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Ⅴ. 문학과 예술
  • 2. 미술
  • 2) 서예
  • (3) 초서와 전예의 명가

(3) 초서와 전예의 명가

 조선 중기에는 草書에 뛰어난 서예가들이 다수 출현하였는데, 대체로 왕희지·懷素 등의 초서나 송설체에 기반하면서 조선의 독자적 풍취를 이루어 갔다. 한편 明의 초서풍도 일부 수용되었는데 특히 張弼(1425∼1487)의 초서는 우리 나라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명서가로는 大字초서에 뛰어났던 自庵 金絿를 비롯하여 黃耆老·楊士彦 등이 유명하였다.

 孤山 황기로는 회소와 장필의 초법을 가미시킨 독자적 서풍을 이루어 동방의 草聖으로 불리웠는데, 그의 骨氣있는 획법과 생동하는 운필은 낙동강가에 梅鶴亭을 짓고 유유자적한 處士로서의 면모가 잘 나타난다(<사진 6>). 그의 초서는 아우 黃榮老와 사위 李瑀(1542∼1609) 및 柳夢寅(1559∼1623)·李志定(1588∼?) 등에게 영향을 주어 조선 중기 초서풍의 큰 줄기를 이루었다. 유몽인은 장필과 崔興孝·김구·황기로의 초서를 널리 취합하여 유려한 초풍을 이루었으며, 이지정은 황기로의 초서를 활달하게 변화시켜 제자 李命殷(1627∼?)과 조카 李夏鎭(1628∼1682) 등에게 전수하였다.

확대보기
<사진 6> 敬次(부분)
<사진 6> 敬次(부분)
팝업창 닫기

 청아한 시풍의 시조작가로도 유명한 蓬萊 양사언(1517∼1584)은 자유스런 운필과 변화있는 章法으로 쇄탈한 초서풍을 이루었다(<사진 7>). 그는 강원도에서 지방관을 지내면서 금강산을 애호하여 자신의 호로 삼을 정도였는데, 대표적인 필적으로서 萬瀑洞 암반에 大字로 새긴 ‘蓬萊楓岳 元化洞天’의 奇古한 風骨은 그의 탈속한 심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의 형제 楊士俊·楊士奇와 아들 楊萬古 등이 모두 글씨를 잘하였다.

확대보기
<사진 7> 送別詩稿(부분)
<사진 7> 送別詩稿(부분)
팝업창 닫기

 이밖에 河西 金麟厚(1510∼1560)는 淸秀한 필치의≪草書千字文≫을 남겼으며, 玉峯 白光勳(1537∼1582)은 유연한 운필로 妙態를 이루어 아들 白振南(1564∼1618)에게 전수하였다. 鵝溪 李山海(1539∼1609)는 송설체에 바탕한 자가풍의 초서를 이루었고 蒼江 趙涑(1595∼1668)은 깔끔한 초서풍을 보였으며 童土 尹舜擧(1596∼1668)는 圓筆勢가 풍부한 대자초서에 뛰어났다. 이밖에 車天輅(1556∼1615)·車雲輅(1559∼?) 형제는 放逸한 초풍을 보이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 중기의 篆書와 隷書는 대체로 종래의 서풍을 이어갔다고 할 수 있는데 일부 서예가들은 독특한 필법으로 이채를 띠기도 하였다. 그 중 전서는 小篆이 주류를 이루어 碑碣 등에 널리 사용되었으며 記錄畵나 篆刻에서는 古篆體가 널리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서예가로는 金尙容(1561∼1637)·金光炫(1584∼1647)·呂爾徵(1588∼1656)·許穆(1595∼1682)·李正英(1616∼1686)·金振興(1621∼?)·金壽恒(1629∼1689)·閔維重(1630∼1687)·金昌協(1651∼1708)·金鎭圭(1658∼1716)·閔鎭遠(1664∼1736)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仙源 김상용은 여러 전서체에 박통한데다 특히 엄정한 획법의 소전에 뛰어나 많은 頭篆을 남겼으며(<사진 8>), 그의 후손에서 다수의 전예 명서가들이 배출되었다. 松溪 김진흥은 도안적 전서체인 古篆體에 능통하여≪篆大學≫이란 篆字학습서와≪篆海心鏡≫이란 篆字韻書를 지어 고전체의 보급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또한 眉叟 許穆은 先秦儒學을 지향하면서 三代文字인 古文을 연구하여 특이한 전서체를 창안하였는데 대표작인 陟州東海碑에 잘 나타난다(<사진 9>). 그는 낭선군 李俁가 청에서 구입한 자료를 통해 고문연구를 심화시켰는데 특히 衡山神禹碑의 夏禹篆은 그가 蒼古한 필의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전서에 행서의 필의를 가미하고 행서에 전서의 필의를 구사하기도 한 그의 서풍은 李瑞雨(1633∼?)·權珪(1648∼1723)·權萬(1688∼1725) 등으로 이어졌다.0861)金東建,<眉叟 許穆의 篆書 硏究>(≪美術史學硏究≫210, 韓國美術史學會, 1996).

확대보기
<사진 8>李珥神道碑 頭篆
<사진 8>李珥神道碑 頭篆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사진 9>陟州東海碑 藁本(부분)
<사진 9>陟州東海碑 藁本(부분)
팝업창 닫기

 우리 나라의 예서는 고려시대까지 극소수이고 조선시대도 16세기 이전의 예는 매우 드물다. 서풍은 唐隷나 일부 漢隷를 근간으로 삼았지만 이를 충분히 소화해내지 못한 편이라고 하겠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명서가로서 수많은 예서 비문을 남겼으며 전서에도 두루 통하였던 谷雲 金壽增(1624∼1701)은 일부 漢隷碑拓을 접하기도 하였으나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지는 않은 듯하다. 예서에 전서의 자형을 사용하거나 해서의 획법을 가미하는 등 독특한 필치를 보여 주목을 끌었다(<사진 10>). 이후 예서로 이름났던 金鎭圭(1658∼1716)·金鎭商(1684∼1755) 등도 김수증과 유사한 경향을 보였지만 획법에서는 隷法의 본령을 조금씩 터득해가는 면모를 보였다.

확대보기
<사진 10>宋國銓墓碣銘
<사진 10>宋國銓墓碣銘
팝업창 닫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