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Ⅴ. 문학과 예술
  • 1. 문학
  • 3) 한문학

3) 한문학

 16세기의 한문학은 서울을 중심으로 문인 학자층이 두텁게 형성됨에 따라 다양하게 분화되어 발전하였다.

 관료로서 현달한 문인들의 문학을 흔히 館閣문학 혹은 官人문학이라 칭하는데, 그 문학적 경향을 일괄해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15세기 관인문학의 거두인 徐居正과 姜希孟의 뒤를 이어 이 시기에 南袞(1471∼1527)이 문장가로 이름을 얻었는데 그는 영의정에까지 오른 인물로서, 현실을 벗어나는 아름다움의 세계를 추구하곤 하였다. 李荇(1478∼1534)은 좌의정에까지 오른 반면 朴誾(1479∼1504)은 갑자사화 때 귀양갔다가 25세의 나이로 사형당하는 불우한 삶을 살았으나, 함께 海東 江西派로 불리었는데, 이는 중국 송대에 黃庭堅과 陳師道가 기발한 착상과 참신한 표현으로 새로운 풍조를 일으킨 것을 이들이 재현했기 때문이었다. 朴祥(1474∼1530)은 시에 뛰어나 이행·박은과 함께 평가되었다.

 鄭士龍(1491∼1570), 盧守愼(1515∼1590), 黃庭稶(1532∼1607)은 ‘館閣三傑’로 유명하였다. 세 사람 모두 대제학의 지위에 올라 시대의 문풍을 좌우하였는 바, 시어를 치밀하게 다듬고, 분방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추구해, 관인문학을 최고 수준에 올려놓은 것으로 평가받았다.

二八初夜秋 초가을 열엿샛날 밤

三千弱水前 삼천리 뻗은 약수가 앞에 놓였네.

昇平好樓閣 좋은 누각이 고요하매

宇宙幾神仙 우주는 거의 신선계로다.

曲檻淸風度 굽은 난간으로 맑은 바람 지나가고

長空素月懸 긴 하늘에는 흰 달이 걸려 있네.

愀然發大嘯 쓸쓸히 큰 울음소리 내며

孤鶴過蹁躚 외로운 학이 너울너울 지나가네 (盧守愼,≪穌齋集≫ 권 1,<十六夜喚仙亭>).

 이 시에서 느낄 수 있는 바와 같이, 노수신은 침울하면서도 老健한 맛이 있고, 분방하면서도 비장한 느낌을 준다는 평을 받았다.0794)金昌協,≪農巖集≫권 34, 雜識, 外篇.

 이러한 관인문학의 경향과 달리, 徐敬德(1489∼1546), 李彦迪(1491∼1553), 李滉, 曺植(1501∼1572), 金麟厚(1510∼1560), 李珥 등으로 이어지는 사림문학의 흐름이 16세기 문학의 주요한 한 흐름을 이루었다. 이들은 활발한 논변을 통해 철학적 깊이를 심화시키는 한편, 강호자연에 대한 사변적 인식을 문학에 표현하였다.

萬象紛然不可窮 삼라만상 어지러워 궁구할 수 없으나

一天於穆總牢籠 한 하늘이 深遠해 모두를 감싸고 있네.

雲行雨施神功博 구름 다니며 비 내리게 하니, 신령한 공덕 넓으며

魚躍鳶飛妙用通 물고기는 뛰고 솔개는 나니, 오묘한 작용 두루 통하네.

雖曰有形兼有迹 형상이 있고 자취도 있다 하나

本來無始又無終 본래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것.

沈吟黙契乾坤理 우주의 이치와의 묵계를 나직히 읊조리며

獨立蒼茫俯仰中 창망한 천지 가운데에 홀로 섰네(李彦迪,≪晦齋集≫권 1,<感興>).

 이언적의 이 시는 道學詩에 속하는 것으로, 시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우주와 자아와의 교감이 그 주제인데, 모든 개체의 生滅이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우주의 영원성 안에 놓여 있다는 것, 인간 존재는 우주생명의 온전한 稟受者로서 우주와 함께 영원하며 우주와 병립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드러나 있다. 선조 때에 정치의 중심 세력으로 자리를 굳힌 사림은 이후 朴淳(1523∼1589), 高敬命(1533∼1592), 成渾(1535∼1598), 鄭澈 등을 배출하였다.

