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Ⅳ. 학문과 종교
  • 8. 도교와 민간신앙
  • 1) 도교
  • (3) 도교적 양생론과 의약 연구

(3) 도교적 양생론과 의약 연구

 수련적인 도교에서 상식에서 벗어난 미신적인 허황된 부분을 제거하면 건강관리에 크게 도움이 되는 방법이 적지 않으므로 당시 도교를 신봉하지 않던 계층에서도 그러한 수련법에 관심을 갖는 인사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도교에서 개발한 양생론과 의술이 당시 지식인들의 주의를 끌게 되었던 것이다. 또 설혹 도교적인 수련법 가운데 다소간 합리성이 결여되거나 미신적인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손 치더라도 의약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 사람들로서는 어느 정도까지는 그런 것에 기울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이 시기는 주자학을 숭상하던 때였으므로 당시 지식인들은 주자가≪참동계≫와≪陰符經≫같은 도서에 관심을 가지고 校注作業을 한 것 등에 영향을 받아 그러한 부류의 책들을 열람하는 것을 꺼리지 않아 도교적인 수련법에 대해서 조예가 깊은 사람도 나오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일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심신의 수양, 건강의 관리 내지는 생활의 운치 등 다양한 의의를 도교적인 수련법에 부여하게 되었고, 동시에 종교적인 의의가 극도로 희석된 상태에서 수련적인 도교가 받아들여지게도 되었다.

 李珥도 도교적인 방법을 감안한 다음과 같은 醫藥策을 피력한 바 있다.

수명 장단의 분수는 하늘에 달려 있다고는 하나 保養하는 기틀이야 사람에 달려 있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병이 나기 전에 氣를 기르고 병이 난 후에 병을 고치고 올바른 命을 순리로 받고 섭생함을 잃지 않는 것으로, 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이런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 기가 약하더라도 잘 기를 수 있다면 장수를 기대할 수 있다. 기가 강하더라도 그것을 상해하게 만든다면 조사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저 昌陽(창포의 일종)이 수명을 연장시키고 黃精이 맥을 보하는 것 역시 그런 이치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주야는 생사의 도리인지라 생이 있으면 반드시 사가 있게 마련이니 藥餌로 구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즉 장생불사하는 도와 蟬蛻換骨하는 술이야 어찌 그렇게 될 이치가 있겠는가. 대낮에 하늘로 올라간 사람은 틀림없이 없을 것이고 靈丹으로 신선이 되게 한다는 그런 약은 틀림없이 없을 것이다. 황금을 이룩할 수야 있겠는가. 沆瀣야 먹을 수 있겠는가. 천지 사이에는 實理뿐이니 그 이외의 설은 공격하지 않아도 절로 깨진다(李珥,≪栗谷全書≫拾遺 6, 雜著 3, 醫藥策).

 여기에 피력된 견해를 가지고 본다면, 율곡은 도교에서 선단을 연조하여 신선이 되어 천상선계로 날아 올라간다는 설은 믿지 않지마는, 도교에서 개발한 창양이나 황정 같은 延年益壽한다는 약물의 사용은 그것 나름의 이치가 있어 받아들일만 하다는 태도를 취했다. 수명의 장단은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으나 평상시에는 기를 기르고 발병시에는 치료를 해서 타고난 수명은 보전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의료시설이 충분하지 못하고 일반적으로 유교적인 효경의 뜻에 입각한 事親養老에 대한 열성이 대단했던 시대였으므로 당시의 지식인들은 양생론과 의술에 대한 관심이 깊었고, 그러한 관심의 소산으로 비망기적인 양생설이나 의약기사도 적지 않게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도교적인 색채가 짙은 양생설로서는 명필로도 알려진 守谷 李燦(1498∼1554)의 것이 있는데, 그 양생설이 8폭 병풍으로 쓰여 있는 것을 李滉(1498∼1554)이 얻어 읽고서 양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명한 다음과 같은 발문을 쓰기까지 하였다.

天仙은 원치 않고 地仙이 되고 싶다. 옛 사람이 이 말을 나에게 일러 주었거니와 衰病에 시달려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생각하면서도 오래도록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수곡 이공이 강호에서 養靜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 속으로 그 일을 사모하였는데, 하루는 前縣監 허모군이 수곡이 쓴 양생설 8폭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 글을 읽고 그 글씨를 玩賞한 나머지 수양하는 일에 감회를 갖게 되어 더욱 晦菴(朱子)이 伯陽의 책(≪參同契≫)을 사랑하는 뜻을 알게 되었다. 아아, 수곡이 지선이 될 수 있는데 난들 될 수 없겠는가. 글 끝에 몇 글자를 적어서 돌려 보낸다. 내일 산으로 돌아가련다. 嘉靖癸丑(명종 8년;1553)에 淸凉山人이 씀(李滉,≪退溪全書≫43, 書許監察所藏養生說後).

 이 글만을 가지고도 퇴계가 도교적인 양생술에 대해 관심이 절실했음을 알 수 있다. 퇴계의 글은 수곡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쓴 것이다. 수곡은 57세에 죽었으므로 물론 장수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통해 우리는 양생설을 둘러싼 당시 지식인들의 의식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정염은≪북창비결≫에서 修丹之道를 설명하는 도중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風邪의 질환은 혈맥 속에 숨어 있어 캄캄한 어둠 속에서 돌아다니므로 그것이 몸을 죽이는 도끼임을 알지 못한다. 오래 되어 經絡에 옮겨가고 膏肓 속에 깊이 들어간 연후에 의사를 찾아가 약을 쓴다 해도 이미 늦는다. 正氣와 풍사는 氷炭 같이 서로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정기가 머물러 있으면 풍사는 절로 달아나고 百脈이 절로 유통하고 三宮이 절로 승강하는데 질병이 어디로 해서 생겨나겠는가. 조금만 (정기를 보존하는 데에) 정근하면 반드시 수명을 연장시켜 죽는 날을 뒤로 물리치게 될 것이다(鄭,≪北窓秘訣≫1장;李能和≪韓國道敎史≫, 320쪽).

