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Ⅴ. 문학과 예술
  • 2. 미술
  • 2) 서예
  • (4) 필적 간행과 금석 수집

(4) 필적 간행과 금석 수집

 조선시대에는 우리 나라 명서가의 필적을 새긴 각첩이 다수 간행되었다. 선초부터 왕희지의 蘭亭敍·東方朔畵贊, 조맹부의 證道歌·眞草千字文·東西銘·赤壁賦, 雪菴의 頭陀帖 등 중국의 필적뿐만 아니라, 金生·李嵒을 비롯한 우리 나라 역대 명서가들의 필적이나 비문을 摹刻·拓印하여 학습자료로 널리 사용하였다. 이러한 간행사업은 중앙에서는 校書館 등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지방에서는 관아를 비롯하여 사찰·서원·개인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우리 나라 명서가의 각첩으로는 여러 사람의 글씨를 한데 모은 集帖과 한 사람의 글씨만을 새긴 獨帖이 있다. 집첩으로는 安平大君 李瑢(1418∼1453)이 간행한≪匪懈堂集古帖≫이 가장 이른 예로 알려져 있다. 현재 완본은 전하지 않으나 중국법첩을 모각한 부분과 안평대군의 발문이 붙어 있는 一本이 전하며 “김생의 글씨를≪비해당집고첩≫에서 보았다”는 기록이 있어0862)朝鮮總督府 編,≪朝鮮金石總覽≫上, 188∼189쪽, 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의 側面追記 (1509년, 李沆 記, 朴訥 書) 참조. 중국과 우리 나라의 필적을 함께 새겼음을 알 수 있다. 이후≪海東名迹≫·≪東國名筆≫·≪大東書法≫등 다수의 집첩이 간행되었다.

 ≪海東名迹≫은 申公濟(1469∼1536)가 간행한 石刻本이다. 前冊에는 조선 문종·성종의 어필과 崔致遠·金生·靈業·坦然·李嵒·申德隣의 글씨가, 後冊에는 李岡·僧 慧勤·成石璘·朴礎·權近·李詹·鄭道傳·鄭摠·閔子復·河演·申檣·無名氏의 글씨가 실려 있다. 내용은 시문류이고 서체는 해행초인데 글씨가 정선되고 각법도 양호하다. 후에 이를 모각한 木刻本도 전한다.

 ≪東國名筆≫은 李俁가 간행한 석각본이다. 이 첩에는 김생·최치원·영업·무명씨·탄연·文公裕·이암·韓脩·성석린·신장·崔興孝·姜希顔·朴彭年·안평대군·成任·鄭蘭宗·成世昌·金希壽·김구·성수침·황기로·성종·송인·양사언·한호 모두 25명의 필적과 말미에 이우의 발문이 있다. 서체는 해행초이고 내용은 시문이나 비문의 일부를 모각하였는데 분량은 소략하지만 각법이 예리하고 탁법이 매우 정갈하다. 한편 체제와 내용이 유사한≪觀瀾亭石刻≫이란 첩도 이우의 간행으로 전한다.

 ≪大東書法≫은 李志定(1588∼?)이 간행하였다는 목각본으로 간년은 미상이다. 신라의 金生에서 17세기 전반에 이르는 명서가 51명의 글씨가 실려 있다. 서체는 해행초이고 내용은 대부분 시문으로 일부 비문도 있는데 각법이 양호하고 글씨도 정선된 편이다. 이러한 집첩의 전통은 1859년 朴文會의≪古今歷代法帖≫일제강점기에 白斗鏞이 편집한≪海東歷代名家筆譜≫및 일본인 中村不折의≪草露貫珠≫등으로 이어졌다.

 이밖에 조선시대 왕들의 글씨인 御筆을 모아 간행한≪列聖御筆≫도 있다. 현종 3년(1662) 嶺陽君 李儇·朗善君 李俁 등 종실의 주관으로 문종·세조·성종·인종·명종·선조·원종·인조·효종의 어필을 석각한≪열성어필≫첩이 간행되었다. 이후 숙종·경종·영조 초년에는 각각 선왕인 현종·숙종·경종의 어필이 더해져 증간되었으며, 영조 초년의 증간본에는 태조의 어필도 추가되었다. 한편 경종 초년에는 선조·인조·효종·현종·숙종의 어필을 목각한≪열성어필≫책이 간행되었는데, 여기에는 석각본에 없는 어필이 다수 실렸다. 조선시대 어필을 일람하거나 서적간행 수준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0863)李完雨,<朝鮮王朝의 列聖御筆 刊行>(≪文化財≫24, 文化財硏究所, 1991), 147∼168쪽.

 獨帖으로는 김생의≪田遊巖山家序≫, 李嵒의≪送李愿歸盤谷序≫등을 비롯하여 李瑢의≪擣衣篇≫·≪再送嚴上座歸南序≫, 박팽년의≪草書千字文≫, 김인후의≪草書千字文≫, 황기로의≪懷素上人草書歌≫, 선조의≪宣廟御筆≫, 한호의≪楷書千字文≫·≪草書千字文≫·≪滕王閣詩序≫등이 유명하다. 이밖에 명현과 명서가의 필적이 敬慕와 글씨학습의 대상으로 무수히 간행되었다.

 한편 조선 중기에는 金石拓本을 수집하는 등 金石學의 기초가 형성되었다. 금석문을 수집하거나 이의 釋文을 위한 고전적 의미의 금석학은 중국 宋代 이후로 진전되어 왔는데 조선시대에도 그러한 자취들이 보인다. 그 가운데 趙涑(1595∼1668)은 신라·고려·조선의 명서가 87명의 금석탁본을 모아 金石帖 4책을 이루어 조선시대 금석학을 선도하였고, 金壽增·金昌肅 부자는 신라·고려 이후의 古碑탁본 180여 종을 수장하고 이에 대한 간단한 논고를 시도하였으며, 李俁·李亻品 형제는 신라·고려·조선의 금석탁본 300여 종을 모아≪大東金石帖≫7책을 이루었다. 이들의 수집활동은 조선금석학의 토대를 이루어 금석문의 학문적 가치를 높이는 한편 금석에 새겨진 문자의 서예적 가치를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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