 ‘穆陵盛世’라 불리는 이 시기에는 三唐詩人이라 일컬어지는 白光勳(1537∼1582), 崔慶昌(1539∼1583), 李達의 활동이 두드러지는데, 이들은 典故가 까다롭고 사변적인 宋詩를 배격하고, 한 순간에 포착된 인간의 진실된 감정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唐詩를 추구하여 하나의 경향을 이루었다.

朔吹沙楡落 삭풍 불어 물가 느릅나무 잎 지고

河關驛路斜 강가 관문에 이르는 길은 비스듬한데

客中逢九日 나그네로 중양절을 만나거니

上馬折黃花 말 위에서 노란 국화 꺾어보네.

飄梗無常處 이리저리 떠돌아 일정한 거처 없어

良辰倍憶家 좋은 절기라 고향 집 더욱 그립네.

遙遙望孤戍 아득히 바라보면 외로운 변방

城樹憶悲笳 성의 나무에서 기억나는 슬픈 호드기 소리(李達,≪蓀谷詩集≫ 권 2,<端川九日>).

 이달은 뛰어난 재능을 지녔음에도 서얼이라는 신분 때문에 그 능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그 일생은 좌절과 방랑의 연속이었는데, 위의 시에는 그러한 외로움이 애절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달의 면모를 許筠은 다음과 같이 적은 바 있다.

그의 시는 맑고 새롭고 아답고 화려하여 … 신라, 고려 때로부터 唐詩를 배운 자가 모두 그를 따르지 못하였다. 이는 실로 思菴(朴淳)이 북돋아준 것이며 마치 陳涉이 漢 高帝(劉邦)를 열어준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달의 이름은 이로부터 동국을 휩쓸었다. 사람들이 그의 시는 귀중하게 여기면서도 그 사람은 버리고 쓰지 않았다. 그러나 끝까지 그를 칭도한 이는 오직 詞林의 서넛 大家들이었고, 속인들이 그를 질투하는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을 뿐더러 그를 더럽히고 모욕하여 刑網에 얽었으나 마침내 죽여서 그의 이름을 빼앗지는 못했다. 이달의 외모는 고상하지 못한 데다가 성격이 또 호탕하여 구속을 입지 않고 또 세속의 예법을 아랑곳하지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에게 미움을 입었다(許 筠,≪惺所覆瓿藁≫ 권 8,<蓀谷山人傳>).

 양란을 거치고 난 17세기에 들면, 한문학에서도 많은 새로운 변화의 흐름이 나타난다.

 林悌와 權韠은 15세기에 방외인적 삶을 살았던 김시습의 뒤를 이은 비판적 문인이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은 당파의 이익에 얽매인 당대 지식인의 부도덕을 비판하고, 엄격한 자기성찰의 자세를 보여 준다.

獻賦論兵心事違 글 바쳐 병무를 논해도 마음과 일 어긋나니

此生蓬纍欲何依 이 몸 떠돌다 어디에 의지하려나.

風塵滿眼知音少 바람 먼지 눈에 가득, 날 알아주는 이 적어라.

海上千峯獨掩扉 바다 위 천 봉우리에 홀로 사립을 닫네(權韠,≪石洲集≫ 권 7,<書懷>).

 권필은 임진왜란 때 재상이었던 李山海와 柳成龍의 책임을 물어 그들을 참수해야 한다고 상소한 바 있으나, 그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도리어 거친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위의 시에는 자신의 뜻을 펼 수 없는 풍진 세상에서 뜻을 같이 할 친구조차 없을 때의 고독감이 절실히 담겨 있다. 李安訥(1571∼1636)도 고답적인 표현을 멀리하고 절실하고 기발한 시상을 작품화함으로써 권필과 견주어 평가된다.

 허균은 명문 집안 출신으로서, 아버지 許曄을 비롯해 형 許筬과 許篈, 누이 許蘭雪軒이 모두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그 자신 자유분방한 기질을 지닌 저항적 성향으로 ‘禮敎가 어찌 자유로움을 구속하리오’라 하면서 지배층의 규범을 거부하였다.

老妻殘日哭荒村 해 저문 황촌에 늙은 아낙 통곡소리,

蓬鬂如霜兩眼昏 헝클어진 센 귀밑머리에 흐릿한 두 눈.

夫欠債錢囚北戶 지아비는 빚 못 갚아 북호에 갇혀 있고,

子從都尉向西原 아들은 도위 따라 서원으로 갔다네.

