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Ⅴ. 문학과 예술
  • 2. 미술
  • 2) 서예
  • (1) 고법으로의 복귀

(1) 고법으로의 복귀

 송설체는 姸麗·婉媚라고 하여 운필이 부드럽고 모양이 아름다운 장점이 있지만 반면 骨力이 부족하고 屈折과 起伏이 적어 쓴 사람의 기백이 잘 드러나지 않는 단점이 있다. 조선 중기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外形美 위주의 글씨에서 벗어나 古格의 필의를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鍾繇·왕희지를 위시한 魏晉書家의 고법이 이상적 목표로 널리 학습되기에 이르렀는데, 더욱이 송설체가 왕희지체로의 복고를 표방한 글씨였기 때문에 송설체의 유행 속에서도 이들 고법에 대한 관심은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이미 선초부터 왕희지의 법첩을 비롯하여 고법의 필적이 다수 실려있는≪淳化閣帖≫이 국내에서 摹刻되었고 태종 16년(1416) 명에서 간행된≪東書堂集古帖≫이 큰 시차없이 국내에 유입된 사실에서도 그러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움직임을 이끈 사람으로서 自庵 金絿(1488∼1534)를 들 수 있다. 中宗反正(1506) 이후 등용된 少壯道學者들은 성리학을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왕도정치의 실현을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주장에 걸맞게 그들은 擬古的인 학문태도를 보이면서 서예에서도 위진고법을 추구하였다. 결국 훈구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기묘사화(1519)의 피해를 입었던 그들이 바로 후세에 추앙받은 己卯名賢으로서 김구가 그들을 대표하는 서가였다.0851)吳世昌 編,≪槿域書畵徵≫권 3, 金絿, 73쪽.
尹根壽,≪月汀漫筆≫(≪大東野乘≫권 57).

 김구 등이 추구하였던 글씨가 송설체의 영향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이후 고법을 통해 송설체의 姸媚한 자태를 덜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聽松 成守琛(1493∼1564)은 신묘한 운필로 蒼古한 기상을 보였고, 退溪 李滉(1501∼1570)은 꼿꼿한 필획과 짜임으로 謹正한 서풍을 보였으며(<사진 1>), 頤庵 宋寅(1516∼1584) 등은 송설체를 따르면서도 단아한 필치를 보였다. 이들이 당대를 대표하는 유학자로서 근정한 행동규범을 따랐던 것처럼 글씨에서도 그러한 경향을 보였는데, 이황이 元의 趙孟頫와 明의 張弼의 글씨가 성행하여 후학을 그르친다고 지적한 사례는 이를 잘 대변하고 있다.0852)李滉,≪退溪先生文集≫권 3, 習書.

확대보기
<사진 1> 五言律詩(부분)
<사진 1> 五言律詩(부분)
팝업창 닫기

 이러한 경향은 다음 세대인 成渾(1535∼1598)·李珥(1536∼1584)·尹根壽(1537∼1616)·韓濩(1543∼1605)·金長生(1548∼1631) 등에 의해 점차 진전되어 갔다. 성혼은 부친 성수침을 이어 雅趣있는 글씨를 보였고, 이이는 활달한 운필로 淸勁한 글씨를 이루었으며, 윤근수는 ‘永和體’라 일컬어질 정도로 왕희지체에 가까운 高古한 글씨를 보였으며, 한호는 왕희지체를 소화하여 石峯體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위진시대의 필적을 새긴 法帖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거듭된 摹刻으로 인해 원형에서 멀어지기도 하였는데, 그 중 왕희지체 小楷법첩인<樂毅論>·

