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Ⅴ. 문학과 예술
  • 1. 문학
  • 2) 소설과 판소리

2) 소설과 판소리

 金時習(1435∼1493)의 단편소설집≪金鰲新話≫로부터 시작된 우리 소설의 역사는 16세기에 들어 한결 풍성해졌다. 蔡壽(1449∼1515)의<薛公瓚傳>, 沈義(1475∼?)의<大觀齋記夢>을 위시하여 申光漢(1484∼1555)의 단편소설집≪企齋紀異≫, 林悌(1549∼1587)의<元生夢遊錄>·<花史>·<愁城誌>, 崔晛(1563∼1640)의<琴生異聞錄>, 그리고 설화를 토대로 형성된<崔孤雲傳>등이 이 시기에 나타났다. 이들 작품은 신라 이래 서사문학의 한 양식인 傳奇와 寓言의 성격을 이어받고 있는바, 특히 이 두 성격을 공유하면서 꿈 속 세계에 가탁하여 이상세계를 구현하거나 현실모순을 문제삼는 夢遊錄 유형이 뚜렷이 부각되고 있다.

 채수의<설공찬전>은 輪廻禍福의 이야기,0781)≪中宗實錄≫권 14, 중종 6년 9월 기유. ‘설공찬이 다른 사람의 몸을 빌어 몇 개월씩 머물면서 자기의 원한과 저승에서의 일을 말한 것’0782)魚叔權,≪稗官雜記≫권 2.이라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저승 세계와의 교통을 다룬 傳奇的 소설이다. 순창에 사는 설충란에게 남매가 있었는데, 딸은 결혼하여 바로 죽고, 아들 설공찬도 장가 들기 전에 병들어 죽었는데, 설공찬 남매의 혼령이 설충란의 동생 설충수의 집에 나타나 그 아들 공침에게 들어가 병들게 만들고, 저승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다는 것이 한글 낙질본0783)李文楗,≪黙齋日記≫背面의 필사본.에 담겨 있는 내용이다. 이 작품으로 인해 채수는 ‘荒誕不經’한 글을 지었다 하여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기까지 하였다.

 심의의<대관재기몽>은 꿈 속에서 이상세계를 구현하는 몽유록 작품군의 표본이 된다. 심의는 꿈 속에서 崔致遠이 天子로 있고 역대 동방의 문인들이 주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文章王國에 이르러 뛰어난 詩才를 인정받아 관료로서 영화로운 삶을 누린다. 宋風을 숭상하며 반란을 일으킨 金時習을 물리치는 등, 특히 이 작품에는 唐風을 숭상하는 심의의 문학관이 강렬히 드러나 있다. 꿈 속에서 주인공 심의가 顯達의 삶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일생담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軍談까지도 포함하는 점에서,<대관재기몽>은 17세기 후반의 김만중의<구운몽>및 후대의 영웅소설과의 맥락을 예견해 준다.

 심의는 己卯士禍(1527)의 주역인 권신 沈貞의 아우였음에도 불구하고 당대 현실 여건에 불만과 비판적 안목을 가져, 결국은 관료사회의 타락한 훈신들로부터도, 강직한 사림들로부터도 모두 환영받지 못했던 인물로서, 家禍를 염려해 일찍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癡人으로 행세하며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이러한 현실과는 유리된 채 문장왕국에서 영화를 누린다는 것이 작품 속의 세계인데, 이는 곧 심의 자신이 늘 지녀왔던 관료적 문인의 이상을 구현해 본 것이라 하겠다.

 신광한이 지은 단편소설집≪기재기이≫(1553년 간행)에는 네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崔生遇眞記>는 三陟 頭陀洞天을 배경으로 하여 최생의 신선 체험을 그린 것이고,<何生奇遇傳>은 하생과 冥界 여인과의 애정을 다루었다.<書齋夜會錄>과<安憑夢遊錄>은 각각 文房四友와 後園의 화초를 의인화한 작품으로, 작자 자신의 인생관이 우의적으로 투영되어 있다. 특히 주인공이 후원 화초의 精靈들과 만나 盛宴을 갖는<안빙몽유록>은 그들 정령이 또한 중국 역사상의 인물들이 화한 것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갖도록 구성하여, 작자 신광한의 역사관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임제는<원생몽유록>과 함께 寓言 계통의<화사>·<수성지>를 지어 다양한 형태의 소설을 남겼다.