家經兵火燒機軸 집은 병화로 베틀까지 탔고,

身竄山林失布褌 산 속에 몸 숨기다 베잠방이도 잃었소.

産業簫然生意絶 먹고 살 길 막막해 살 뜻조차 없는데

官差何事友呼門 관리는 무슨 일로 또 부르는 것인지(許筠,≪惺所覆瓿藁≫ 권 2,<記見>).

 허균의 이 시에는 전쟁으로 인해 생활의 기반을 잃었는데도 관리들의 가렴주구에 시달려야 하는 怨民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허균은<豪民論>0795)許 筠,≪惺所覆瓿藁≫권 11.에서 원민은 평소에는 호소할 길 없는 억울함을 품고 묵묵히 순종하지만, 豪民이 나라의 어지러운 틈을 타서 반기를 들면 모의하지 않아도 스스로 결집하는 무서운 존재라고 논한 바 있다. 일생 동안 저항적인 삶의 태도를 견지했던 허균은 문학에 있어서도 전대의 典範을 모방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자신의 시가 그 누구의 시를 닮았다라고 평가되지 않고, 오직 ‘許子之詩’로 불려지기를 원했다. 문학이란 작가의 내면에 축적된 경험과 감정이 독특한 개성으로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17세기에는 오랜 기간 동안 사대부의 전유물이었던 한문학의 영역에 중인층 작가들이 등장하였다. 崔奇男(1586∼1668), 南應琛 등≪六家雜詠≫의 시인이 17세기 전반에 등장하고 뒤이어 17세기 후반에 최기남의 아들인 崔承太, 林俊元 등 洛社 시인들이 활동하였다. 17세기 말엽에는 洪世泰(1653∼1725), 高時彦(1671∼1734), 鄭來僑(1681∼1757) 등이 등장하여 18세기 초중엽까지 활동하며 중인문학을 발전시켰다.

交遊已絶嵇康懶 게으른 혜강처럼 교유를 끊고

禮法全疎阮籍狂 미친 완적처럼 예법을 무시하네.

榮辱不關身外事 영욕은 나와 관계없는 일이니

綠陰長晝坐匡床 한 낮 녹음 아래 평상에 앉아 있노라(崔奇男,≪龜谷集≫ 권 3,<閑中謾吟>).

 최기남의 이 시에는 신분 모순에 대한 자각이 짙게 투영되어 있다. 이 시에서 보이는바, 교유를 끊고 예법을 무시하는 자유로운 삶을 지향하는 것은, 자의적인 선택이라기보다는 영욕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는 처지에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최기남의 자전적 작품인<拙翁傳>은 중인층의 사회적인 처지와 그들의 自意識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세상에 졸옹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어떠한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농업·상업을 업으로 하지 않으며 그를 부르는 이름도 없다. 옷은 짧은 베옷이요, 먹는 것은 거친 음식이며, 집은 초가집이요, 외출할 땐 걸어다닌다. 사람들이 보고 조소하지 않는 이가 없지만, 빙긋이 오만한 기색이다. 외모와 언행이 남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남들은 현달해도 그는 곤궁하며, 남들은 형통해도 그는 어려우니, 才德이 같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稟受받은바 命에 厚薄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저들의 達이 지혜로 얻은 것이 아니요, 그의 窮이 어리석음으로 잃은 것이 아니니, 모두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러니, 저들만 못한 것을 부끄러워 한다면, 본디 그러하게 된 이치를 모르는 것이다(崔奇男,≪龜谷集≫ 권 4,<拙翁傳>).

 개인적 차이는 있으나, 홍세태를 비롯한 중인층 작가들은 대체로 자신들의 신분적 제약을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정치적 의미가 탈색된 자연에서 낭만적 삶을 지향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강한 자부심은 있었으나, 그것을 펼 수 없게 하는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적극적 태도를 보이지는 못했다고 하겠다.

 17세기는 文學論에 있어 중요한 변화가 나타난 시기이다. 특히 詩論으로서 天機論이 대두한 것은, 보편적 규범을 절대시한 중세적 사고로부터 모든 개체의 개성을 그 자체로 중시하게 된 중요한 변화이다.

