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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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서예
  • (2) 석봉체의 유행

(2) 석봉체의 유행

 石峯 韓濩(1543∼1605)는 “성장해서 왕희지가 글씨를 써주는 꿈을 두 번이나 꾸고서 이를 자부하였는데 그의 법첩을 얻어 臨하였더니 더욱 逼眞하였다”고 하였듯이,0856)崔 岦,≪簡易集≫권 3, 韓景洪書帖序.
李廷龜,≪月沙集≫권 47, 韓石峯墓碣銘.
왕희지체를 독실하게 학습하고 이에 숙련된 필치로써 剛硬端正한 필의를 가미한 石峯體를 이루었다. 金正喜가 “비록 松雪의 氣味가 있으나 古式을 깨달아 지켰다”고 하였듯이0857)金正喜,≪阮堂先生全集≫권 8, 雜識. 그도 초기에는 당시 유행하였던 송설체를 배웠던 것 같다.

 한호는 국가의 書寫업무를 담당하는 寫字官으로 활약하면서 선조의 인정을 받아 그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다. 특히 선조 16년(1583) 왕명으로 쓴≪楷書千字文≫이 간행·반포되었고 뒤에도 여러번 중간되어 석봉체의 보급에 주된 역할을 하였다. 이밖에 행서로 쓴≪滕王閣詩序≫·≪石峯淸妙草廬詩序≫·≪廣寒殿白玉樓上樑文≫과≪草書千字文≫등도 판각되어 널리 유행되었다(<사진 3>,<사진 4>). 또한 그는 奏請使나 遠接使의 일원으로 수차 참여하였고 왜란 때에는 명나라 군대나 조정에 보내는 외교문서의 書寫를 전담하면서 필명을 중국인에게도 널리 떨쳤다. 당시 명나라의 대표적 학자였던 王世貞(1526∼1590)은 한호의 글씨를 보고 “성난 사자가 돌을 할퀴는 듯하며 목마른 준마가 샘물로 내달리는 듯하다”고 하였으며, 1606년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에 온 朱之蕃은 “해서가 매우 묘하다. 안진겸의 위이요 왕헌지의 아래이니 조맹부와 문징명은 미치지 못할 듯하다”고 극찬하였다.0858)許 筠,≪惺所覆瓿藁≫권 18,<丙午紀行>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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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石峯千字文
<사진 3> 石峯千字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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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石峯淸妙草盧詩序
<사진 4> 石峯淸妙草盧詩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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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명성과 함께 석봉체는 왕실을 비롯하여 高官으로부터 시골의 선비와 학동에 이르기까지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더욱이 석봉체가 선조의 어필에도 영향을 미치자(<사진 5>), 元宗(1580∼1619)·仁穆大妃(1584∼1632)·義昌君 李珖(1589∼1645)·인조·貞明公主(1603∼1685) 등의 왕실이 석봉체를 따르게 되었고 민간에서도 많은 추종자가 나왔다. 그 가운데 吳竣(1587∼1666)·李景奭(1595∼1671)·金綮(1611∼?) 등이 유명하였는데, 특히 三田渡碑를 쓴 竹南 오준은 석봉체의 대가로서 한호에 비해 좀 거친 획법을 구사하였으며 吳始壽(1632∼1681)·吳始復(1637∼?) 등의 후손도 석봉체를 따랐다. 또한 宋浚吉(1606∼1672)·宋時烈(1607∼1689) 등은 석봉체의 골격을 지키면서 肥厚한 획법을 가미하여 독자적인 서풍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밖에 석봉체는 사자관 글씨의 전형이 되어 이후 직업서가들에게 절대적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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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宣祖御筆
<사진 5>宣祖御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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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석봉체의 출현은 마치 조선의 성리학이 실천적 면모를 갖추게 되면서 문화전반에 걸쳐 조선의 고유색을 드러내는 조짐을 보여 鄭澈(1536∼1593)이 한글문학인 歌辭文學을 일으킨 것이나 崔岦(1539∼1612)이 國土愛를 바탕으로 한 寫生的 소재의 漢文學을 이룬 것이나, 李信欽(1570∼1631)이 眞景風俗圖를 그려내기 시작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0859)崔完秀,<韓國書藝史綱>(≪澗松文華≫33, 1987), 61∼62쪽.

 조선시대에는 承文院에서 事大交隣의 문서와 咨文·御牒·御製·御覽 등을 正書하는 서사업무를 맡아 보았다. 그런데 초기에는 서사담당관이 지정되지 않았으므로 소속 문신 가운데 글씨를 잘 쓰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를 맡도록 하였다. 국가에서는 寫字者의 근무성적을 평소에 매겨 두었다가 근무평가에 참작하였으며 그 중 우수한 사람에게는 守令을 거치지 않고서도 4품 이상의 품계에 오를 수 있는 특전을 주기도 하였다.0860)≪經國大典≫권 3, 禮典 獎勸의 승문원에 관한 세목에는, 문서 20건을 서사한 사람에게 考課에서 上 하나를 받은 것으로 쳐주고, 寫字에 뛰어난 사람은 비록 죄를 저질러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더라도 重犯·私罪가 아니면 그대로 근무하도록 하는 특전을 명시하였다. 또한 승문원 하급직에 初任된 문과 출신자 가운데에서 書才를 육성하고 그들의 서체를 정비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신으로서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적어 많은 양의 서사업무를 감당하기 어렵자 선조년간에는 士·庶人을 막론하고 글씨를 잘 쓰는 사람에게 軍職의 직함을 주고 冠帶를 하여 상근하게 하는 사자관이 생겨났다. 선조대를 대표하는 사자관으로는 韓濩·李海龍·李景良이 있으며, 이후 李福長(1570∼?)·李誠國(1575∼?)·金義信(1618∼?)·李之翰(1604∼?)·李翊臣(1631∼1711)·李壽長(1661∼1733) 등의 뛰어난 사자관이 배출되었다. 이해룡은 한호와 명성을 같이 한 사람으로 아들 李希哲도 사자관이었으며, 이경량은 한호 이후 선조의 총애를 받은 사람이었다. 이복장은 단정한 진체에 뛰어났고 이성국은 송설체를 잘 하였으며 이수장은 진체에 뛰어난 능필이었다. 그 중 한호의 아들 韓敏政(1567∼?)을 비롯하여 이경량·이복장·김의신·이익신 등이 석봉체를 따랐던 사자관이었다.

 사자관은 소속기관인 승문원 이외에도 奏請使·謝恩使·通信使 등의 使行에 참여하거나 都監 등의 한시적 기구에 차출되어 서사업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숙종년간에는 40명 정도의 사자관이 정해졌으며 정조년간에는 그 중에서 뛰어난 사람 8명을 선발하여 奎章閣에 배속시켜 서사업무를 맡아보게 하였다. 이밖에 정부의 각 부서에서 서사업무를 맡아보던 하급직의 書吏들도 승문원 사자관과 같이 직업서예가의 역할을 수행하였던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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