 <원생몽유록>은 현실의 모순을 직설적으로 드러내 비판하는 몽유록 작품군의 표본이 된다.

그는 일찍이 古代의 역사를 즐겨 읽었는데, 일대의 왕조가 패망하여 나라의 운명이 다하고 國勢가 꺾이는 대목에 이르면, 책을 덮고 흐느껴 울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마치 자신의 몸이 그 때에 처한 듯하여, 서두르고 애써 보아도 패망해 가는 나라를 지탱할 아무런 힘도 없는 듯하였기 때문이다(林悌,≪白湖集≫ 附錄,<元生夢遊錄>).

 여기에 묘사된 것처럼 慷慨한 성격의 선비인 元子虛가 꿈 속에서 단종과 死六臣을 만나 그들의 원한 섞인 시를 듣다가 꿈에서 깨는 것이 내용이다. 일생을 탈속과 방랑으로 보낸 임제가 사육신의 좌절을 통해 문제삼고 있는 것은 결국 봉건관료사회의 모순과 사대부의 좌절이다. 소망스러운 이념과 역사의 실재가 결코 합치되지 못하는 데 대한 절망이 이 작품에 반영되어 있다. 최현의<금생이문록>은 이<원생몽유록>의 영향을 입어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善山을 중심으로 한 영남 출신의 유림을 추모하여 유가적 이념을 구현하였다.0784)<認齋年譜>(≪一善志≫)에 따르면,<금생이문록>의 초고가 만들어진 것은 1591년이며, 이를 고쳐 완성한 것은 1594년이다.

 임제의<화사>는 꽃을,<수성지>는 사람의 心性을 의인화하여 깊이 있는 寓意를 담고 있는데, 이 뒤를 이어 黃中允(1577∼1648)의<天君紀>, 金宇顒(1540∼1603)의<天君傳>, 鄭泰齊(1612∼1669)의<天君演義>, 林泳(1649∼1696)의<義勝記>등 심성을 의인화한 작품들과, 金壽恒(1629∼1689)의<花王傳>등 꽃을 의인화한 작품들이 17세기에 거듭 나타난 바 있다.

 16세기 후반의0785)<效顰雜記>(≪稗林≫ 권 7)의 기록에 의하면, 高尙顔이 1579년에 ‘금돼지 일이 상세하게 기록된’<崔文昌傳>을 金滉을 통해 보았다고 하였다. 金集(1574∼1655) 手澤本≪傳奇集≫에도<崔文獻傳>이라는 제목으로<최고운전>이 수록되어 있다. 소설<崔孤雲傳>은 신라말의 문인 崔致遠을 소재로 하여 설화적 윤색을 많이 덧붙인 작품으로, 무덤 속 두 여인의 혼령과 사랑을 나누는≪太平通載≫소재<최치원>과는 다른 내용이다. 최치원이 중국에 들어가 黃巢의 亂을 물리치는 檄文을 짓고, 이후 신라에 돌아와 가야산에 은거하는 역사적 사실의 뼈대 위에, 많은 神異談이 보태어졌다. 그 어머니가 금돼지에게 납치되었다 구출된 후 최치원이 태어나매 금돼지의 자식으로 알아 아버지가 길에 버리게 하였으나, 牛馬가 피해 가고 선녀가 젖을 먹이고 백조가 날개깃으로 감싸 보호한다든가, 중국 천자가 石函에 계란을 넣은 것을 최치원이 알아맞추는 시를 짓는다든가, 중국으로 가는 길에 용왕의 둘째 아들 이목을 만나 그를 통해 가뭄이 든 섬에 비를 내리게 한다든가, 중국에 들어간 후 여러 장애물을 막아내고 자신을 살해하려는 독약이 든 밥을 알아채 먹지 않는다든가, 중국 신하들의 讒訴로 인해 南海 孤島에 유배되고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지만, 이슬을 먹으며 살아나고 이후 중국 천자를 질책한 후 신라에 돌아온다는, 神異한 설화적 요소가 다양하게 엮어져 있는 점이<최고운전>의 특징이다. 신라인을 능멸하려는 중국에 대하여 최치원이 거듭 뛰어난 재능으로 이를 雪憤한다는, 강렬한 주체의식의 발현이 특히 주목된다.

