 곳을 三郞城이라고도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강화의 마니산은 한반도의 성역같이 전승되어 내려왔던 것이다. 그런데 산정에 있는 제단을 참성단이라고 하여 어느새 星宿의 초제와 결부되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마니산의 塹星醮가 행해졌고 조선시대에도 그 초제는 계속되었다. 연산군 6년(1500) 2월 정유일에 의정부에서 마니산 齋宮의 營繕을 停罷하기를 청원했는데, 연산군은 마니산의 영선은 별에 제사하는 곳을 위한 것이니 정파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중종 6년(1511) 6월 계미일의 柳崇祖의 자술에 의하면 그는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마니산에 가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그 곳의 제단에는 옥황상제의 위가 마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동왕 11년 2월 정유일의 朝講에서 金應箕는, “소격서와 마니산의 제는 다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니 이는 심히 僭越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선조 2년(1569)에 李珥가 摩尼山醮禮靑詞의 제작을 사퇴한 일이 있고, 인조 19년(1641)에는 마니산에 제단을 세우는 등 하여, 매년 香祝을 내리고 제사를 지내게 한 일이 있다.≪東文選≫권 115에 실려 있는 조선 초기의 卞季良이 지은<摩尼山塹星醮禮靑詞>를 보면, 三獻에 “三淸의 도는 오묘하여, 어둑하니 알기 어렵도다. 정성을 다해 再獻을 드리니, (상제께) 감응하여 통함이 빠르도다”라고 하여 그 곳에서의 초제가 도교 일색으로 기울어져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삼헌 말미에서 “병장기는 거둬들이고 철은 순조로와 농사는 풍년지고 물건은 풍성하도다”라고 한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마니산의 참성초 역시 國泰民安을 기축하는 행사였던 것이다. 강화도 마니산에서 제단을 설치하여 하늘에 제사한 연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될 것이지마는, 역시 신선가들 사이에서 나온 海上仙山의 전설과 결부되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앞의 변계량의 청사에서, “산은 바다 위에 떠 있어 속세와 멀리 떨어져 있도다. 제단은 구름 사이에 솟아 있어 신선의 수레를 맞이하기에 합당하도다”라 하여 이 점이 극명하게 나타나 있다. 강화도의 마니산은 바다 위에 떠 있어서 속세와 멀리 떨어져 있고, 그 산정에 마련된 제단은 구름 사이에 높이 치솟아 있어 해중의 삼신산과 방불하니 옥황상제를 비롯한 여러 신선들이 강림하기에 마땅한 곳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단군은 한반도의 仙派의 조종으로 받들어져 왔으므로 마니산의 제천은 단군과 직결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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