 <東方朔畵像贊>·<黃庭經>등은 그 진위에 대한 의문이 지적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위진고법의 학습을 위한 교본으로 널리 사용되어 조선 중기의 서예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더욱이 한호가 이들을 학습하여 독자적인 서풍을 이루어내자 이후의 서예가들은 석봉체를 따르면서 한편으로 그 근원인 왕희지체에 대한 관심을 심화시켜 갔다. 이에 金集(1574∼1656)·趙希逸(1575∼1638)·吳竣(1587∼1666)·李景奭(1595∼1671)·李正英(1616∼1686)·李俁(1637∼1693)·趙相愚(1640∼1718)·李震休(1657∼1710)·李壽長(1661∼1733)·李漵(1662∼1723)를 비롯한 많은 晉體 서예가들이 속출하였고 마침내 위진고법은 조선 중기 서예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대변하듯 당시의 서예가 대부분이 고법을 표방하고 나섰는데 ‘魏晉筆法·晉體·王法’을 추구했다거나, ‘鍾王·晉人·右軍·二王’을 추종했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왕희지체는 朝鮮晉體라고 할 만큼 이미 조선의 미감에 맞게 토착화되었으며, 또한 이우의≪臨池說林≫, 이수장의≪墨池揀金≫, 이서의≪筆訣≫등 서론이 저술되어 고법에 대한 이론적 규모도 갖추어 갔다. 그 중에서 이서의≪필결≫은 조선시대 서론을 본격적인 단계에 끌어올린 것으로서 서법의 원리를≪周易≫에서 구하는 등 독특한 논리를 펴기도 하였다.

 한편 松雪體는 蘇世讓(1486-1562)·金魯(1498∼1548)·宋寅(1516∼1584)·金玄成(1542∼1621)을 비롯하여 석봉체가 유행한 이후에도 李好閔(1553∼1634)·李弘冑(1562∼1638)·尹新之(1582∼1657)·申翊聖(1588∼1668)·曺文秀(1590∼1647)·柳赫然(1616∼1680)·尹深(1633∼1692)·沈益顯(1641∼1683)·肅宗(1660∼1723)·吳泰周(1668∼1716) 등에 의해 지속되어 갔다. 그 중 南窓 김현성은 유려한 필치로 수많은 비문을 남긴 송설체의 대가로서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사진 2>). 이들 송설체는 뒤로 갈수록 晉體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등 토착화 현상을 보였으며, 18세기 이후로는 英祖(1694∼1776)·趙榮祏(1686∼1761) 등 소수에 의해 명맥을 이어가다가 퇴조하였다.

확대보기
<사진 2>心經贊
<사진 2>心經贊
팝업창 닫기

 조선 후기 문헌에는 이들 송설체를 蜀體라고 불렀다. 이에 대해 李瀷(1681∼1763)은 “송설의 서법을 사람들이 촉체라고 하는데 蜀이란 東坡를 가리키는 것이다” 하였고, 趙龜命(1693∼1737)은 “우리 나라 서법은 대략 세 번 변하였으니 국초에는 蜀(촉체)을 배웠고 선조·인조 이후에는 韓(석봉체)을 배웠으며 근래에는 晉(진체)을 배우는데 규모는 점차 나아지나 氣骨은 떨어진다” 하였다.0853)李 瀷,≪星湖僿說≫권 10, 詩文門.
趙龜命,≪東谿集≫권 6, 題從氏家藏遺敎經帖.
또한 李奎象(1727∼1799)은 “촉체라는 것은 조맹부의 서법이다. 그런데 蜀의 뜻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궁구하지는 못하였다. 黃運祚(1730∼?)에게 들으니 ‘趙法은 東坡에서 나왔는데 동파가 蜀人이었으므로 촉체라고 이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였으며, 柳得恭(1748∼1807)은 “글씨에는 촉체가 있는데 趙松雪을 말한다. 충선왕 때 그의 필적이 다수 동쪽으로 전래되어 지금까지 그 체를 본받는다. 촉체라는 것은 肖體의 잘못인데 肖는 趙字의 반쪽이다” 하였다.0854)李奎象,≪一夢稿≫書家錄 (≪韓山世稿≫권 30).
柳得恭,≪京都雜志≫.

 그런데 동파[蘇軾]가 촉인이지만 그의 글씨를 송설체와 관련짓기는 어려우며 ‘趙’를 ‘肖’로 쓴 연유도 명확하지 않다. 이에 대해 혹자는 송설체의 별칭인 趙體가 뒤에 촉체로 잘못 읽혀져 蜀體라 쓰이게 되었는데 촉은 四川省을 가리키는 말로 조맹부와 무관하므로 字音의 訛變에서 생긴 혼동을 몇 백년간 잘못 사용하였다고 하였으며, 혹자는 조체라 하면 우리말로 욕이 되므로 촉체라 변형시켜 관용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하였다.0855)任昌淳,<韓國書藝槪說>(≪韓國의 美 6:書藝≫, 中央日報社, 1981), 183쪽.
崔完秀,<朝鮮王朝 書藝史 槪說>(≪澗松文華≫46, 韓國民族美術硏究所, 1994), 68쪽.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