 양란을 거치고 난 17세기에는, 현실경험의 세계를 여실하게 그려 보이며 현실모순의 문제를 뚜렷이 부각시키는 수준 높은 작품들이 거듭 나타나 소설사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간다.

 許筠(1569∼1618)은<蓀谷山人傳>·<嚴處士傳>·<張山人傳>·<南宮先生傳>·<蔣生傳>등 현실에서 불우한 생애를 살다 간 逸士들의 삶을 傳의 외피를 빌어 형상화한 한문소설과, 서자로 태어난 홍길동이 신분적 질곡을 갈등으로 느껴 가출한 후 의적 活貧黨의 괴수가 되어 봉건적 통치질서를 흔들고 마침내는 바다 속의 한 섬에서 이상국을 건설한다는 내용의 한글소설<洪吉同傳>0786)李植은 허균이 지은 것을 ‘洪吉同傳’이라 기록하고 있다(≪澤堂集≫권 15, 雜著, 散錄).<洪吉童傳>의 이본은 19세기 중엽 이후의 것만이 있고 허균이 지은 당대의<홍길동전>은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허균이 지은 것은 16세기에 실존했던 도적 洪吉同을 傳양식을 빌어 형상화한 한문소설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蔣生傳>에 나타나는 ‘바다 가운데 섬’의 理想國 형상이나 빈민구제의 문제,<豪民論>,<遺才論>에 공히 나타나는 봉건적 통치질서와 신분질서에 대한 비판에서 볼 수 있듯이 허균이 지었던<홍길동전>에 담겨진 내용과 사상은 현재 전하는 이본의 그것과 상통할 것이다.을 지었다.

 양란의 전란 체험을 배경으로 하여 나타난 몽유록 작품들은 당대의 현실을 직설적으로 드러내 비판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임진왜란 후 산야에 드러난 채 있는 朽骨의 收葬 문제를 배경으로 하면서, 부도덕한 벼슬아치에 대한 비판과, 신분모순에 따른 애정갈등의 문제를 삽화로 담아 보여주는<皮生冥夢錄>, 임진왜란을 패배의 참상으로 이끈 무력한 장수들에 대한 매도와 순국한 용사에 대한 추모를 교차시킨 尹繼善(1577∼1604)의<㺚川夢遊錄>, 임진왜란에서의 패배가 국가 兵制의 모순에 따른 것임을 지적하고, 流民의 머리를 베어 그 머리를 깎아 왜놈의 것이라고 하여 포상을 받기도 하는 임란 직후 사회의 부도덕한 현실을 고발하는 黃中允의<㺚川夢遊錄>, 정유재란 당시 황석산성에서 몰사한 郭䞭 등의 원혼이 출현하여 당시 開門納賊한 白士霖의 행위를 공박하고 그럼에도 그를 褒揚하는 그릇된 현실을 비판하는 申言卓의<龍門夢遊錄>,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된 원인이랄 수 있는 江華留守와 조정 대신들의 비리를, 그 와중에서 죽게 된 여인들이 등장하여 규탄하는<江都夢遊錄>등이 모두 그러하다.

 특히<피생명몽록>은 다층적인 구조 속에 깊은 문제의식을 함축하고 있는 작품으로서, 주인공 피달에게 김검손이 밝힌 이야기의 내용 속에, 前生으로부터 此生에까지 이어지면서 벗겨지지 않는 강고한 신분질서의 질곡이 빚어내는 비극과, 그것의 근원적 부당성이 제기되어 있어 주목된다.

 고려시대 廉興邦侍郞에게 예속된 賤隷인 金伊와, 시랑의 賤妾인 木歡은 지극히 자연스러우면서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지만, 그 사랑은 참담한 종말을 맞게 된다.