 이것은 결국 질병이 범접하지 못하게 미리부터 준비를 갖추는 일종의 건강법 내지는 양생법을 말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양생관은 더욱 확대되고 더욱 세련되어서 조선시대 의학의 기본체계를 확립시켜 주기에 이르렀고 나아가서는 의학의 본의를 해명하는 데까지 전개되었다.

 조선 중기에 한국의 의학은 규모, 체제, 내용 등 각 방면에 걸쳐 장족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여러 가지 의서의 편술과 저작이 용의주도하게 추진되었고 각종 중국 의서의 飜刻과 교주 및 언해가 정력적으로 진행되었다. 조선 중기에 내려와 편술된 의서 가운데는≪동의보감≫이 최대의 걸작으로 꼽히고, 국내외의 의약계에 널리 환영되었고, 또 당시로서는 그렇게 되기에 손색이 없는 명저이기도 했다. 이≪동의보감≫은 서와 목록 2권, 內景篇 4권, 外形篇 4권, 雜病篇 11권, 湯液篇 3권, 鍼灸篇 1권 도합 25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許浚(1546∼1615)의 주편으로 광해군 2년(1610)에 찬술이 완결되었고 동왕 5년에 內醫院에서 그 초판본이 간행되었다.≪동의보감≫의 편찬에는 정염의 아우 정작이 참획하였으므로 거기에는 정씨 형제의 도교적인 의학관이 충분히 반영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경편 첫머리에 있는 集例에≪동의보감≫전체의 編例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이 삼가 생각하옵건대 사람의 몸은 안에는 오장육부가 있고 밖에는 근골과 肌肉과 혈액과 피부가 있어서 그 형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精·氣·神이 臟腑百體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교의 三要와 불교의 四大는 다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황정경≫에는 내경의 글이 있고 의서에도 역시 內外境象의 그림이 있습니다. 도교에서는 淸淨과 수양을 근본으로 삼고 醫門에서는 藥餌와 鍼灸로 치료를 합니다. 이는 도교에서는 그 精을 얻었었고 의문에서는 그 粗를 얻은 것입니다. 이제 이 책은 먼저 내경의 정·기·신 및 장부를 내편으로 하였고, 다음에 외경의 두면, 수족, 筋脈, 골육을 취해서 외편으로 했습니다. 또 五運之氣, 四象三法, 內傷外感의 여러 가지 병에 관한 證驗을 열거하여 잡편으로 하였고 끝에 탕액과 침구를 다뤄서 그 변화를 남김없이 들어내어, 만약에 병자가 책을 펼치고 들여다 본다면 허실경중과 길흉사생의 조짐이 거울같이 밝게 드러나서 망령된 치료를 가해서 요절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였습니다(奎章閣圖書本(7608) 1, 集例).

 이것만을 가지고도≪동의보감≫은 도교의 교설을 숭상하여 그 哲理로 의학의 본의를 해명하려 하였고 일반적인 의술은 오히려 종속적인 것으로 돌렸음을 알게 된다.≪동의보감≫의 편자는 예리한 과학적인 사고력과 체계설정의 천재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아서 도교는 그 정을, 의문은 그 조를 얻었다고 한 견해를 살린 정연한 구성 밑에서 그것을 살리기 위해 당시 의학계의 온갖 지식을 총집결하고 그 의의의 해명에는 도교의 후생과 실용을 존중하는 정신을 취하고 편찬에 임했다. 내경편에서는 身形과 정·기·신에 대해 道書를 많이 인용해서 설명하고 醫者는 무엇보다도 이것들을 保養治理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공전의 체계화된 의서를 편술해 내어 조선 중기 이후의 계속된 의학상의 엄정한 기풍을 정립시키기에 이르렀다.

 ≪동의보감≫에는 또 도교의 부적이나 방위법 같은 것까지 소개되어 있다. 잡병편에 安産室의 시설이 설명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安産方位圖와 催生符가 제시되어 있고, 다음과 같은 지시가 달려 있다.

안산방위도 및 최생부와 借地法을 다 붉은 색으로 산모방 안 북쪽 벽에다 써놓는데, 먼저 안산도를 붙이고 다음에 최생부를 붙이고 다음에는 차지법을 붙이고는 차지법을 세 차례 讀呪하고 끝낸다(許浚,≪東醫寶鑑≫雜病篇 10, 하).

 이런 것은 실로 미신적인 것이어서 오늘날에 와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산고를 완화시키고 난산을 수습하는 일에 대해서는 별로 좋은 지혜가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전혀 손을 쓰지 않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약물의 사용 이외에는 이러한 산실의 시설을 하게까지 되었던 것이다. 이런 것은 미신으로 돌려버리면 그만이겠지만, 오늘날의 용어를 가지고 말한다면 심리적인 요법의 일종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동의보감≫이외에 李宗準(?∼1499)의≪神仙太乙紫金丹方≫1권, 朴雲(1493∼1562)의≪衛生方≫, 鄭推仁의≪頤生錄≫, 鄭士偉(1536∼1592)의≪壽養叢書類輯≫2권, 崔奎瑞(1650∼1735)의≪降氣要訣≫등은 다 쟁쟁한 지식인들에 의해 저술된 도교의 색채가 짙은 의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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