 그 이전 16세기 사림파의 문학론은 주자학적 道文一致觀으로서, 철학과 문학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수양을 통해 축적되고 개발된 작자의 ‘性情之正’을 표현한 것이 문학이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문학에 대한 도학파들의 이런 입장은 훈척세력들과 대결하면서 중앙정계에 진출하던 시기에 나온 것으로서, 지식인들에게 구도자적 태도를 강조함으로써 훈척세력과의 변별성, 도덕적 우월감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문학을 養心的·敎化論的 차원에 한정함으로써 인간 감정의 다양한 층위 중에서 이런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을 사장시키게 되었다.

시는 天機이다. 聲으로 울려나고 色澤으로 빛나는데, 淸濁雅俗은 자연에서 나오는 것이다. 聲과 色은 人爲로 만들어 낼 수 있으나, 천기의 妙는 인위로써 할 수 없는 것이다. 성이나 색만으로 같아질 수 있는 것이라면, 마음이 흐려진 무리도 彭澤(陶淵明)의 韻을 빌려 쓸 수가 있고, 속이 좁은 사람도 靑蓮(李白)의 詩語를 모방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같게 하려고 하면 광대꼴이 되고 흉내를 내면 거짓이 되니 대체 왜 그런가. 그것은 眞이 없기 때문이다. 眞이란 무엇인가. 천기를 일컫는 것이 아니겠는가(張維,≪谿谷集≫ 권 6,<石洲集序>).

 張維(1587∼1638)는 이처럼 시의 본질을 天機로 규정하였는바, 천기의 妙는 인위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고 ‘眞’에서 우러난 것이라 하였다. 작자의 情을 자연스럽게 표현함으로써 개성적인 가치있는 작품이 산출된다는 것이다. “넓고 큰 우주는 크게 감싸 만물이 생겨나니, 形과 氣를 부여받아 천기가 스스로 울려나네. 각자 자기의 性대로 情을 펼치는 것이니 우리 인간이 보고 듣게 하려는 것은 아니네”0796)張 維,≪谿谷集≫권 1,<蛙鳴賦>.라 하여 개구리의 울음은 개성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설파한 장유의 다른 글에서도 그러한 인식이 드러난다. 천기론적 문학관은 김만중, 김천택, 洪大容 등으로 이어지면서, 명분론적 의식과 차별 질서에 결박되어 있던 중세적 질서를 벗겨내는, 의미 있는 문학관으로 확대된다. 중국문학에 대한 우리 민족문학의 의의, 한문문학에 대한 국문문학의 의의, 사대부문학에 대한 평민문학의 의의를 인정하는, 즉 이제껏 상대적으로 貶視되었던 문학의 영역을 두루 인정하는 점에서 그러하다.

 17세기에는 또한 古文論이 활발히 논의되었다. 이 시기 고문론은 ‘文必秦漢, 詩必盛唐’의 주장 아래 글을 지으면서 표절과 난삽한 표현을 당연시했던擬古文派를 반대하고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 주안점은 논자마다 방향이 달랐다. 李植(1584∼1647)은<作文模範>0797)李 植,≪澤堂集≫권 14, 雜著.에서 老莊과 같은 異端之文을 멀리하고 聖賢義理之文인 四書와 六經을 익혀 글을 쓴다면 그것이 바로 고문이라고 주장하여 글의 내용을 강조한 반면, 허균은<文說>0798)許 均,≪惺所覆瓿藁≫권 12.에서 고문을 ‘뜻은 깊지만 일상어를 사용하여 쉽게 지은 글’로 정의하면서 고문의 전범을 규정하는 태도를 비판하고 ‘서로 답습하지 않고 각기 일가를 이룬 글’은 모두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는 상대적 입장을 취하였다.

 17세기에는 서울의 지식인들에게서 백과사전적 체계를 갖춘 책들이 대거 편찬되었다. 柳夢寅(1559∼1623)의≪於于野譚≫, 李睟光(1563∼1628)의≪芝峰類說≫등이 그것인바, 전대로부터 있어 왔던 雜錄類의 전통을 이은 것이라 하겠으나, 인문과학뿐 아니라 자연과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펼치는 새로움이 두드러진다. 이런 작업을 통해 주자학에 매몰되어 있었던 당대 지식인의 안이한 학문 태도를 비판하였는바, 이러한 상대적·다원론적 의식의 전환은 장유의≪谿谷漫筆≫, 김만중의≪西浦漫筆≫에서도 확인되는 것으로서, 17세기 개명된 지식인들의 흐름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18, 19세기에까지 활발히 이어졌다.

<張孝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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