어느 날 저녁 侍郞은 梨花亭 위에 곤히 누워 醉興을 타 잠 들었으니 때는 3월 15일이었습니다. 달빛이 뜨락에 가득하고 꽃그림자가 땅에 가득한데 그녀는 창안에 있었고 나는 창 밖에 있었습니다. 서로간에 눈이 마주쳐 情을 누를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손을 잡고 門屛 사이에서 雲雨의 情을 나누었고 끊어질 수 없는 인연을 이루었습니다. 혹은 담장의 구멍을 뚫고 나가기도 하고 혹은 담장을 넘어 들어오기도 하여, 한 번 가고 한 번 오며 밤마다 만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일 년이 못 가 그녀는 아이를 가져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생김새가 나의 모습과 꼭 닮았습니다. 시랑이 그것을 알자, 木歡을 마당에서 매로 쳐 여린 손이 끊어지고 옥같은 살결이 허물어져 마침내 嚴威 아래에서 숨지게 되었고, 나 또한 마찬가지로 태어난 아이와 함께 紅橋의 곁에 버려졌습니다(<피생명몽록>(국립중앙도서관본),≪필사본고전소설전집≫3, 아세아문화사, 1980, 229쪽).

 두 사람의 밀회의 결과로 태어난 아이가 염흥방시랑이 아닌 김이를 꼭 닮음으로 해서 그 사랑의 내용이 발각된 후, 두 사람은 장살되어 갓난아이와 함께 紅橋 옆에 버려진다. 그러나 그들이 인간세상에서 겪는 이러한 현실은 근원적으로 부당한 것임이 곧이어 강조된다. 冥府에서 그들은 죄없이 죽임 당한 것이라고 판결되고 다시 인간세상에 환생케 되는데, 시공을 뛰어넘어 조선 중엽의 인물로 태어난다. 그러나 신분질서의 질곡에 의한 고통은 다시 此生에까지 계속된다. 목환은 사족의 딸로, 김이는 역리로 태어남에 따라 ‘士族과 常庶의 等分’으로 인해 또다시 인연을 맺지 못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冥司에서 죄없이 죽임을 당했다 하여 함께 이 세상에서 삶을 얻게 해 주어 그녀는 權氏의 딸이 되고 나는 金哥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前世의 名字에 따른 것이었지요. 宿緣이 다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마땅히 부부가 되었어야 하나, 국속에 사족과 상서의 등분이 있어 혼인을 이룰 수 없게 되었습니다(<피생명몽록>, 229∼230쪽).

 일명<壽聖宮夢遊錄>으로도 불리는<雲英傳>0787)‘天啓 6년(1626)’의 간기가 적힌≪花夢集≫(북한 소재)에<운영전>이 수록되어 있다.은 주인공 柳泳이 임진왜란의 와중에 폐허가 된 수성궁의 遺墟에서 배회하다가 꿈 속에서 雲英과 金進士의 혼령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듣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安平大君의 수성궁에 간직된 十宮姬의 한 사람인 운영이 김진사와 비밀스런 사랑을 나누다가 결국은 그것이 탄로나 자살하게 되는 시말을 통해, 인간이 누려야 할 평등한 자유와 본능적 애정이 봉건질서의 질곡에 의해 제약당하는 모순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한 궁녀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 그같은 주제를 대변해 준다.

이미 塵世에 있을진대 山家野村과 農墅漁店의 어느 곳인들 可치 않으리오마는, 深宮에 깊이 갇혀 籠中에 든 새 같으니 누런 꾀꼬리 소리를 들어도 탄식하고 푸른 버들을 대하여도 한숨 쉴 뿐이라. 어린 제비도 쌍 지어 날고, 깃들이는 새도 둘이 앉아 졸며, 풀에도 合歡草가 있고, 나무에도 連理枝가 있어, 무지한 초목과 至微한 새마저도 또한 음양을 稟受하여 서로 즐기지 아니함이 없거늘, 우리 十人은 유독 무슨 죄 있기에 적막한 심궁에 일신이 오래도록 갇혀 春花秋月에 孤燈을 짝하여 혼을 사르며, 헛되이 청춘의 나이를 버리고 공연히 저승의 恨을 남기니 賦命의 薄함이 어찌 이다지 심한가. 사람 목숨이 한 번 늙어지면 다시 젊어지지 못하리니 그대는 다시 생각하여 보라.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雲英傳>, 校合本,≪단편소설선≫, 민중서관, 1978).

 <相思洞記(英英傳)>0788)權佺(1583∼1651)의≪釋老遺稿≫권 1에<余罹病久矣, 病中無聊莫甚, 使兒輩讀相思洞記, 至金生與榮伊相別之語, 漫吟爲却病之資>라는 제목의 시가 있고, 李健(1614∼1662)의≪葵窓遺稿≫권 3에<題相思洞記>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는 檜山君의 시녀 英英과 金生이 비밀리에 사랑을 나누는 내용으로서,<운영전>과 그 소재가 유사하다. 그러나, 작품의 결말에서 회산군의 아내가 이들의 사랑을 이루어 주는 점에서, 문제의식은 보다 약화되어 있다.

 趙緯韓(1567∼1649)의<崔陟傳>과 權韠(1569∼1612)의<周生傳>은 양란을 배경으로 하여 파란만장한 離合을 겪으면서 만들어 내는 남녀 주인공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최척전>은 정유재란의 와중에 헤어진 부부가 천신만고 끝에 만남과 이별을 거듭하는 내용으로 엮어져 있다. 정유재란 때 왜군이 남원 땅에 쳐들어와 아내 옥영은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고 남편 최척은 명나라 군대를 따라 중국에 들어갔다가, 각각 일본과 중국의 상선을 타고 남지나해 해상에서 극적으로 만난다. 중국 땅에서 새로운 삶을 누리며 둘째 아들을 낳지만, 누르하치의 침략을 당해 최척은 명나라 군대에 종군하게 되어 다시 헤어진다. 구원병으로 출전한 조선의 군대와 명나라 군대는 패배하여 최척은 胡族의 포로가 되는데, 여기에서 최척은 조선 군대를 따라온 첫 아들을 만나 함께 도망해 조선 땅 남원으로 돌아온다. 그 사이 옥영은 둘째 아들과 며느리와 함께 살다가 배를 타고 조선으로 향하는데, 천신만고 끝에 조선 땅에 이르러 남원으로 돌아온다. 온 가족이 모두 해후함은 물론, 정유재란 때 조선에 구원병으로 출전한 명나라 군대에 종군했던, 며느리의 친정 아버지까지도 함께 만나게 된다.<최척전>은 작자가 최척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적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기실 이별과 참화로 얼룩진 현실의 삶을 되돌려, 비록 허구의 세계에서나마 기이한 만남을 이루도록 엮음으로써 전란에 시달린 독자들의 아픔을 위로한 것이다.

 <주생전>은 권필이 임진왜란에 구원병으로 출전하여 조선 땅에 온 명나라의 군사인 주생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기록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주생이 기생 배도와 노승상의 딸 선화와 삼각관계의 사랑을 나누다가 마침내 배도는 원망을 품은 채 병들어 죽고 선화와는 사랑을 간직한 채 이별하게되는 상황을 아름다운 문체로 엮어나갔다.

 양란을 배경으로 해 형성된 작품으로서, 전쟁에서 겪은 패배를 돌이켜 거꾸로 전쟁의 승리와 민중영웅의 형상을 만들어낸,<壬辰錄>·<林慶業傳>·<朴氏傳>등 한글로 창작된 歷史軍談小說 유형의 작품들이 또한 나타났다. 그 형성 시기는 17세기 중엽으로 여겨지는바, 전쟁 후 얼마의 시간을 지내면서, 관련되는 설화가 첨가와 윤색을 거치며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임진록>은 서로 내용이 다른 작품이 존재하여 이를 다시 세 계열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공통적으로 특정한 주인공이 없이 임진왜란 때에 활약했던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면서 인물들의 영웅화와 민족의식의 고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임경업전>은 실제 역사에서 망해가는 명을 구하고 청에 대한 원수를 갚기 위해 노력했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沈器遠의 역모에 가담했다는 모함을 입어 억울하게 처형된 인물 임경업을 대상으로 삼아, 탁월한 능력의 인물로 허구화하였다.<박씨전>은 가공의 인물 박씨를 주인공으로 하여 실존 인물 이시백의 부인으로 설정한 후, 박씨가 탁월한 능력으로써 병자호란의 치욕을 설욕하는 내용으로 엮어져 있다.

 <운영전>·<상사동기>·<최척전>·<주생전>등 17세기 전반에 나타난 소설들에서 상당한 장편화의 경향이 나타났거니와, 이제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金萬重(1637∼1692)의<九雲夢>과<謝氏南征記>를 필두로 하여 장편소설이 본격적으로 발전하여 이후 소설사에 웅대한 흐름을 형성한다. 장편소설은 이 시기에 확대되어 가는 사대부계급의 가문의식에 기반함으로써 이른바 家門小說이라는 유형을 이루었다.

 양란을 거치며 나타난 지배체제의 균열을 지키기 위해, 이 시기 사대부계급은 16세기 사림파의 정계 지배로 확립되었던 正體性을 상실한 채, 이념적·정치적 반동화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禮論의 강화를 통해 차별질서를 공고히 해 지배질서를 회복코자 하였으며, 己亥禮訟·甲寅禮訟·庚申換局·己巳換局·甲戌換局의 치열한 권력투쟁을 거치며 상호 배타적으로 당파·문벌·가문의 내적 결속을 강화시켜 간다. 이러한 시대배경에 기인하여 가문의식은 강화되어 갔으며, 장편소설 또한 이러한 사대부계급의 세계관에 잇닿아 있다.

 <구운몽>과<사씨남정기>는 한글로 창작된0789)金春澤은 ‘西浦(김만중)가 한글로 소설을 자못 많이 지었다’(≪北軒居士集≫권 16)라 언급하였으나,<구운몽>의 경우 한문 원작설이 제기되어 있기도 하다. 본격적 장편소설로서, 소재·기법·문제의식 등 여러 측면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이며 문학사에 등장했고, 후대의 문학사에 더할나위 없는 영향을 끼쳤다.

 <구운몽>은 16회의 장회로 이루어진 장편소설이다. 六觀大師의 명으로 동해 용왕을 뵙고 돌아오던 불제자 性眞이 팔선녀와 우연히 石橋에서 만나 희롱하고 나서, 인간계에 대한 미련 때문에 번뇌하던 중, 육관대사의 법력에 의해 인간계에 다시 태어나는 輪廻를 겪는다. 양소유와 팔미인, 즉 진채봉, 계섬월, 적경홍, 정경패, 가춘운, 이소화, 심요연, 백릉파로 각기 태어나 結緣하면서 인간세상의 부귀공명을 지극히 누린 후에 만년에 들어 인생무상을 깨닫고 다시 대사의 법력으로 꿈에서 깨니 이는 도량에서 참선하던 성진의 하룻밤 꿈이었다. 이에 불도에 귀의한 팔선녀와 함께 수도에 정진해 보살대도를 터득하고 극락왕생한다는 것이<구운몽>의 전체 내용이다.<구운몽>은 이처럼 작품 전체가 幻夢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상적으로 볼 때에≪金剛經≫의 空사상의 내용을 작품의 전체 구조 속에 시현하고 있다. 불가의 청정담박함에 회의를 느끼고 속세의 부귀공명에 미혹되었던 성진은, 꿈 속에서 인간속세의 지극한 부귀공명을 체험하고 난 뒤 이번에는 속세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불가의 세계로 돌아오고자 하는데, 육관대사는 이러한 성진을 오히려 질책한다. 육관대사는 현실과 꿈, 법계와 세속이 결코 둘도 아니며 하나도 아니라고 가르침으로써, 이 두 세계의 어느 것만을 부정하거나 긍정하지 않는 초월적 태도를 보인다.

또 네가 말하길, ‘제자가 인간의 윤회의 일을 꿈 꾸었습니다’라 하니, 이것은 네가 꿈과 인간세상을 나누어 둘로 보는 것이다. 너의 꿈이 오히려 아직 다 깨지 못하였구나. 莊子가 꿈에 나비가 되고, 나비가 또 변하여 장자가 되었음에, 장자가 ‘나비의 꿈에 장자가 된 것인가. 장자의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마침내 분간할 수 없다’라 하였으니, 어떤 일이 꿈(夢)이며 어떤 일이 참(眞)인지 누가 알겠는가. 지금 네가 性眞으로서 너의 몸이 되고, 꿈으로써 네 몸의 꿈이 되었은 즉, 너 또한 몸과 꿈으로써 하나가 아니라고 일컬을 것이다. 성진과 少游에게 있어, 어떤 것이 꿈이며, 어떤 것이 꿈이 아닌고(<九雲夢>, 姜銓爕本, 134쪽).

 <구운몽>에서 꿈 속 세계인 양소유의 일생은 곧 사대부의 출장입상과 가문창달의 이상이 구현되는 과정이다. 이러한 가문의식이 가장 잘 나타나는 부분이 작품의 후반부에서 양소유와 월왕이 양부의 전력을 쏟아 승마와 사냥으로 겨루고 미색과 풍악을 뽐내며 번성한 가문의 위세를 과시하는 ‘樂遊園경연대회’의 부분이다. 이처럼<구운몽>에서 처음 구체화된, 사대부의 출장입상과 가문창달의 이상이 실현되는 줄거리는 이후 18, 19세기에 성행하게 되는 가문소설과 18세기 후반 이래 대중적 호응을 얻으며 쏟아져 나오는 일련의 통속적 영웅소설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사씨남정기>는 남주인공 유연수를 중심으로 본처인 사정옥과 첩인 교채란이 벌이는 처첩 갈등으로 엮어진 작품이다.<사씨남정기>는 봉건적 가족제도의 모순인 처첩갈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그것은 이 작품의 작자인 김만중 자신이 연루되어 귀양을 가기도 하는 사건인, 숙종을 중심으로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벌이는 갈등의 역사사실을 연상시켜 주기도 하여 그 문제의식에 있어 주목된다. 또한 표현기교의 면에서도 악인형인 교채란과 동청 및 냉진 등의 인물형상이 사실적으로 묘사된 뛰어난 작품이다.

 그런데<사씨남정기>또한 가문의식에 밑받침되어 있다. 작품의 전반부에서 사정옥과 교채란의 처첩갈등이 문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후반부에서 사정옥은 현숙한 임씨를 다시 유연수의 첩으로 천거함으로써, 봉건적 가족제도의 모순인 축첩제도의 문제가 이 작품에서 궁극적으로 제기되고 있다고는 보기 어렵다.<사씨남정기>에서 가문의식이 전형적으로 나타난 부분은 ‘糟糠下堂 舅姑感夢’의 장회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가문에서 방축된 사정옥이 시부모의 묘소를 찾아가 지키는 중, 꿈 속에서 시부모의 가르침을 입게 되는데, 이 대목 이후의 작품의 전개는 꿈에서 계시된 바의 예언의 틀을 따라 전개되며, 첩 교채란의 악행이 드러난 후 사필귀정을 고하는 家廟告禮로써 파란만장한 家禍를 매듭짓는 것으로 작품이 구성되어 있다.<사씨남정기>에서 드러난 바와 같은 처첩간의 갈등과 그로 인해 가문의 위기가 닥치고 다시 궁극적으로 해소되는 줄거리는, 이후 18, 19세기에 성행하게 되는<玉麟夢>·<花門錄>·<一樂亭記>·<雙仙記>를 비롯한 많은 작품에 수용되어, 선한 처와 악한 賜婚妻간의 갈등과 같은 처처갈등, 그리고 선한 처와 악한 첩간의 처첩갈등의 양상으로서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구운몽>과<사씨남정기>를 이어 장편소설의 전통을 확립시킨 작품이 趙聖期(1638∼1689)의 작으로 알려진0790)영남대본<창선감의록>에는 ‘金道洙(1699∼1733) 所述’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彰善感義錄>이다. 작품 전체에 걸쳐 무려 100명이 넘는 크고 작은 인물들이 등장하여 역사사실을 무대로 하면서 복잡다단한 사건들을 엮어가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창선감의록>은 明의 嘉靖 29년(1550)으로부터 가정 말년(1566)에 이르는 기간인 16세기 중엽의 중국사회를 무대로 하여, 權奸 嚴嵩이 정권을 장악하는 데에서부터 사건이 발단하여 그가 실각하는 데에서 작품이 끝맺어진다. ‘세세명문거족’인 花氏家의 흥망성쇠를 중심으로 엮어진 이 작품은<사씨남정기>와 유사한 구성 위에서 보다 많은 인물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진 양상을 보여준다. 주인공 화진은 화씨 가문의 둘째 아들로서 이상적인 인품을 소유하고 있는 반면, 맏아들인 화춘과 그를 낳은 심씨부인은 편협하고 용렬한 성격의 인물로 등장한다. 심씨부인과 화춘의 모해와 濁亂으로 해서 화씨 가문은 파멸지경에 이르게 되는데, 화춘의 애첩인 조녀(월향)와 조녀의 간부인 범한, 그리고 화춘의 친구 장평 등의 악인이 끼어들어 온갖 농간을 부림으로써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그러나, 엄숭이 조정에서 축출되어 정국의 전환이 오는 것과 함께 가문도 옛 영화를 회복하게 된다. 문벌세족의 가문내적 갈등과 정국변화에 따른 가문의 흥망을 다루고 있는<창선감의록>의 내용은, 17세기 후반 여러 차례의 정치적 격변과 그로 인한 벌열의 확립 내지 가문의 몰락을 겪게 되는 조선의 현실을 연상시켜 준다.

 <구운몽>,<사씨남정기>,<창선감의록>의 뒤를 이어0791)이 밖에 17세기 후반의 작품으로는, 洪柱元(1606∼1672)의≪無何堂遺稿≫에<戱書諺書蘇生傳>이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 확인되는<蘇生傳>, ‘崇禎紀元後丙辰(1676)’의 필사기가 적힌<한강현전>(이수봉본), 일본 문인 雨森芳洲의<詞稽古之者仕立記錄>에 1702년에 그를 통해 한국어 공부를 하였다고 기록한<淑香傳>과<李白瓊傳>등이 있다.<蘇賢聖錄>,0792)權燮의≪玉所稿≫에 그 어머니 李氏(1652∼1712)가<소현성록>을 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玩月會盟宴>,0793)趙在三의≪松南雜識≫에는<翫月>의 지은이가 安兼濟의 어머니 李氏夫人(1694∼1743)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완월>은<완월회맹연>을 가리키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李庭綽(1678∼1758)의<玉麟夢>등의 장편소설이 연이어 나오고, 이러한 장편소설은 사대부가의 남녀 독자들을 향유층으로 하여 18세기에 대대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17세기 서사문학사에서 주목되는 현상의 또다른 하나는 민중의 의식을 짙게 담은 판소리가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판소리는 창과 사설, 그리고 창자의 동작과 고수 및 관중의 추임새 등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이라 할만한 특이한 장르이다. 판소리의 기원은 호남지방의 단골무들이 부르는 敍事巫歌 또는 그 굿에서 유래하였으리라는 추정이 유력한데, 장편 구비서사시의 형식, 창과 아니리를 섞어 부르는 구연방법, 음악적 장단 및 선율구조와 창법 등의 많은 부분에서, 전라도 지방의 서사무가와 판소리는 서로 친연성을 보인다. 역대 판소리 창자 대다수가 이 지방의 巫家 출신이었다는 사실도 이러한 연관을 짐작케 해 준다.

 판소리가 하나의 예술로서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晩華 柳振漢(1711∼1791)이 호남지방을 여행하다가 판소리<春香歌>의 연행을 관람한 후 이를 한시로 옮긴 晩華本<春香歌>가 지어진 것이 1754년이고, 이 가운데에 ‘濟州將留裵將齒’라는 기록이 있음으로 해서<배비장타령>과<춘향가>가 늦어도 18세기 전반에는 성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직업적 演戱로서 성공하기 위해 창자들은 다채로운 내용과 음악성을 갖추기에 힘써야 했고, 그 결과 18세기 중엽의 판소리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창악적 서사시로 발전하였지만, 초기 단계의 판소리는 내용과 표현이 모두 소박하였을 것이다. 전래하여 오던 설화를 근간으로 하여 윤색하고 개작하면서 성립된 작품들은 창자들의 師承 및 교류에 따라 전승되면서 부분적인 개작과 세련 즉 ‘더늠’의 형성에 의해 다채로운 내용과 음악성을 점차 축적해 가게 된다. 초기 단계의 판소리에 투영된 사회의식은 그 창자들이 중세적 신분질서에서 가장 낮은 지위에 속하는 천민이며 18세기 말까지는 평민층 청중들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었음을 볼 떄, 평민적 세계관과 미의식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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